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감독 잭 네오의 코미디 영화들
한 나라에 어느 정도 오래 살아야 그 나라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싱가포르에 3년 살았지만 나는 아직도 두리안을 먹어 본 적이 없고, 락사는 한 번 먹고 다시는 입에 댈 생각이 없다. 내가 이 나라에 5년 살고 10년 살면 싱가포르를 알게 될까?
아닐 것 같다. 나의 싱가포르 생활을 한국에 비유한다면 용산이나 한남동 외국인 동네에 살면서 아이들은 서울외국인학교에 보내는 셈인데, 이렇게는 몇 년을 산다 해도 그 나라를 진짜로 알게 될 리 없다. 근데 그렇다면 내가 한국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가? 한국에서 30년을 살았지만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자란 동네와 내가 다닌 학교들 뿐인데.
한국에 대해서 내가 아는 많은 것도 결국은 지식과 간접경험을 통해서다. 마찬가지로 싱가포르에 살면서 이 사람들이 겪은 문화와 역사를 직접경험으로 공유할 수 없으니, 나는 틈틈히 잭 네오(Jack Neo) 감독의 영화를 즐겨 봤다.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영화라고 하면 외국인들은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2018)을 떠올리겠지만 이건 미국 영화고 (싱가포르 작가가 원작소설을 쓰기는 했다), 싱가포르 사람들에게 너희 나라를 더 알고 싶으면 무슨 영화를 봐야 되겠느냐 묻는다면 누구나 잭 네오의 영화를 추천한다.
잭 네오는 코미디언 출신의 영화 각본가/감독/제작자이다. 그는 90년대 후반부터 사회풍자 코미디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감독 커리어의 초반부터 그의 영화는 싱가포르 국내 박스오피스 기록을 계속해서 갈아치웠고 흥행에 성공한 영화마다 속편과 3편이 이어졌다. 지난 20년 동안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싱가포르 사회의 각 분야와 짧은 역사의 면면을 종횡무진 소재로 삼아 '싱가포르 사람들이 생각하는 우리 나라'를 그려 왔음을 알 수 있다.
이 중에 한국 사람들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대표적인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I Not Stupid> (2002)
싱가포르에도 입시지옥이 있다. 이 나라의 입시지옥은 한국의 6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중학교 입시'에서 시작한다. 전국의 모든 초등학생이 6학년에 '초등학교 졸업시험'을 보는데 이 결과에 따라 중학교 진학 트랙이 달라지고, 거기서 한 번 탈락하면 만회할 수가 없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2000년대 초반에는 우열반 시스템이 지금보다 더 가차없어서, 초등학교 재학 중에 이미 여러 레벨로 우열반이 나누어져 있었다고 한다.
<I Not Supid>는 이 '열반'에 다니는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 세 명의 이야기이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야단맞고 집에서 구박받으면서도 꿋꿋이 자기 생활을 찾아가는 이야기라서 누구라도 쉽게 공감할 수 있고 아이들하고도 같이 볼 수 있는 착한 영화다. 그런데 어쩜 이렇게 구석구석 싱가포르 사회를 비꼬는지, 조금만 이 나라를 알고 보면 더욱 재밌다.
빈부격차와 물질주의 (부유한 자가 거침없이 자기 부를 자랑하고 잘난 척 할 수 있는 사회), 엘리트주의 (공부를 못하면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구박을 받는다), 다정하지만 자식을 과보호하는 어머니 (보모국가인 싱가포르 정부를 풍자한 듯), 그리고 부유하지만 권위적인 아버지 (역시나 싱가포르 정부의 독재적인 면을 풍자), 그리고 외국인에 대한 양가감정까지 싱가포르 사회를 깨알같이 돌려깐다.
이 영화의 커다란 성공 이후로 싱가포르 국회에서 초등학교 입시지옥을 완화하기 위해서 교육제도를 조금 변경했다고 하니, 과연 싱가포르 판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의 초등 버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 Ah Boys to Men> (2012)
싱가포르 청년들도 군대를 간다. 두둥! 남자 형제가 없어서 입영은 내게 먼 일이었던 데다가, 한국에는 전쟁영화는 있어도 군생활을 다룬 영화가 별로 없어서 군대 경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싱가포르 사람들에게도 징집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지긋지긋한 의무이자 전국민이 공유하는 성장의 추억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주인공은 이번에도 부유한 집안의 철없는 도련님. 엄격한 아버지와는 사이가 멀고, 어머니와 할머니와 메이드의 과보호 속에서 나약하기만 하다. 여자친구랑 같이 해외로 유학가고 싶어서 어떻게든 의사의 진단서를 받아 군면제를 노려보지만 모두 소용 없는 일. 결국 훈련소에 들어가고 거기서 온갖 종류의 청년들을 만난다.
결말은 촌스럽다. 주인공은 아버지 말씀 듣고 진작에 철들 걸... 하고 후회하며 진짜 적은 외국 군대의 침공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나태함이라는 걸 깨닫는다. 이전 세대의 희생과 애국심에 대한 감사, 그리고 국가 발전에 대한 자긍심도 드러나는 영화다. 촌스럽지만 그래도 국민영화다 (2019년 기준 역대 싱가포르 영화 중 흥행 1위).
여담으로 싱가포르에서는 1996년부터 새로 짓는 모든 아파트는 가구마다 '방공호(bomb shelter)'를 만들어야 한다. 영화에서도 보이듯이 방공호는 대부분 창고 또는 메이드 방으로 쓰이고 있지만 그래도 가가호호 방공호라니. 중립국인 싱가포르가 왜 의무징병에 첨단 무기, 방공호까지 설치하면서 전쟁의 위협을 끊임없이 강조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작은 나라가 중립국 위치를 유지하면서 역내 금융의 중심지 역할을 하려면 무장경비를 삼엄하게 해야 하는 법이라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The Diam Diam Era> (2020)
싱가포르의 영어공용화를 소재로 시작해서 일당독재를 풍자하는 것으로 끝난다. 와, 이렇게 민감한 소재를 옛날 이야기인 척 하며 코미디로 다룰 수도 있구나!
이 영화는 <Long Long Time Ago>라는 싱가포르 근대사 삼부작의 세 번째 이야기다. 앞선 1, 2편은 1965년 싱가포르의 건국에서부터 한 가족이 국가의 변화와 발전을 온몸으로 겪으며 그 시간을 관통해오는 이야기라고 한다. 3편인 <The Diam Diam Era>는 1970년대 후반 학교 교과과정이 전부 영어로 바뀌면서, 영어를 못해 학교공부를 따라잡지 못하는 학생들과 관공서에서 불이익을 받는 서민들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룬 싱가포르의 1980년대. 정부는 공영아파트를 지어 온 국민을 아파트에 입주시키고, 지하철을 개통해 자동차 없이도 어디든지 갈 수 있게 만들며, 영어공용화를 도입해 새 세상을 이끌어갈 엘리트를 교육했다. 그렇지만 이토록 빠르게 발전해가는 세상을 얼른 따라잡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주류 엘리트에서 낙오된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 그리고 과거에 대한 향수와 현재를 향한 비판의 적절한 조화가 모두 재미있었다. 결론은 '가족 사랑, 나라 사랑'으로 촌스럽게 끝났지만 말이다.
Diam이란 말레이어, 그리고 (싱가포르에서 많이 쓰이던 중국어의 한 방언인) 호키엔어로 'shut up'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언어로 상징되는 자기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새로운 언어로 갈아타던지, 아니면 주인공들처럼 변방에서 와글와글 주류에서 무시받는 딴소리를 하면서 버텨야 했던 한 시절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 시절 싱가포르 정부의 주요 정책 및 사회변화가 영화 한 편에 빨리감기하듯 전부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