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관리라는 기나긴 여정을 시작한다.
얼마 전에 <아이의 사춘기>라는 제목으로 아이의 취침시간이 늦어지는 것에 대해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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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eenage Brain>이라는 책에 따르면, 그동안에는 청소년기/사춘기의 많은 행동이 '호르몬' 탓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실제로는 이 시기 '두뇌'의 발달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인간의 두뇌는 출생 후 첫 몇 년 동안 급격히 발달한 후, 한동안은 완만하게 변화하다가, 다시 청소년기에 2차로 크게 발달한다.
구체적으로, 인간의 두뇌는 맨 뒤에서부터 점점 앞쪽으로 발달하는데 제일 먼저 시각을 비롯한 오감과 대근육 발달이 생후 1년 동안 완성된다. 그래서 아기는 돌 무렵에 걸음마를 시작할 수 있다. 다음 몇 년 동안은 언어영역과 소근육 발달이 일어난다. 그 후 여러 해 동안 두뇌는 이미 발달한 부분을 정교하게 다듬어 간다.
영어로는 teenage라고 부르는 13세 무렵부터는 두뇌의 가장 앞부분에 있는 전두엽이 발달하기 시작하는데, 이 전두엽은 통찰력, 판단력, 추상적 사고, 계획성, 자아 인식, 자기 조절 및 절제, 그리고 위험을 분간하는 등 인간의 전반적인 '관리 기능'을 담당한다. 그러니 전두엽이 충분히 발달하기 전의 청소년은 몸은 커도 정신은 아직 미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전두엽의 발달은 20대 초반까지 계속해서 진행된다.
청소년기에 일어나는 대표적인 두뇌 변화 중 하나가 수면패턴이 야행성이 되는 것이다. 10-12살 무렵부터 청소년들은 점점 졸음이 오는 시간이 늦어지고 잠이 깨는 시간도 늦어진다고 한다. 아이가 밤 12시에 잠자리에 들고 아침 8시에 일어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등교시간에 맞추려면 아침 6시에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자꾸 늦게 자고 싶어하는 아이를 그래도 시간 맞춰 재우는 게 딸의 사춘기를 맞아 나의 첫 과제였다.
아이가 늦게 자고 싶어하는 게 사춘기의 시작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시작의 시작일 뿐이었다.
진짜 어려움은, 아이가 늦게 자고서도 일찍 일어나고 싶어하면서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 딸은 일찍 일어나서 아침 샤워를 하고, 생야채 위주의 점심 도시락을 스스로 싸고,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깨끗하고 상쾌한 기분으로 학교에 가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걸 다 하려고 아이가 5시 20분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자는 시간은 10시에서 10시 반, 10시 반에서 11시로 자꾸 늦어지는데 일어나는 시간만 욕심을 부리니 수면시간이 줄어들었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려면 성능 좋은 알람시계가 있어야 하는데, 집에 있는 시계는 알람 소리가 단조롭고 너무 작아서 일어나기 힘들다며 다양한 알람 소리를 고르고 볼륨도 조절할 수 있는 핸드폰을 머리맡에 두고 자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취침 시간에 핸드폰 충전은 거실에서 하는 게 우리 집 방침이었다.
그리고 그 우렁찬 핸드폰 알람 소리는 아이만 깨우는 게 아니라 나까지 깨웠다. 이제 나는 아이 방에서 알람이 울리는 5시 20분에 한 번 깨고, 알람 소리가 몇 번 울리는 걸 잠결에 듣다가 그게 안 꺼지면 아이 방에 가서 알람을 멈추러 일어나야 한다. 다행히 곧 알람이 조용해지면 ‘아, 얘가 일어났구나' 하고 다시 잠들 수 있는데, 혹시 아이가 snooze 버튼만 누르고 다시 잠든 거라면 5시 40분에 또 알람이 울리는 소리에 재차 깨게 된다. 그리고 나면 6시에 내 알람이 울린다. 이렇게 여러 번 반복해서 깨면 내 하루 컨디션이 엉망진창이 된다.
아이가 늦게 자고 싶어하는 것보다 일찍 일어나고 싶어하는 게 더 큰 문제가 될 줄이야.
처음에는 며칠 하다가 말 줄 알았는데, 그럴 기미가 없다.
'잘 말해서 아침 샤워를 그만두게 해야겠어' 하고 마음먹었는데, 아이가 쓰는 화장실을 보고서 마음을 접었다. 화장실 거울의 한쪽에는 포스트잇에 아이가 정성껏 쓴 자기암시의 다짐이 붙어 있었다.
나는 아름답다.
나는 힘이 있다.
나는 똑똑하다.
나는 열심히 한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차분하다.
나는 에너지가 많다.
나는 사랑받는다.
나는 멋지다.
나는 운동을 잘한다.
나는 인기가 많다.
나는 참을성이 많다.
나는 재미있다.
나는 책임감이 있다.
나는 완벽하다.
책에서 읽은 청소년기 전두엽의 발달을 목도한 기분이었다. 우리 딸이 이제 적극적으로 자아를 인식하고, 자기가 되고 싶은 모습을 생각하며,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계획하고, 자기의 계획대로 실행하려고 노력하는구나. 그 와중에 좌충우돌이 좀 있기는 하지만.
<The Teenage Brain>에서 읽은 바로는, 청소년기의 두뇌는 놀라울 정도로 배움에 최적화되어 있다. 새로운 경험과 지식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여 내 것으로 하는 나이. 그리하여 청소년의 두뇌는 새로운 것에 열광하고 모험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감정 조절에 약하고 위험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아이는 자꾸 부모의 질서를 벗어나 자기만의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싶어할 것이고, 나는 가까이서 그걸 보면서 때로는 불편하고, 때로는 못마땅하고, 때로는 불안하겠지. 언제가 과연 이 아이를 스톱시킬 때이며, 언제가 내 욕심을 참고 아이를 내버려두어야 할 때인지 혼란스러울 때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잠을 줄여 아침 샤워를 하면서 '내가 되고 싶은 나'에 한 발짝 다가가려는 시도는 존중해 주고 싶다. 아이의 수면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영 불만스럽지만, 어차피 이번 학기는 두 달도 채 안 남았으니까 괜찮겠지. 내 수면과 컨디션이 엉망이 되는 게 큰 문제지만, 그것도 일단 두 달만 참아보자.
13살의 딸이 자기관리라는 인생의 긴 여정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