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용을 대 주어야 휴가를 간다.
싱가포르에 사는 한인 엄마들끼리 모이면 화제는 국제학교 아니면 메이드라고 한다. 오늘의 토픽은 메이드. 우리 집에 살며 매일 보는 사람이지만, 가족도 아니고 친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 맘에 쏙 드는 심복도 아닌 투명한 존재. 아이들이 매일 다니는 국제학교만큼이나, 싱가포르 생활의 필수적인 일부지만 여기 살지 않는 사람들과는 공감하기 어려운 낯선 주제.
메이드와 고용주는 보통 2년 계약으로 맺어진다. 해고 또는 퇴직은 자유로워서, 양쪽 중 어느 한 쪽이라도 상대방에게 통보를 하면 계약을 깰 수 있다. 다만 메이드는 고용주 없이는 체류신분이 유효하지 않기 때문에, 싱가포르를 아예 뜰 각오를 한 게 아니라면 다음 일자리를 확보해놓지 않고서 이전 일자리를 그만두지 않는다. 2년이 지나면 재계약을 할 수 있는데, 그 때는 고용주가 메이드에게 2주의 유급휴가 + 항공권을 사서 고국으로 귀향휴가를 보내주는 것이 정부의 권고사항이자 일반적인 관습이다.
그래서 메이드는 이론적으로는 2년마다 본국에 돌아갈 수 있지만, 많은 집에서는 2년 후에 재계약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새 고용주를 만나면 메이드는 또 2년이 지날 때까지 본국에 다녀오기 힘들다. 비자 상태가 뜨면 안 되기 때문에 한 집에서 끝나면 다른 집으로 곧장 고용관계가 이어져야 하고, 설령 그 중 한 집에서 유급휴가 형식으로 비자를 유지해준다 해도 자기 돈을 들여서 비행기표를 살 정도로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메이드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이전 집에서 2년 동안 본국에 돌아가지 못한 채 계약이 끝나 우리 집에 오게 된 데이지는 다음 2년이 지날 때까지 총 4년 동안 본국에 돌아가지 못했다.
우리 집에서 첫 2년이 지났을 때는 아직 코로나가 한창이라 고국인 필리핀을 방문할 수 없었다.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 도착하면 3주 격리가 있고, 거기서 격리를 마치고 본인의 고향 주에 돌아가면 거기서 또 2주 격리가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2주 정도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나면 다시 싱가포르로 돌아올 때 비슷한 상황을 반복해야 했다. 마닐라에서 격리, 그리고 또 싱가포르에서 격리. 다 합치면 총 11-12주가 걸리는데, 이만한 기간의 유급휴가를 내주기도 힘들거니와 각종 격리 비용까지 내가 부담할 이유는 없었다.
대신 재계약을 하면서, 평상시에는 300불대 하는 필리핀행 왕복 항공권 대신 한 달 월급인 900불을 보너스로 따로 주었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본국에 보내줄 수 없지만, 상황이 풀리고 격리가 없어지는 대로 2주 간의 유급휴가를 줄 테니 그 때는 이 돈으로 본국에 다녀오라고 말이다. 그는 'God Bless!'를 외치며 기쁘게 보너스를 받았다. 서양인들 중에는 메이드의 휴가나 보너스에 훨씬 후한 사람들도 있다지만, 비슷한 기간에 재계약을 한 주변 지인들이 주로 3-500불 정도의 보너스를 준 것을 생각하면 부족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 후로 반 년이 더 지나 갑자기 여기저기 국경이 열리고 격리가 없어지면서다.
우리는 올 여름에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으니, 더 이상의 재계약은 없을 것이었다. 메이드더러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라고 두 달의 여유를 주었다. 그리고 다음 일자리를 확보하고 나면 그동안 미뤘던 본국 휴가를 2주 보내주겠다고 제안했다. 4년 반이 지났으니 너도 가족들을 한 번 보고 와야지 하고 말이다. 우리만 겨울에도 여름에도 가족들을 보러 매번 한국에 가는 게 메이드 보기에 미안하기도 했고.
그런데 그녀는 자기는 본국에 갈 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전 고용주는 2주가 아니라 한 달을 보내주었고 비행기표도 사주었다며, 내가 항공권을 해주지 않는다면 고작 2주 있자고 자기 돈을 들여 본국에 갈 만큼의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어쩐지 괘씸했다. 반 년 전에 준 900불은 어디 쓰고. 그리고 그 때는 분명히 ‘나중에’ 2주 유급휴가를 주면 그 돈으로 본국에 다녀오기로 동의해 놓고 나서, 이제 와서는 이전 고용주와 나를 슬그머니 비교하며 내가 제대로 안해줘서 본국에 못 간다는 식으로 핑계를 대? 아무튼 나는 분명히 돈도 줬고 기회도 줬으니, 나중에라도 마음 변하면 우리와의 고용기간이 끝나기 전에 가족을 만나러 한 번 다녀오라고 일러 두었다. 새 고용주와 시작하고 나면 앞으로 2년이 또 지나기 전에는 비행기표는 고사하고 유급휴가를 받기도 어려울 테니 말이다.
데이지는 본국에 아들 셋을 두고 왔다. 아이들 나이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첫째가 내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다고 하고 막내는 작년에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니 13-18세 사이일 것이다. 서류상으로 보면 그녀가 싱가포르에서 메이드 생활을 시작한 것은 12년 전. 아마도 막내가 돌 지나고 두 돌 되기 전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스무 살 무렵에 출산을 시작해서 아이 셋을 연달아 낳았고 남편은 없다.
여기에 데이지가 아닌 누구의 이름을 넣어도 사연은 비슷하다. 우리 집에는 데이지 이전에 로즈라는 메이드가 한 명 잠시 있다 갔는데, 로즈의 가정사와 프로필도 이와 같았다. 나이는 30대 중반, 메이드 경력은 10년 안팎, 두고 온 아이는 세 명, 남편은 없다. 데이지의 막내동생도 최근에 싱가포르에서 메이드 일을 시작했는데, 그녀의 프로필도 마찬가지다. 메이드 일을 시작한 나이는 20대 중반, 두고 온 아이는 세 명인데 그 중 막내는 돌이 갓 지났고, 남편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