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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마담 Sep 16. 2019

삼십 대, 그 미묘함에 대하여 #26 - 서른의 덕질

왜 나는 너를 덕질하는가

진지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단순한 사랑이 아니다. 무려 짝사랑이다. 그것도 영영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     


사랑의 시작은 늘 그렇듯 우연함에서 비롯된다. 우연히 시청하게 된 오디션 프로그램이 그 시작이었다. 빌보드 입성을 목표로 한다는 글로벌 아이돌 데뷔 멤버를 선발하는 경연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어설픈 몸짓으로 푸드덕대는 그를 보다 내 동공이 확장됐다. 어머, 어떻게 저런 실력으로 이런 프로그램을? “엄마, 쟤 봐봐.”

      

방송이 끝남과 동시에 수많은 기사가 속속들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예상했던 대로 그도 기사 내용의 적지 않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내 마음을 대변하는 참신한 반응들에 낄낄대다 별생각 없이 한 댓글에 언급된 그의 SNS까지 들어가 보기에 이르렀다. 자신의 팔다리를 마치 남의 것인 양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어설픈 몸짓에서 이미 예상했지만 원래 아이돌을 준비하는 친구는 아니었다. 모델이 본업인 모양이었다. 안무를 따라 하기에 주체할 수 없던 긴 팔다리는 본업에서의 역할로 돌아가 제자리를 찾자 의외로 정상적인 걸 넘어서 멋져 보이기까지 했다. 우월한 피지컬이 강조된 몇 개의 사진에 하트를 누르고 잠이 들었다.

      

사랑에 빠지는 데는 구체적 이유가 없다.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부터 프로그램이 방송될 때마다 내 눈은 자꾸만 그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방송에서 주력으로 미는 참가자는 아니었던지 짠내 나는 분량이었지만 멸치 똥만큼이나 작은 분량 속에서도 이미 품어버린 작은 애정은 아주 잠깐 스쳐 지나는 장면에서조차 그의 우월한 피지컬을 찾게끔 돕고 있었다. 웬일이야, 꽤 괜찮잖아.

      

덕통 사고. 미세먼지가 스멀스멀 침투해 대한민국 전역을 점령하고야 말았듯 그렇게 스며들어버린 나는 그에게 ‘입덕’하고야 말았다. 하트 몇 개를 눌러뒀던 그의 SNS를 본격적으로 팔로우하고 응원의 댓글을 남겼다.

      

시청자들의 문자 투표로 최종 데뷔 멤버가 결정되는 방식의 프로그램이었다. 현실적으로 따져보건대 최종 데뷔 멤버로 뽑히긴 힘들 것 같았지만 이제 나의 ‘원 픽’이 된 이상 낮은 순위로 탈락시킬 순 없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알람을 끄곤 유산균을 챙겨 먹기 전 그에게 한 표를 행사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국민 프로듀서로서의 본분에 충실한 루틴이었다.

      

프로그램도, 팬 문화도 진화한다. 옜다, 마음껏 소비하렴. 오케이. 팬덤 간의 경쟁과 수고로운 노동을 조장하며 방송사에서 풀어준 비하인드 영상, 일대일 직캠의 조회수를 올리는데 나도 크게 한몫했다. 본래 노동은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 아니던가.

      

보리떡 다섯 개과 물고기 두 마리로 사천 명을 배불리 먹였던 예수의 기적처럼, 팬들 또한 짠내 폭발 분량에서조차 그의 짤방을 뽑아 쪄내는 기적을 행했다. 떡밥들을 줄기차게 돌려보며 일주일을 버텼다.

     

충격의 첫 방 이후 다소 시무룩함을 감추지 못하던 그 역시 모니터링을 하며 응원의 반응을 살핀 건지 활기를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진심이 통했던 걸까. 이젠 그도 공식 미션을 잘 풀어나가며 놀랄만한 상승세 곡선을 보여주고 있었다.

      

욕심이 생겼다. 내 한 표로는 부족했다. 매일같이 엄마와 아빠의 핸드폰을 사용해 투표에 참여했고, 영업사원 마냥 캔 음료를 돌리며 회사 사람들에게 은근히 투표를 청탁하기도 했다.

      

탄력이 붙었다. 기세를 몰아 이젠 시간과 노동을 더욱 갈아 넣기 시작했다. 최대한 스트리밍을 돌리고 영업 글을 쓰고 화력을 지원했다. 이젠 정말 미쳐버린 건지 그를 홍보하는데 필요하다는 지하철 광고비까지 입금했다. 지하철 광고가 붙은 첫날, 내가 ‘조공’한 결과물을 보고자 나는 신촌 역으로 향했다. 어디 가냐는 엄마의 말에 나는 ‘사진전’에 간다고 둘러댔다. 맞잖아, 사진전. 사진이 단 하나뿐인 사진전에서 응원의 말을 쓴 짧은 포스트잇 편지를 써 붙였다.

       

그와 나의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데뷔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예상해 왔으면서도 막상 닥치니 입이 썼다. 상심했다.

      

단념이 쉬우면 그걸 어찌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동력을 상실할 법도 한데 놀랍게도 덕질은 멈춰지지 않았다. 그를 응원하는 오픈 카톡방에서 팬들과 꾸준히 대화를 하며 정보를 얻었고, 팬카페에 가입을 했다.

      

팬미팅 소식이 들려온 날 애써 당당한 척 ‘덕밍 아웃’을 하며 참가 희망을 밝힌 내게 친구들은 세상 제일 한심한 인간을 보는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제발 그만두라며 ‘분명 네가 나이가 제일 많을 것이고, 그는 너를 징그러워할 것이며, 모두의 눈에 너는 마치 욘사마와 뵨사마에 열광하는 일본 아줌마 팬같이 보일 것’이라는 팩트 폭행을 날려댔지만 사랑에 빠진 이에게 그런 말이 귀에 박힐 리 없다.

     

나는 그의 1st 팬미팅 티켓팅에 당당히 성공했다.

          


나의 덕질 연대기    

십대들의 우상 H.O.T.

내 인생 최초의 덕질은 무려 초등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그들을 사랑하지 않은 자가 있었을까. 나는 H.O.T. 가 온 세상이었던 시대에 살았다. 나 역시 CLUB H.O.T. 의 당당한 일원이었다.

      

지금 보다 더 연예인을 ‘파는’ 행위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이 지배적이던 시대였다. 오빠부대와 덕후 사이. 대체 어디에서 유래되었을까 싶은 빠순이라는 말이 우리의 이름이었다.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져라 노래를 듣고, 그들이 나온 티브이와 라디오 방송을 녹화하고 녹음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오빠들의 목소리를 듣고 스케줄을 확인하려 매일같이 음성사서함에 전화를 하고, 연주하지도 못할 오빠들 노래의 피아노 악보를 사고, 사진이 박힌 배지와 멤버의 이름이 박힌 이름표를 가방에 매달아 내가 누구 팬이라는 것을 광고하고, 위인전은 안 읽었어도 위대한 오빠들의 자서전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었다.

      

앨범이 발매되면 친구들과 함께 레코드 가게 앞에 길게 줄을 섰다. 앨범을 사면 오빠들의 포스터를 받을 수 있었다. 방 한쪽에 그것들을 빽빽이 붙여두고 매달 주니어, 파스텔, 토마토 등의 잡지를 각각 한 권씩 사 젝키와 클릭비 팬들과 사진을 서로 나눠 스크랩하는 것이 그 당시 1세대 아이돌 빠순이의 일상이었다. 그 당시 엄마 아빠의 가장 강력한 협박은 ‘그것 다 갖다 버린다.’였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인터넷이 익숙해지면서 나는 종일 엔티카에 접속했다. 얼굴도 모르지만 H.O.T.라는 하나의 공통 관심사로 묶여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같이 오빠들 얘기로 게시판을 달구었다.

      

교복을 입는 나이가 되었을 때 무엇보다 기뻤던 은 비로소 오프 뛸 수 있었다는 다. 레코드 가게 앞에 섰던 줄은 제일은행 앞으로 바뀌었다. 우비를 챙겨 언니, 친구들과 함께 콘서트에서 흰 풍선을 흔들며 ‘고미사영’을 외쳤고, 세기말 스타일의 3D 영화를 꾸역꾸역 챙겨봤으며, 기아체험 24시를 간다고 거짓말을 치고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며 한 멤버의 생일파티에 다녀온 것이 걸려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난 적도 있었다.

    

그들이 해체를 선언했을 때, 세상이 와장창 무너졌을 때, 고작 가수 갖다 그런다며 울고 있는 나를 보며 놀리는 남동생에게 나는 달려들었다.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뒹굴며 싸웠다.

      

고작? 고작? 나의 사랑을 비하하다니. 이건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정말 그랬다. 만일 동생이 내가 그 당시 최애 멤버의 이름을 조합해 만든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지금까지 쓸 줄 알았다면 고작이라는 소리를 입에 올렸을까.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좋아하는 색은 빨간색, 좋아하는 숫자는 7. 최애의 고유번호와 고유 숫자는 나의 기호(嗜好)가 되었다. 첫 번째 덕질, 오롯이 쏟아부은 내 첫사랑은 그렇게 내 안 깊숙이 침투해 흔적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요란했던 첫 번째 덕질이 너무 강렬해 더 이상의 덕질은 다시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덕후에게 탈덕은 없다고 했던가. 잊을만하면 다시금 찾아오는 애정의 대상은 내게 타고난 덕후의 운명을 피할 수 없음을 일깨워줬다.

      

동방에서 온 다섯 미소년 아카펠라돌과, 오후 두 시에 화끈한 음악을 하는 짐승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감각적인 칼군무로 무장한 군무돌에게 나는 언제나 제대로 공략당했다. 그때마다 애정으로 무장하곤 그들을 파고들었다. 그들은 내 일상이 되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서툴기만 했던 시절, 그들은 내가 치열하게 열정을 불사를 수 있던 대상이었고, 나는 그들의 음악을 통해 사랑과 이별, 위로와 치유 배웠으며,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공동의 영혼을 지닌 이들과의 단단히 묶인 연대를 확인했다. 그들의 존재는 당시 내 삶의 척수였던 셈이다. 곁다리가 아니라.

       

몇 번의 사랑이 그렇게 왔다 가고 나는 이십 대 중반이 되었다. 이젠 정말 끝이다. 더 이상 오빠들에게 빠지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생각대로 오빠에게 빠지진 않았다. 십 년이 지난 후 동갑내기에게 빠졌을 뿐이다. 토끼띠 동갑내기. 그가 잠자고 있던 내 휴덕을 깨우고야 만 것이다.




탈덕은 없다      

권태은 1st 팬미팅 현장. 무대와 객석이 이다지도 가깝다.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는 팬미팅에 참가했다. 마음속 한편으론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들의 말처럼 풋풋한 십 대와 이십 대 팬들 가운데 누가 봐도 내가 가장 고령자로 보이는 냉혹한 현실을 마주했을 땐 약간의 자괴감과 회의감이 밀려오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몇 분 뒤면 그를 직접 본다는 생각에 사정없이 뛰는 심장박동은 다른 생각을 모조리 잊게 했다. 설레고, 떨리고, 긴장되는 그 복잡한 감정을 누구와도 나누지 못하고 오롯이 혼자 감당하며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진짜 그’가 등장했다.

      

티브이 화면에서의 그가 아닌 내 앞에서 생생하게 움직이는 ‘진짜 그’. 손 내밀면 잡힐 것 같은 거리에서 진짜 그가 말을 하고, 손을 흔들고, 눈을 맞추고 있었다. 내 방에서 보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 우월함을 넘어서 비정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현실감 없는 실물 앞에서 나는 자꾸만 넋을 잃었다.

      

그는 두 시간을 꼬박 채워 알찬 이벤트로 팬들에게 보답했다. 바로 내 눈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애장품을 나누고 셀카를 찍어주는 초특급 팬서비스까지 행했다. 그간의 노동이 결코 무용한 것이 아니었구나. 나는 매 순간 감격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그는 우리를 위해 마지막 깜짝 선물까지 준비하고야 말았다. 바로 팬사인회.

      

생각지도 않았던 깜짝 사인회를 한다는 말에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 전에서 안정환이 골든골을 넣었을 때처럼 처음 본 옆 사람을 얼싸안고 환호를 내지르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가뜩이나 나이도 가장 많을 텐데, 자중하는 것이 옳았다. 흥분이 가라앉자 이번엔 다리가 제멋대로 덜덜 떨렸다.

      

생각보다 금세 내 차례가 다가왔다. 바로 앞에 앉아있는 그 내 얼굴의 1/2만 한 작은 얼굴과 한눈에 담기에도 힘든 길이의 팔다리를 지니고 있었다.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지금 이 순간을 눈에 담지 않으면 후회만 남을 것이란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정신을 챙겼다. 긴장을 숨기지 못해 염소 스타일의 짐승 목소리가 나오긴 했지만 나는 진짜 그와 몇 마디를 나누고, 사인을 받고, 피날레로 악수까지, 내게 주어진 모든 미션을 완료했다. 뒷사람의 도움으로 한 화면에 나와 그, 둘이 잡힌 샷도 건졌다.

     

나는 계 탄 덕후가 되었다.  




왜 나는 너를 덕질하는가   

    

황홀했던 판타지에서 나를 깨운 건 친구들을 포함한 주변인들의 쓴소리였다.

    

도대체 덕질이 의미가 있냐고, 인생에 하등 도움이 되냐고, 돈이 나오냐, 밥 먹여주냐, 무슨 쓸데가 있냐는 그 익숙한 핀잔에 나는 그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직찍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나 덕질의 세계를 함께 통과해온 그들이 진심으로 내뱉은 조언이, 단순히 조롱과 비웃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그들이 우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리 없었다. 사실 나 역시 열렬히 타오를수록 마음속 한 편에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을 애써 외면하며 지그시 눌러 숨겨뒀던 것이다.  

    

대가성을 따지는 본전심리나, 효용성과 같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었다.

     

늘 겪어왔으므로 잘 알고 있다.

      

그는 내가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그의 존재 자체가 아닌 나의 욕망을 대신 투사한 환상의 존재를 사랑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이 감정은 한낱 허구의 환상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으며, 환상은 오랜 시간 유지되기 힘들다는 것을.

     

덕질의 역사가 길었던 만큼이나 나는 종종 무너진 환상에 맞닥뜨리곤 했다. 감정을 쏟았던 만큼 나는 싸늘하게 돌아섰다. 그러고 나면 물밀 듯 밀려오는 허무한 감정과 함께 내가 애정을 품었던 그 존재와 시간은 대체 무엇이었는지 혼란스러웠다. 누구를 탓하랴. 그저 거대한 환상을 억지로 씌웠던 나를 책망할 수밖에.

    

그러나 우습게도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나는 되풀이했다. 다시금 애정을 품고, 몰입하며, 감정을 쏟는 행위를 반복해왔던 것이다.

      

나는 왜 덕질을, 누군가에게는 무용해 보이는 이 사랑을 반복할까.

     

인생의 2/3을 덕후로 지낸 사람으로서 감히 말하건대, 그럼에도 덕질은 결코 헛되지 않다.


그 대상이 환상 속에 그대라 한들, 여전히 그것은 내게 있어 온전한 애정을 베풀며 느끼는 행복이요, 함께 공유하는 이들과의 끈끈한 유대감이요, 치열하고 아름다웠던 나의 호시절을 떠올리게 해주는 교감이요, 메마르고 건조한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에너지원이니까.


십 대의 덕후는 자라서 삼십 대의 덕후가 되었다. 과거의 덕질이 성장의 자양분이 되어 나도 다행히 얼마간 변화했다.


아이디와 비밀번호, 그리고 허탈함만을 남긴 줄로만 알았던 구 최애는 내게 현실과 환상의 모호한 경계를 구분하며 조절할 수 있는 힘도 함께 주고 떠났다는 것을 나는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화려하게 핀 우상에게서 행복을 찾던 내가 이젠 피어나는 성장의 과정을 함께하는 데에서 기쁨을 찾는다.

     

지금껏 변하지 않은 것은 이것이다. 이십 년 전의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영영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에서 강렬한 삶의 열정을 발견한다는 것.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계탄 덕후

#권태은 #덕질

홍마담쌀롱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hannel/UCMVI-WRQYPQFToxaq4Nn04A

인스타그램: @hong_ma_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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