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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스푼 Jun 01. 2022

<싱가포르 드림>(2006)

국민소득 3만불 시대의 영화

2006년 여름에 결혼을 했다. 원래는 결혼식을 마친 후 미국으로 곧장 갔어야 했는데, 남편이 싱가포르에 한 달 간 출장이 예정돼 있었어서 같이 왔다. 남편은 매일 회사에 갔고, 나는 낮 동안 혼자서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나왔는데, 호텔방에 돌아가서 보니 혹시나 잃어버릴까 봐 일부러 지갑 속에 넣어둔 결혼반지가 사라져 있었다.


아무래도 영화가 끝나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 역에서 표를 사느라 지갑을 열었을 때 반지가 빠져나왔던 것 같다. 서둘러 왔던 길을 되짚어 갔지만 공깃돌보다도 알이 작은 반지를 인파가 북적이는 퇴근길의 지하철 역에서 찾을 수 있을 리가.


"혹시, 1캐럿짜리 다이아 반지를 주웠다는 사람이 있나요?"

 

추적이 가능한 크레딧카드도 아닌, 다이아몬드 반지를 찾아서 분실물 센터에 가져오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날 오후 내가 보고 온 영화는 바로 <싱가포르 드림 Singapore Dreaming>(2006) 이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에 사는 중국계 중산층 가정의 잡히지 않는 행복 이야기


아버지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채무자들의 재산을 압류하는 일을 한다. 평범한 공영아파트에 살고 있는 그는, 콘도에서 살면서 (싱가포르에서는 고급 아파트를 콘도라고 부른다) 멋진 자동차를 몰고 컨트리클럽에서 골프를 치는 라이프를 꿈꾼다. 물론 본인의 힘으로는 실현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그는 매주 로또를 사고 신문에서 갖고 싶은 자동차의 광고 사진을 오려 모은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정말로 로또 1등에 당첨된다!! 꿈은 이루어지는가. 그러나 가족들의 해묵은 불만은 큰 돈을 둘러싸고 해결되기는 커녕, 더욱 불거지기만 한다.


은퇴를 앞둔 아버지, 살림밖에 모르는 엄마, 출산을 앞둔 맞벌이부부인 딸과 사위,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갓 돌아온 아들, 학비를 보태며 그를 기다려 온 아들의 약혼녀... 모두 성실한 사람들이고 가족끼리 사이도 무난하다. 그런데 왜 그들은 다들 불만에 가득차 있고 서로를 원망하며, 금방이라도 확 터질 것 같이 위태로운 걸까?


때는 이미 2006년이었다. 비좁고 지저분한 난개발촌이 득시글하던 싱가포르에 정부가 번듯한 아파트를 짓고 저렴하게 공급해서 온 국민을 입주시킨 지 어느 새 30여 년. 전국민의 80%가 살고 있는 공영아파트에 사는 것은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았다. 곧 아기가 태어나는데, 집에 필리핀 메이드가 있고 자동차 한 대를 끄는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부모님과 약혼녀의 희생으로 미국에서 공부했지만, 미국 시골 구석의 아무도 모르는 무명 대학 졸업장은 별 쓸모가 없었다.


남들처럼 번듯하게 행복하려면 왜 이렇게 많은 것이 필요한가? 왜 이만큼 노력했는데 내가 가진 것은 요것밖에 안 되는가?


국가는 엄청나게 부유해졌는데 개인의 생활수준이 올라가는 것은 한계가 있어서 그렇다.


2006년 당시 싱가포르의 일인당 GDP는 이미 33,769 달러였다. 한국의 일인당 GDP가 3만 달러를 넘은 것이 2017년이니, 대략 지금의 한국과 그 때의 싱가포르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아파트가 있고, 자동차가 있고, 대학을 나왔다고 만족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어떤 아파트이고, 어떤 자동차이고, 어떤 대학인지가 더 중요하다.


그뿐인가? 모두들 더 갖고 싶어하면서 가진 자들의 갑질은 더 심해졌다. 아니면 갑질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사람들이 느끼는 모멸감이 더 커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목구멍에 밥을 집어넣기 위해 일하는 세상이 아니니까 말이다.


2017년 싱가포르는 일인당 GDP 6만 불을 넘어섰다. 국민총생산이 두 배 늘어났다고 국민들이 두 배 더 행복하고 잘살게 되었을 리가 없다. 빠른 시간에 경제성장을 달성한, 어느새 너무나 잘살게 된 사회에서 개인과 가족이 겪는 스트레스는 오히려 두 배로 늘어났을지도 모른다.


영화 속에서 싱가포르 드림은 결국 '돈벼락'이었다. 일단 대출금을 다 갚고, 자식교육에 쏟아부었던 투자금을 회수하고, 내 아기에게는 내가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다 해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서야 드디어 앞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이대로 영원히 행복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떼돈이 들어왔으니, 밀치고 밀리는, 부담받고 부담주는 갑갑한 일상 속에서 잠시 빠져나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을 수 있다.


그날, 내가 잃어버린 다이아몬드 반지는 혹시 누군가의 싱가포르 드림을 이루어 주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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