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해라"는 마음으로 키운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눈에 보이는 사건이나 성취(또는 실패)보다도 별 거 없었던 작은 순간이 유난히 기억에 남을 때가 있다. 그 순간이 아이의 성장이나 변화를 목격하는 ‘아하!"의 순간이기도 하다.
작년 8월에 4학년을 시작할 때는 아들에 대해서 신경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아이가 뭐든지 하면 잘하는데, 막상 하기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년에 쓴 글에는 '동기부여'에 대한 고민이 묻어난다.
아이들이 하기 싫어할 때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너무 쉬워서, 너무 어려워서, 아이가 예민해서, 불안해서, 노력하기 싫어서, 자신감이 없어서, 정말로 적성에 안 맞아서... 이유가 너무 많으니 딱 떨어지는 해결책도 없다.
아이가 하면 잘할 것 같은데도 본인이 못한다고 징징대면 방법이 없다.
"괜찮아, 넌 잘할 수 있어" 라고 격려하면 할수록 나는 못한다며 더 우겨댄다. 엄마와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자기가 정말 못해야 하니까, 대치상황이 길어질수록 나는 못한다고 더 강력하게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그래, 넌 정말 못하지” 하고 내가 져줄 수도 없는 일.
"그래, 그럼 하지 말아라"고 놔두면 진짜로 안하기 때문에, 정말 안해도 되는 일이 아니면 함부로 쓸 카드가 아니다.
이야기 하나. 피아노 콩쿨 본선이 있기 며칠 전이었다. 그런대로 준비가 되어 있는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전날 전전날에는 좀 긴장해서 연습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잔소리를 했더니, 아이가 거실 커피 테이블에 있는 "Big Nate"라는 만화책을 집어들어 뒤적이더니 한 페이지를 내밀었다.
네이트가 10km 마라톤을 준비하는 아빠에게 잔소리를 하는 장면이었다. "아빠, 그래도 낼모레 마라톤인데 연습을 좀 해야지요." 네이트 아빠는 변명한다. "어차피 마라톤 당일에 시합장에서는 아드레날린이 솟아 평소보다 잘하기 때문에 10km 정도는 뛸 수 있게 돼. 지금 연습하면 오히려 지쳐."
이 무슨 궤변인가 싶어서 웃음이 났지만, 아이의 메세지는 알아들었다. 어차피 콩쿨 당일에는 아드레날린이 솟아서 평소보다 잘할 수 있으니 전날 전전날 굳이 더 연습해서 달라질 게 없다는 뜻이었다. 1분짜리 곡 두 개였기 때문에 여태까지 연습한 것만으로도 이미 지겨워서, 지금 더 해봤자 나아지지도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니 잔소리 하지 말고 자기를 내버려 둬 달라는.
이야기 둘. 어느 날 오후 아이랑 아파트를 한 바퀴 걸었다. 멍하니 걷던 중에 아이가 이런 말을 꺼냈다. "엄마, 내가 전보다 울컥 하고 짜증내는 게 줄어든 것 같아 (Mom, I get less upset these days)."
정말 그랬다. 이전에 아이는 해야 하는 일이 있는데 하기 싫거나 잘 못할 것 같으면 확 짜증을 내곤 했다. 피아노 레슨이 있는 날 아침, 내일 학교에서 글쓰기 워크샵이 있는 날, 다음 주에 발표 과제가 있을 때 매번 징징대곤 했는데 어느 새 그게 많이 줄어 있었다.
"그러게, 엄마가 보기에도 네가 짜증을 덜 내는 것 같다. 지난번에 글쓰기 워크샵도 처음에는 스트레스 많이 받았는데 막상 결과물은 정말 좋았잖아. 지금 독화살개구리(Poison dart frog)에 대한 발표 과제도 데드라인에 맞춰서 계획대로 잘 준비하고 있고. 하다 보니까 점점 익숙해져서 쉬워졌지?”
"아니야, 아직도 완전히 편안하진 않은데 그래도 전보다는 덜해. 그리고 아직도 스트레스를 받는데, 전보다는 확 올라오는 강도가 줄어들었어."
이야기 마지막. 오늘은 학교에서 수영 펀드레이징이 있었다. 아이들이 15분 동안 수영장을 왔다갔다 하고, 가족이나 친척들은 아이의 수영하는 거리에 따라 학교에서 지정한 비영리단체에 약정한 금액을 기부하는 행사였다. 나는 아이들의 수영 기록을 재는 학부모 자원봉사자로 참가했다.
우리 아이가 수영을 딱히 잘하는 것도 아니고 코로나 백신을 맞은지도 2주일이 채 안 된 데다가, 자꾸 잘하라고 하면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는 아이라서 나는 "15분 동안 전속력으로 수영하지 말고 쉬엄쉬엄 해라"고 미리 이야기했다.
그런데 왠걸, 막상 학교에 가 보니 우리 아이는 수영장의 가운데 레인에 배정받아 있었다. 가운데 레인일수록 수영 잘하는 아이를 배정한다고 한다. 가장자리에서 수영하는 애들은 하다가 힘들면 벽을 붙들고 쉴 수 있지만 가운데 레인은 쉴 수 없어서 그렇다. 그런데 도대체 왜 우리 애가 가운데 레인에?
전날 선생님이 "수영 잘하는 사람?" 하고 물어봤을 때 본인이 수영 잘한다고 자원을 했다고 한다. 아이구야, 국제학교에서 수영 잘하는 아이들은 어린 나이부터 강도 높게 훈련해서 체격도 실력도 남다르다. 우리 아이가 수영을 잘하지 않는다는 걸 나도 알고 본인도 알 텐데.
나는 맨 가장자리 레인에서 기록을 담당했지만 눈은 자꾸 가운데 레인으로 향했다. 그런데 어머나, 우리 아이가 쉬지 않고 수영을 하는 거다. 가장자리 레인 아이들은 한 쪽 끝에 도착하면 자기들끼리 쉬기도 하고 이야기도 하는데, 가운데 레인 아이들은 분위기가 경쟁적이라 도착하면 곧장 벽을 차고 다시 출발하기를 반복했다. 근데 놀랍게도 우리 아이가 거기서 뒤지지 않고 수영을 하고 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아이들을 응원하고 사진을 찍으러 왔다갔다하던 담임 선생님이 슬쩍 나에게 와서 물었다.
"전학가신다고요? 아이한테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네, 기회가 없어서 미리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올해 학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요."
"그렇군요. 아이는 뭐든지 잘하는(strong) 아이입니다. 어디에 가도 걱정은 없어요. 다만 자신감만 조금 더 있으면 좋을 텐데요."
9개월 전, 4학년을 시작하던 무렵에 이런 말을 들었으면 마음이 무거워졌을 것이다. 우리 애가 왜 자신감이 부족한 걸까?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말이다. 그런데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자신감이란 아이가 자기 안에서 조금씩 발견해 나가는 것 같다. 없는 걸 만들어 주는 것도 아니고, 작은 걸 키워 주는 것도 아니다. 지난 몇 달 사이에 내가 눈치챈 것은, 아이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굉장히 잘 알고 있고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아갈수록 자신감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편안하게 여길수록, 본인의 자신감을 발견해서 사용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똑똑하고 집중력이 좋은 이 아이는 어렸을 때의 나를 닮은 구석이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고, 그게 내 자신감의 쉬운 원천이었다. 한국에서 똑똑한 어린이는 부모님과 선생님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법이다. 부모님과 선생님은 언제나 나에게 '조금 더'를 요구했다. 잘 하면 잘 할수록 "넌 더 잘할 수 있다"며 "더 욕심을 내라"고들 했다. 잘 못하면 "넌 이럴 아이가 아니잖니"라고 했다.
육아에 있어서는 누구나 자기 자신의 경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자꾸만 아이에게 "대충만 해라"라고 하게 된다. 이미 약간의 완벽주의와 높은 기준, 그로 인한 불안감을 갖고 있는 아이에게 넌 더 잘할 수 있다, 더 잘해라고 할 수가 없다. 자신감을 가지라는 말도 하고 싶지 않다. 더 욕심을 내라는 어른들의 주문이 내게는 "욕심을 내서 더 잘하라"는 듣기 싫은 부담이었다. 아이에게 "자신감을 갖고 더 잘하라"고 주문하고 싶지 않다.
대충 해라. 그래야 지치지 않고 오래 간다.
적당히 해라. 난 네가 적당히 할 줄 알았는데 너는 나를 계속 놀래키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