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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스푼 May 05. 2022

메이드의 고향방문 (2)

그에게 자선을 베풀고 싶지 않다.

2년마다 한 번씩 고용주가 항공권을 부담해서 유급으로 보내주는 메이드의 귀향휴가. 그런데 우리집 메이드는 코로나 때문에 본국에 돌아갈 상황이 안 돼서 일단은 돈을 충분히 챙겨준 후에, 상황이 좋아지면 그 돈으로 귀향휴가를 다녀오라고 했었다. 그런데 막상 여행을 갈 수 있는 상황이 되니, 그는 그 때 받은 돈은 이제 없고 자기 돈으로 다녀오기는 아깝다며 그냥 귀향휴가를 안 가겠다고 한다.


그래, 그러면 가지 마라.


그랬더니 이번에는 남편이 안달을 하고 나섰다. 그래도 애가 셋이나 있고 4년이 넘도록 가족들을 못 봤는데, 가족을 보는 건 기본적인 인권의 문제가 아니냐. 지난 2년 동안 코로나 때문에 내 부모님, 내 형제를 못 만난 것도 이렇게 기가 막히고 억울한데, 저 친구도 가족은 만나게 해 줘야 하지 않겠느냐. 저 친구에게는 그토록 중요한 일인데 항공권 300불은 우리에겐 큰 돈이 아니니, 속는 셈치고 비행기표 사서 보내 주자. 저 친구가 이뻐서가 아니라, 약간의 우리 힘으로 누군가의 인생에서 의미있는 일을 이루어 줄 수 있다면 좋은 것 아니냐.


아휴...


남편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런데 내 시스템 안에서는 그건 아니라는 에러 메세지가 삑삑 울린다.


당신이 가까운 곳에서 발견한 불우이웃을 돕는 마음으로 그러는 거 잘 알아. 그런데 당신은 메이드에게 자선을 베풀고 싶지만 난 그런 마음이 아니거든.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라면, 필리핀 어느 시골에 돈 300불이 부족해서 병원을 못 가고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면 나도 흔쾌히 내놓을 거야. 그런데 나한테 우리 집 메이드는 자선의 대상이 아니야. 그는 내 고용인이고, 나는 불쌍하다는 마음에 그에게 보너스를 주기는 싫어.


나는 그동안 일을 참 잘 해준 게 고마워서 보너스를 줄 마음도 아니고, 앞으로 일을 잘 해 달라는 당부의 마음에 보너스를 주고 싶지도 않아. 그러기엔 그동안 그의 노동을 관리하느라 내가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썼고, 남은 기간에 더 이상의 기대치가 없어. 고용인에게 보너스를 주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없고, 자선을 베풀기에는 아무 감정 없이 담백한 타인이 아닌 걸.




집안에 가사노동자가 들어오면 흔히 그 집 아내가 편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가장 큰 수혜자는 남편이다. 부부 둘이서 해야 했을 일들인데 그걸 도울 여자가 집안에 한 명 더 들어오면, 제일 먼저 손을 떼게 되는 사람은 남편이기 때문이다. 몸을 움직여서 하는 노동의 많은 부분은 가사노동자가 떠맡고, 그 일을 파악해서 시킬 걸 시키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고용인과 소통하는 관리업무는 모두 아내의 몫이 된다. 그뿐인가, 집안에 가사노동자 한 명이 들어오면 청소, 빨래, 요리 등 집안을 유지하는 기준이 굉장히 높아진다.


그리하여 싱가포르에서 남편은 집안일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몸이 편하고, 그렇다고 와이프가 혼자서 집안일을 다 하는 게 아니니 마음도 편하게 되었다. 특별히 메이드가 고울 이유는 없지만 하루종일 집을 비우는 본인에게는 미울 이유도 없으니, 그에게는 메이드가 맘편한 우렁각시인 셈이다. 그래서 남편은 메이드에게 매우 너그럽고, 돈과 친절한 말로 적당히 때울 수 있는 것을 기꺼워한다. 간간히 메이드가 마음에 안 드는 때가 있어도 우리가 주는 임금을 통해 개발도상국의 약자를 돕는다고 생각하면 본인 마음도 좋으니 말이다. 그런 이유로 여기서는 보통 남자들이 메이드에게 너그럽고 돈에도 후하다.


그러나 막상 돈을 주고 일을 시키고 그 진행과정과 일하는 태도를 내내 보면서 매일 그를 상대하는 내 감정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가족을 떼어놓고 남의 나라에 와서 남의집살이를 하는 그가 불쌍하고 안됐다는 느낌은, 그를 처음 만났을 때는 유효했지만 더 이상은 나와 그의 관계를 지배하는 감정이 아니다. 이제는 그에게 일을 시키며 하나하나 상대하기가 지겹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면 우리집 메이드만 그런 게 아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동남아 입주메이드가 일반적으로 이런 면이 있는 것 같다. 책임감이랄까, 주인의식이 없다. 너무 당연한가? 자기 가정이 아닌데.


근데 더 나아가서, 일을 할 때 언제나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 빨리 눈에 보이게 일을 끝내고 땡! 하려는 태도가 장착되어 있다. 남의집살이를 십여 년 해온 사람들의 자기보존 본능이 아닐까 생각한다. 에너지를 아끼려는 가장 기본적인 노력은 머리를 안 쓰고 결정을 피하는 것이다. 머리가 나쁜 것과는 다르다. 메이드들은 정신노동 및 감정노동을 최대한 피하고, 몸만 움직여서 시키는 일만 하려는 경향이 있다.


싱가포르에서 그들의 지위와 각 개인이 처한 상황을 볼 때는 이해가 되는 생존전략이지만, 내 집에서 일하는 고용인이 이렇다는 걸 매일 보는 건 달랐다. 그와 함께 지내면서 첫 일 년 정도까지는 이런저런 좋은 일이나 안타까운 사연을 들을 때마다 용돈을 집어주곤 했다. 생일에 크리스마스에, 본국에 동생이 난산으로 급한 수술을 앞두고 있다고 했을 때, 그 동생이 출산했는데 돈이 없다고 할 때, 아이들이 온라인 수업 하는데 인터넷이 없다고 할 때. 아니 인터넷은 되는데 전화기가 부족하다고 했던가?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와, 내 호의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뭘 준다고 해서 일을 더 잘하거나 태도가 변하지는 않는구나 하는 걸 느꼈다.


이에 대해 내가 주변에서 들은 가장 명쾌한 의견은 이것이었다. 겨우 그만한 월급 받고 누가 신경을 써서 일하나요? 그 돈 주면서는 그냥 하루 세 끼 설거지만 해줘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야지요.


그 말도 맞다. 그런데 나도 같은 돈을 주더라도 출퇴근으로 일하며 정해진 시간에 우리집에 와서 딱 시키는 일을 끝내놓고 가는 도우미라면 이런 감정이 들었을 것 같지 않은데, 문제는 그가 우리 집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그와 나의 선택이 아니라 싱가포르의 사회시스템에 기반한다.


싱가포르는 너무 비싼 나라이기 때문에 동남아 입주메이드를 들여올 때 그들의 숙식을 각자 스스로 부담하게 하면 이토록 낮은 임금수준을 유지할 수가 없다. 그래서 입주메이드의 숙식은 물론 그들에 관련한 모든 비용을 고용주가 책임져야 한다. 메이드 월급의 1/3에 해당하는 메이드 세금은 정부에 매달 내가 낸다. 메이드가 아파도 병원에는 내가 데려가고, 업무와 관계없는 이유로 병원비가 발생해도 전부 내 몫이 된다. 심하게는 메이드가 돈을 빌리고 갚지 않아 집에 매일 사채업자가 찾아와서 그걸 다 갚아줬다는 사람도 있다. 그가 싱가포르에 살고 있는 한 내가 그의 보호자다. 지나치게 가깝게 묶여 있다. 우린 그렇게 끈끈한 사이가 아닌데.


이 복잡한 마음이 2년 반 동안 쌓여, 나는 남한테도 할 수 있는 적선을 우리 집 메이드에게는 더 이상 하기 싫은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해야 할 건 다 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은, 최소한 치사하지는 않은 고용주였다. 그러나 고용인으로서 그에게 특별히 좋은 기억도 앞으로의 기대도 없으니, '속는 셈치고' 한 번 더 보너스를 쏘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남편에게는 이렇게 정리했다. 당신이 좋은 마음으로 그러는 건 이해하지만, 나는 당신과 입장이 달라. 항공권을 사서 데이지를 본국에 보내주는 문제를 당신과 나의 도덕적 대결(moral battleground)로 만들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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