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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마담 Aug 23. 2019

삼십 대, 그 미묘함에 대하여 #25 - 스포트라이트

주연의 자리를 내려놓는다는 것

나도 그저 평범한 삼십 대의 여성일 뿐이구나, 라는 섬뜩한 깨달음이 전기가 오르듯 온 몸을 찌릿하게 관통하는 느낌을 아는가. 도저히 막지 못하는 노화 현상과 신체적 능력의 퇴화를 자각하는 순간도 그렇지만 가장 섬뜩한 상황은 한물 간 배우의 그것처럼 주연의 역할이 점차 사그라진다고 느껴지는 순간.


그 서늘한 사실이 온몸의 세포들을 구석구석 자극하고 지나가고 나면 그때부턴 냉장고 야채 칸에 방치돼 수분이 쪽 빠진, 빼빼하게 말라있는 사과를 발견했을 때만큼 적당히 울적한 기분에 사로잡히고야 만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우리 모두는 주인공이다’는 말은 너무 당연해서 멋없다. 따지고 보면 로또 당첨확률쯤이야 가뿐하게 밟아버리는, 정자와 난자의 접촉에서부터 무려 수 억분의 일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최종 승자가 되어 세상에 태어난 게 나 자신인데 장르의 결정은 차치하고라도 당연히 주인공 대접은 받는 게 마땅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세상이 어디 그리 만만하고 호락호락하랴. 문제는 이 사회에 주연과 조연, 단역과 엑스트라가 딱딱 나뉘어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데 있다.


내가 어떤 배역을 맡았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 주연과 조연은 스포트라이트와 얼마나 밀접한지에 따라 갈린다. 관심과 주목. 그것은 주연이기에 자연스레 누릴 수 있는 남다른 메리트인 것이다. 주연에게 주어지는 아주 달콤한 특권, 쏟아지는 관심과 타인의 인정을 굳이 마다할 까닭은 없다. 사회적 존재로 태어난 이상 주변인들의 관심과 인정이야말로 때론 존재의 이유가 될 만큼이나 중대한 일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지금 내 앞에 놓인 문제는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삼십 년 간 나름대로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주인공인 듯 살아왔는데 어느 순간 조연으로 강등당해 버렸음을 알았다면? (그렇다. 이 상황은 강등이라고밖에 딱히 표현할 길이 없다.) 새롭게 개편된 작품에서 주인공의 직장 상사라는 배역이 주어져 있었다면? 이것이야 말로 홍주연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수모가 아닐 수 없다.


지극히 잘나지도 않았지만 못났다고는 할 수 없는 중간 즈음에 걸친 스펙, 남들의 입에 매일같이 오르내리지는 못했어도 ‘걔가 너 괜찮대.’라는 말은 아주 드물지 않게 들어본 외모. 청춘의 ‘찬람함’을 마음껏 만끽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나름 청춘이 주는 메리트를 느껴왔다고 표현할 수 있는 딱 그 정도.


그러나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른다는 옛 노랫말처럼 나를 둘러싼 주변이 어느 순간 어둑어둑해져 버렸음을 인식하게 되고야 말았을 때 아, 설마 그때가 스포트라이트 타임이었어? 하고는 그제야 이슥하게 깊어지는 어둠 안에서 번뜩 정신을 차리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이를테면 요사이 이 무대의 주인공의 자리를 꿰찬 것이 내가 아닌 타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집중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자가 옆 팀 J라는 것을 눈치챘을 때, 관객들의 시선이 온통 그녀를 향해 쏠려있음을 알았을 때, 그리고 그것이 멀지 않은 지난 과거의 한 토막엔 나도 얼마간 맛보았던 것이었다는 씁쓸한 사실을 생각하면 그렇다.  




J.


최근 남 사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이십 대 중반의 만 1년 차 사원. 검고 풍성한 모발, 투명하고 깨끗한 피부와 같은 눈부신 외모는 물론이고 나긋나긋하고 청량한 목소리를 가능케 해주는 짱짱한 성대에 삶의 찌듦이 전혀 내려앉지 않은 맑은 분위기, 게다가 사람을 끄는 매력을 기본 옵션으로 장착하고 태어난 것 같은 적당한 애교와 상냥함은 또 어떤가.


아, 이 찬란한 젊음의 광채여. 어쨌든 ‘싱그러운 젊음’이라는 조건의 포인트는 모조리 다 갖춘 그녀는 주연의 타이틀을 거머쥔, 강력한 스포트라이트를 쐬고 있는 현재 우리 회사 최고의 ‘가십걸’이다.

      

그녀가 인기를 몰고 다니는 화제의 인물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안 그래도 나 역시 듣는 이들에게 대리 수치심을 제공할 만한 민망하고 낯 뜨거운 ‘너 말고 니 후배’ 에피소드(https://brunch.co.kr/@meaningmaker/9)를 생성하지 않았던가. 내게 호감을 갖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옆 팀 박 대리를 우연히 출근길에 만나 함께 걷던 도중 박 대리가 마음에 두고 있었던 자가 놀랍게도 내가 아닌 바로 J였다는 것을 알게 된 사건, 옆에 서있는 내 표정이야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오직 자신과 J의 ‘열애 루머’에 대해 옅은 흥분이 섞인 목소리로 은근히, 그러나 누가 봐도 신난 듯 자랑을 해대던 바로 그 사건 말이다.

    

그러나 잠시 착각의 늪에 빠졌던 것이 조금 민망하기야 해도 그쯤이야 별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기껏 남자들에게 받는 인기쯤이야 뭐가 그리 부럽다고. 꼭 좋은 일만도 아니잖아. 괜히 뒷말만 나오고 피곤하기만 하지. 나라고 안 겪어봤나. 그 고충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나는 어쩌면 애써 별 관심 없는 척, 쿨한 척 자위하며 부인해왔는지도 모른다. 그녀를 향해 꿈틀대는 내면의 관심, 예사롭지 않은 복잡한 심정, 부러움과 질투가 뒤섞인 못난 감정을.      


지난주 정년퇴직을 앞둔 한 상사의 퇴직기념 송별 회식자리가 있기 전까지.  




그 회식자리로 말할 것 같으면, 겉으로 보이는 메인 테마는 떠나는 이와의 이별을 슬퍼하고 그간의 노고에 존경을 표하며 축복을 빌어주는 자리로 충분히 제 역할을 다하는 것 같아 보지만 그 안에 숨겨진 놀랄만한 스페셜 테마가 있었으니. 그것은 J에게 쏟아진 스포트라이트가 얼마나 강한지, 그녀가 얼마나 화제의 중심에 놓여있는지, 그녀에게 쏠린 막대한 관심을 명명백백히 증명해주는 자리로써 나는 회식자리 내내 은밀히 진행되는 분주한 물밑 작업의 몇몇 장면들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그 장면들은 다음과 같다.

      

자리 사수 대작전. 

J의 옆자리, 적어도 같은 테이블을 사수하려는 이 나름 본인들에겐 비밀스러운 전략이었는지 몰라도 수가 빤히 보이는 그 투명함이란. 먼저 회식 장소에 도착했음에도 J가 도착할 때까지 입장을 미루다가 그녀가 도착한 순간 우연히 시간대가 맞았다는 듯, 함께 슬그머니 들어와 자연스럽게 옆자리를 사수한다. 운 없게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 자리가 무르익고 나면 잔을 들고 옮겨 다니며 건배를 외치다가 자연스럽게 J의 테이블에 다가와서는 장시간 머무른다.


은근히 그녀 위주로 돌아가는 대화.

어떤 얘기를 해도 대화 주제는 부메랑처럼 자꾸만 그녀에게로 돌아온다. “와-, 주연 씨가 벌써 서른셋이야, J 씨가 그럼 몇 살이지?” 다 알면서 괜히 나를 이용해 그녀와 본인 사이의 친목 매개체로 쓰기, 그녀와의 억지 공감대 형성하기, 그녀의 별 말도 안 되는 것 칭찬하기 등 하다못해 그녀가 소맥 한잔을 원샷하는 모습마저 ‘올’ 소리가 나올 만큼 매력적이며 감탄의 이유가 되나 보다. 그녀와 접점을 찾고자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

      

그녀의 존재와 회식의 생명력과의 관계.

에너지가 넘쳐 그리도 신명 날 수 없었던 그 회식자리는 그러나 그녀가 자리를 뜬 후 바람 빠진 풍선처럼 급격히 생명력을 잃었다. 나 참, 훤히 들여다보이는 남자들의 젊은 여자에 대한 관심이 이리도 우습다.

      

[남자들은 다들 왜그러냐ㅋ 예전에 나한테 찝쩍댔던애알지ㅋㅋ 걔도 그여자랑 얘기할라고 아주 그냥 꼴값을꼴값을 ㅋㅋ]


[몰그렇게 디테일하게봄?ㅋㅋ니가 그여자 질투하는거 아님?]


[아웃기지마 내가왜]     


[아 그럼 신경꺼 니가 몬상관이야 왜 그런걸 신경쓰냨ㅋ]


인기 있는 어린 여자를 질투하는 못난 삼십 대 여성이라. 어쩐지 낯익고 진부한, 매우 악의적인 프레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진부한 만큼이나 그 이미지란 벌써 널리 알려져 기정사실화 되어있어 특별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둔갑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저 여의 환심을 사려는 남자들의 유치한 행동들에 대한 입담을 주고받을 파트너가 필요했을 뿐인데 ‘왜 그런 걸 신경 쓰고 그러냐.’는 K의 카톡에 숨겨진 ‘추접한 건 그들이 아닌 바로 너!’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듯 해 순간적으로 욱하고야 말았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내가 왜, 대체 뭣 때문에, 야, 진짜 질투 그딴 거 아니거든? 뱉어내지 못한 말들이 가슴속에서 서로 부딪히며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왜 이렇게 골이 난 걸까. 

속도를 늦추지 않고 여전히 팔딱팔딱 뛰고 있는 심장박동과 머리끝까지 거꾸로 솟은 피가 나를 결백하지 않은 마음과 마주하게 하고 있었다.

 

최고 인기인답게 J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들을 접할 기회는 역시 많았다. ‘회식 자리에 끝까지 남아있었고 게다가 팀장의 옆 자리를 꿋꿋이 지켰다’, ‘자기를 좋아하는 것 같은 사람에게 선을 긋지 않고 인기를 즐긴다.’, ‘회사에서만 썸을 몇 번을 탔는지 모른다.’는 확인되지 않은 가십에 나는 동조의 침묵을, ‘노력에 비해 과한 호사를 누린다.’, ‘인기를 이용해 업무 실수도 얼렁뚱땅 넘어가면 되는 줄 안다.’는 지나친 사적 감정이 포함된 평가에 나는 과한 고개 끄덕임을 아끼지 않았다.

 

‘여우’라는 단어만큼이나 이 모든 것을 적당히 아우르기 좋은 말이 또 있던가. 은근한 디스에 적당한 그 마법의 문장, “걔 불여시 같아.” 그 말이 다른 이의 입에서 나올 때 사실 나는 통쾌함과 함께 희열에 가까운 기분까지 느껴본 적이 있음 고백한다. 게다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감정을 철저히 은폐한 채 기어코 뾰족한 한 마디를 덧붙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걔 조심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이것을 어찌 시기심과 질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솔직해지자. 나는 그녀가 인기를 독차지하는 것이 싫었고, 그녀가 감히 주연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건 마치 내 권리를 침해당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고백하건대 실제로 J가 겪는 그 이벤트들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과거에 내가 겪었던 일들과 별반 다를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나와 그녀를 나란히 두고 인기투표를 한다고 하면 누구나 조금의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한 표씩 행사할지 몰라도 딱 칠 년 전, 아니 오 년 전의 나라도 소환해 온다면 상황이 바뀔지도 모른다. 지디의 말마따나 나도 어디서 결코 꿀리지(?) 않았던 것이다. 내게 대시하는 남 사원들도 드물다고 할 수는 없었고, 나 스스로 의도했다거나 이용한 건 결단코 아니었지만 비교적 쉽게 업무적 도움이 주어지기도 했으며 노력에 비해 괜찮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물론 과한 관심과 부풀려진 구설수, 미묘한 신경전에 괴로울 때도 있었지만 그것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적당히 참을 만한 고통이었던 까닭은 어찌 됐든 내가 누릴 수 있던 젊음이 안겨준 특권 때문이었다. 그러니 J가 누리고 있는 ‘그 호사’를 나라고 누려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실 젊은 여자에게 유독 가혹하고 부당한 사회의 시선 그 맞은편에는 젊은 여자이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여러 특별대우와 이익이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 존재한다. 여자에게 씌워진 교묘한 나이 프레임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나 역시 나보다 젊은 여자인 J를 시기해온 까닭은 이 사회의 무기로 통하는 재력, 그리고 사회적 지위와 달리 젊음이 나와 같은 보통의 사람 역시 당연한 듯 지닐 수 있었던 강력한, 그러나 유일한 무기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의식하고 있지 않은 순간에 그 호사를 당연시 생각해왔는지 모른다. J가 아니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특별대우가 주어지는 지정석에 앉은 여자라면 그녀가 누구라도 시기했을지 모른다. 흘러가버리고 있는 젊음과 그것이 내게 안겨주었던 특권을 여전히 욕망하면서.

      



야속하다. 왜 욕망은 좀처럼 나이 들지 않고, 늘어가는 나이는 욕망을 채워주지 못하는 걸까.      


서글프게도 아무리 야속하다고 한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정직하게 흐르고, 젊음을 놓치지 않으려 아무리 꼭 쥐고 있어 봐야 그것은 기어코 손아귀를 빠져나가고 만다. 하지만 나이 듦이라는 인간의 숙명을 거부한 채 아등바등 젊음의 특권을 쥐고 놓지 않으려 하는 모습은 또 어떤가.


가끔 추억 속에 빠져 사는 것처럼 보이는 왕년 스타들의 모습을 보곤 한다.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시든 젊음보다도 젊음이 지나간 자리에 묵직하게 비현실적인 욕망을 쌓아두고 있는 것이 더욱 초라하고 보잘것없어 보인다. 여전히 인기에 집착하는, 왠지 딱해 보이기까지 하는 ‘나의 옛날 오빠’에게 이런 댓글을 달고 싶은 마음을 간직해온 이가 비단 나뿐일까. ‘언제까지 영원한 오빠인 것처럼 굴 셈이에요? 제발 철 좀 드세요! 추해요! 오빠 사십 대예요, 사십 대라구요!!’

     

그 애통한 외침이 벌써 내게 메아리로 되돌아올 줄 어찌 알았겠는가.      


그러고 보면 연예인의 삶은 우리네 삶의 과장된 축소판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좋아했던 나의 오빠’가 지금 앨범을 낸다고 해도 더 이상 최고 인기의 척도인 가요 프로그램의 ‘엔딩 무대’에 설 순 없고, 어렸을 적 나의 우상이었던 빳빳하게 코팅된 책받침 속 여배우는 더 이상 가슴 뛰는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나이 듦을 부정하고 젊음에 집착해 봐야 속절없이 다가오는 세월의 흐름을 역행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도 다행히 얼마간 위안이 되는 것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연예인에게도,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도, 시간의 흐름이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사실이 아닐까.

    

아무리 날고 기는 배우라 해도 평생 동안 스포트라이트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미스코리아 대회에 두 번 출전하는 진(眞) 없다. 나의 시대가 끝났음을 인정하고 속마음이야 어떻든 고상한 미소를 짓고 다음 주자에게 왕관을 건네준다. 눈부시던 주연의 자리를 우아하게 비켜준다.


쉽진 않겠지만 J에 대한 시기심을 거두기로 했다. 스포트라이트를 우아하게 넘기기로 했다. 언젠가는 그녀도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서 벗어나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겨주는 인생의 공평한 진리를 마주하게 겠지.


화려하게 주목받는 자리의 주인은 바뀌어도 인생이라는 무대는 계속된다. 많은 배우들 거장이라는 이름 아래 전히 존경과 찬사를  이유는 그들이 그토록 빛났던 젊음의 주인공 역에서 벗어났음에도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묵묵히, 그리고 최선을 다해 제 역할을 다하며 긴 세월 동안 단련해온 내공을 보이기 때문일 테다.


문득  역시 스포트라이트에서 벗어나면서 어쩌면 관객의 시선에서 벗어나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는 배역을 맡게 된 것이 아, 하는 생각이 든다. 욕망을 내려놓고 상실을 수용하고, 특권에의 미련을 접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내게 주어진 중요한 역할지 않을까.


그리곤 모든 것은 바래져간다는 자연의 순리,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진실. 그것을 담담히 감당하며 나 역시 빛났던 도톰한 한 토막의 시절이 있었음을 추억하는 정도, 딱 그 정도라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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