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인생에 자선은 필요없다.
우리가 유급 귀향휴가를 권했는데 자기는 여비가 아까워서 안 간다고 우기는 메이드. 남편은 '그 돈이 우리에게는 얼마 안 되는 돈'이라는 걸 강조하며 데이지와 그의 가족에게 의미있는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좋은 일을 하자고 주장했고, 나는 남편에게 본인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본인의 관점으로만 보지 말라고 했다.
당신에게는 4년 반 동안 가족을 못 봤다는 게 기가 막힌 일일 수도 있는데, 많은 메이드들은 그러고 살아 (돈을 모은다고, 또는 매 2년마다 고용주를 바꾸면서 계속 귀향휴가를 못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데이지도 진짜로 집에 가고 싶었다면 전에 귀향 보너스로 준 돈을 남겨 뒀을 거야. 나도 사정은 다 모르지만, 데이지의 귀향 문제에 본인 마음을 투사하지 마. 필리핀 메이드들은, 우리랑 너무 달라.
내 의견에 모두 동의한 건 아니지만 본인이 좋은 사람이 되어 자기 마음이 편해지고자 메이드의 귀향 보너스를 추가로 주자고 우긴 건 사실이기 때문에, 남편은 일단은 자기 주장을 거두고 물러섰다.
그는 빠르게 새 고용주를 찾았다. 6월 초에 우리집에서 끝내고 그 집으로 옮겨갈 예정이다. 그런데 새 고용주를 구하고 나서 그의 태도가 더 느슨해졌다. 어느 날, 비록 작은 일이지만 정신을 아예 딴 데 두고 있는 게 아니라면 하지 않았을 실수를 연달아 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아 해서 내가 정색을 하고 얘기했다.
우리 이럴 거면 6월까지 기다리지 말고 5월 초에 고용관계를 끝내자. 네가 우리 집에서 영 마음이 뜬 것 같다.
그날 저녁 그는 나를 붙들고 사정을 했다. 본국에 있는 동생이 유방암으로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 중이라서 돈이 많이 들고, 아이를 키워 주고 있는 친정엄마랑 자기 아이들이 갈등이 많아서 요즘 정신이 없다고. 자기가 정신줄 놓고 일하고 있는 거 알고 있는데, 신경쓰이는 일이 너무 많아서 어쩔 수가 없다고 말이다.
막상 이런 말을 들으니까 마음이 안 좋았다. 특히 이 동생은 지난번에 조산으로 응급실에 갔을 때 내가 병원비 하라고 몇백 불 쥐어 준 동생인데, 그 때 아이 낳고 곧이어 또 임신해서 애 한 명 더 낳고 이젠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고. 얼마나 마음이 갑갑할까는 두 번째 문제고, 혹시라도 동생이 잘못된다면 한 번 보고라도 와야 하지 않겠는가 싶어 나도 마음이 약해졌다.
며칠 후에 나는 그를 붙들고, 그러면 여비를 내가 해 줄 테니 본국에 2주 동안 다녀오라고 권했고,
그는 자기는 모아 둔 돈이 없어서 빈손으로는 고향에 갈 수 없다며 거절했다.
저는 빈손으로는 고향에 못 가요. 지난번에 갔을 때도 아들이 20페소(약 500원)만 달라고 하는데 그 돈이 없어서 못 줬어요. 그래서 남동생한테 20페소만 빌려주면 나중에 싱가포르에 돌아가서 갚겠다고 했는데 남동생이 자기도 돈이 없다고 안 빌려 주더라고요. 아이들은 내가 뭘 가져올까 뭘 해줄 수 있을까만 기다리고 있는데 이렇게 한 푼도 없이는 집에 못 가요.
(그러면 내가 비행기표 뿐 아니라 용돈을 좀 더 쥐어 줘서 보내야 하나?)
돈 없이 갔던 건 아니에요. 그 때 갈 때는 1,000 싱가포르 달러(약 100만원)를 들고 갔는데 일주일 만에 그 돈이 다 사라지더라고요. 가족들이 이거 해 달라 그러고 저거 해 달라 그러고. 그래서 둘째 주에는 아들이 20페소만 달라고 하는데도 줄 수가 없었어요.
(내가 용돈 좀 더 쥐어주는 걸로는 해결될 일이 아니구나.)
돈을 모을 수가 없어요. 제가 한 달에 900불을 받는데 그 중 500불은 매달 엄마에게 송금해요. 200불은 아이들에게 보내고요. 100불은 집 대출금으로 갚아요 (많은 필리핀 메이드들은 싱가포르에서 가사노동자 생활을 끝내면 본국에서는 더 이상 돈을 벌 구석이 없기 때문에, 여기서 일하는 동안 본국에 대출금을 부어 은퇴용 집을 장만한다.) 50불은 제가 여기서 개인 비용으로 쓰고 나며지 50불을 매달 모으려고 하는데 언제나 집에 무슨 일이 더 생겨서 그때마다 보내면 남는 게 없어요.
(근데 엄마가 아이들을 봐주신다며, 왜 엄마 따로 아이들 따로 돈을 보내는 거지?)
우리 엄마는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엄마는 나를 키우지도 않았으면서. 엄마랑 아빠가 이혼하고 나서 아빠는 새 여자랑 살고, 엄마는 새 남자랑 살러 가서, 세 동생들은 다 제가 키웠어요. 아홉 살 때 학교에 가면서 한 동생은 등에 없고, 한 동생은 팔에 안고, 그러면 또 한 동생은 제 다리를 붙들고 따라왔어요.
고등학교 때 아빠가 새 여자네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느라 저더러 학교를 그만두라고 해서, 아빠 집을 떠나 엄마를 찾아갔어요. 엄마는 날 학교에는 보내 주겠지 하고. 그런데 엄마도 돈이 없어서 저는 일을 하면서 학교를 다녔어요. 그때도 엄마는 제 고용주를 찾아가서 제 월급을 가불받아다가 자기가 다 쓰곤 했어요. 엄마는 지금도 여기저기서 돈을 많이 꾸어 쓰고, 매달 제가 돈을 보내면 그걸로 이전 달에 진 빚을 갚아요. 그래서 안 보낼 수가 없어요. 제가 돈을 안 보내면 엄마는 우리 애들한테 가서 막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요.
(여기서부터는 이해가 안 되기 시작했다. 왜 엄마한테 이렇게 많은 돈을 계속 보내는 거지?)
더 자세히는 묻지 않았다. 물어도 이해도 안 될 것 같아서. 이전부터 조금씩 들은 내용을 종합해 보면 필리핀 시골에서는 남자들은 일자리가 없고 여자들만 일을 하는데, 대도시 아니면 외국에 가서 가사노동자 일을 하는 게 가장 흔한 방법이다. 데이지는 그렇게 번 돈으로 본국에 남아 있는 모든 친정식구들을 부양한다. 이혼해서 따로 사는 엄마 아빠 각각, 그리고 직장이 없는 오빠와 남동생과 여동생. 여동생의 아이들. 막내 여동생은 싱가포르에 와서 메이드 생활을 하고 있으니 한 걱정 덜었다. 그리고 어쩌면 하나같이 여자들은 다들 남편은 없는데 스무 살 나이부터 아이들을 연달아 두세 명씩 낳았다.
아, 그리고 자기 아이들에게도 돈을 보내야 하지. 재정적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이러니 마른 모래에 물을 뿌리듯 몇백 불에서 천 불 사이의 돈은 매번 사라지고, 돈은 벌어도 벌어도 끝이 없겠다.
귀향휴가를 가기 싫다는 것은, 고향에 들고 갈 돈이 없다는 것도 이유지만 그냥 이 모든 꼴을 보기 싫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 '돈이 없어서 못 간다'는 일부는 진실이고 일부는 핑계인 것이다. 내가 돈 천 불 더 쥐어 준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그동안 백 불, 이백 불씩 이따금 쥐어 줬던 보너스가 왜 조금도 이 사람을 달라지게 하지 않았는지도 이해할 것 같았다.
받을 때는 기분이 좋아 'God Bless!' 하며 활짝 웃음을 지었지만 그 돈은 마른 땅에 물 한 컵 처럼 순식간에 사라지는 돈이었다. 그 뿐인가. 집안일을 하는 메이드들은 고용주 가족의 생활수준을 알고도 남는다. 본인에게 주는 돈이 우리에게는 큰 돈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본인에게는 있어도 티가 안 나고 우리에게는 없어도 티가 안 나는 돈이니, 당연히 보너스나 월급인상 같은 것으로 고마워하지 않는 것이다. 더 잘하겠다는 의욕은 물론 생기지 않는다.
비행기표를 해준다고 했는데도 그가 귀향휴가를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꽤나 실망했다. 본인의 좋은 의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본인의 좋은 의도가 현실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게 되어서 그랬다. '우리에게는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그걸로 데이지의 가족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해줄 수 있다'가 얼마나 헛된 생각이었는지를 깨달아서 그랬다. 밑 빠진 독에 평생 물을 부어야 하는 P 장녀에게, 있는 자들의 자선이란 자기들이 마음 편하고자 돈을 쓰는 한 방식일 뿐이다.
그래도 이런 사정을 듣고 나서 아무것도 안 하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은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 자선의 건수를 찾았다. 메이드는 고용주를 바꿀 때 고용주는 새 메이드를 만날 때, 메이드 중개인이 있다. 신규 계약을 매칭해 줄 때마다 중개인은 메이드의 한 달 월급에 해당하는 중개수수료를 양쪽에서 각각 받는데, 놀랍지 않게도 그 돈을 턱 내놓을 수 있는 메이드는 없다. 그래서 새 고용주가 양측의 중개수수료를 한꺼번에 부담하고, 메이드는 일정기간 동안 본인의 월급에서 수수료만큼을 깎아서 덜 받는다. 한 달을 무료로 일하기도 하고, 두 달 동안 월급의 절반만 받기도 한다.
우리는 데이지가 새 고용주에게 갚아야 할 수수료를 대신 내주기로 했다. 결국은 300불의 비행기표 대신 900불의 수수료를 내 주게 되었다. 이전에 준 귀향보너스까지 합치면 1,800불이다. 엉겁결에 시세보다 훨씬 많이 주게 되었지만, 그에게는 있어도 티가 나지 않고 우리에게는 없어도 티가 나지 않는다. 돈만 티가 나지 않는 게 아니라, 우리도 주면서 잊어버려야 하고 받은 사람의 태도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
내가 동남아 입주메이드를 경험하면서 끝까지 적응이 안된 불편함이 바로 이것이었다.
우리는 두 개의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인데, 어쩌다가 한 집에서 하루종일 서로를 보고 있게 되었다. 차라리 남이었다면, 서로의 삶을 모르고 살다가 우연히 마주쳤을 때 따뜻한 자선을 베풀고 돌아섰을 것이다. 그런데 자선의 온기는 순간이다. 그의 어려운 사정을 들을 때마다 가만히 있기는 어려웠지만, 도왔다는 뿌듯함은 잠깐일 뿐 그를 인간적으로 더 좋아하게 되지는 않았다. 도움을 받았으니 고마워하며 더 열심히 일할 것을 기대하기도 했다. 그런데 돈을 받을 때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껴안고 "God Bless!"를 외쳤지만 심드렁하게 일하는 태도는 그대로였다. 그의 고단한 현실 또한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른 세계에 속한 두 사람이 한 집에 살고 있다는 현실만 더 불편하게 드러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