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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마담 Jul 05. 2019

삼십 대, 그 미묘함에 대하여 #24 - 자기 계발

그것이 불안의 세계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팝콘 먹을 사람”, 영어로?


최근 K는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6개월짜리 요가도 함께 끊었다. 주 52시간 근무가 선사한 여유의 시간 덕이었다. 요가에 어학수업까지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니냐며, 대체 남자는 언제 만나려고 하냐며 얼마간의 애정과 걱정을 담아 장문의 톡을 보낸 내게 되돌아온 그녀의 답은 의외로 간결했다.      


[니나 작작해]      


나 역시 지난주부터 주 3회 하던 운동을 5회로 늘렸다.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마다 침대에 멍하니 누워 시답잖은 유튜브 영상이나 보며 ‘버리는’ 시간이 아까웠다. 그 시간에 스쿼시를 해볼까, 헬스를 해볼까 고민을 하다 하나를 집중적으로 파보자, 라는 생각에 무려 수영 주 5 일반에 등록해버리고야 만 것이다.      


요 근래 나의 놀랄만한 부지런함의 근거는 이뿐만이 아니다. 한 시간 동안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하는 출근길 시간에 짬을 내어 유튜브에 올라오는 여러 분야의 명사가 들려주는 강연을 보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 짧은 한 토막의 책 리뷰를 SNS에 올려 보기도 한다. 내 안의 뿌듯한 감정이 무럭무럭 자란다. 내친김에 주말 독서모임을 검색해 본다. 조금 빠듯하긴 해도  1회 정도의 모임이라면 문제없이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효율적 시간관리와 자기 계발에 힘쓰는 서른셋의 한 여성에 대해 평가해본다.     

 

이 정도면 꽤 열심히 살고 있는 편이잖아?       


바야흐로 자기 계발의 시대이다.      


서점 입구의 좋은 자리를 당당히 차지해 차곡차곡 쌓여있는 자기 계발 서적들, 매일같이 접하는 인터넷 기사 속 열심히 노오력한 자들의 성공신화들, 지하철 모든 칸마다 볼 수 있는 성인교육을 위한 수많은 광고들을 보고 있으면 자기 계발이 현대사회의 견고한 흐름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인스타그램 속 타인의 삶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기 계발의 삶은 이미 범인들의 일상에도 빠르게 침투해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만 같다. 이미 내 주변에서도 그 견고한 흐름을 따르고 있는 현대인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대학원 입학에서부터 각종 세미나 콘퍼런스 참석, 온갖 수료증과 자격증 취득에 운동까지. 유튜브 채널을 오픈하거나 책을 출간한 이들도 심심찮게 찾을 수 있다. 요새엔 바쁘게 살지 않는 사람을 찾는 일이 더 어렵게 느껴진다. 콘서트나 여행 등 여가생활마저 최선을 다해 즐긴다고 알리며 인스타를 보기 좋게 꾸미는 일도 따지고 보면 얼마나 부지런한 자기 계발이란 말인가.       


운동에, 여가에, 취미생활까지. 하루하루를 낭비하지 않고 꽤 열심히 보내고 있는 나 역시 결코 잉여인간이 아니다. 사회의 엘리트로서 자라진 못했어도 나름대로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능동형 인간인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저녁이 있는 삶을 선물 받은 우리들의 삶은 전보다 훨씬 더 바빠져 버렸지만 나는 바쁘게 일상을 보내는 이러한 시간 속에서 비로소 안정감에 젖어들곤 했다.  

     

자기 계발은 요 근래 내게 있어 좀처럼 의문을 갖지 못할, 나의 인간으로서의 존재의 유의미함을 증명하는 행위처럼 여겨지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이었던 ‘그것’에 대한 의문은 아주 사소한 장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2호선 열차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출근길에 하루도 빠짐없이 마주치던, 그러나 매번 무심히 지나치던 스크린도어 광고가 오늘따라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TV 프로그램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한 외국인 방송인이 하는 영어 학습 광고였다.

      

“팝콘 먹을 사람?” 영어로?  

Popcorn ______?  

    

어라, 분명 간단해 보이는 문제인데 도통 답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우쥬 라이크로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 두유 원투 잇, 이렇게 해야 되지 않나? 아니다. 먹을 사람을 뭐라고 해야 되지?     


두뇌 풀가동. 힘겹게 머리를 굴려보는 사이 열차가 금세 도착해버렸다. 반대편 문 쪽에 기대 누가 볼 세라 조심스레 ‘팝콘 먹을 사람’을 검색해보았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많았는지 답은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었다.

     

‘anyone’이라는 아주 심플한 한 단어였다.      

  

입가에 싱거운 웃음이 살짝 이는가 싶더니 이내 묘한 당혹감이 엄습했다. 지금 당장 필요한 중요한 일도 아니었고, 몰랐던 것을 배웠으니 이제 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왠지 모를 당혹감이 자꾸만 스멀스멀 피어나는 것 같았다.

      

수영이 아니라 영어회화를 등록했어야 했나. 우습게도 답을 맞히지 못한 내게 이것은 나를 [어학]이라는 또 하나의 자기 계발의 세계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이 광고 마케팅은 성공적이다. 물론 영어를 잘해야 하는 직업도, 공인 점수가 필요한 것도 아니지만 한 번 배워보는 편도 나쁘지 않을지 몰라. 손가락으로 검색 내용을 기계적으로 밀어내며 가격과 수업 내용을 살펴보다 나는 이내 손가락의 움직임을 멈췄다.

      

이게 진짜 내가 배우고 싶은 게 맞나.      


anyone이 불러낸 기묘한 당혹감의 원인이 여기에 있었다.

 

나는 그저 불안했고, 어떻게든 그것에서 헤어 나오고 싶었던 것이다.      


서른이 넘으면 안정감이 생기고 여유로워진다는 말은 대체 누가 했던가. 보통의 현대인에게 삼십 대는 결단코 여유 있을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내가 지나고 있는 삼십 대는 이십 대 때와는 확연히 다른, 인생의 주요 과업의 부담에 짓눌린,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팽배한 시기였다.

       

운동에 매진하고, 이것저것 배우며, 여가 생활마저 열심히 즐기는 능동형 인간의 삶 이면에는 자주 초조함과 조바심이라는 폭풍 같이 밀려오는 감정에 매몰돼 허우적대는 내가 있었다.    

   

불안의 세계에서 어쩌면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지푸라기를 잡은 채 나는 자기 계발의 세계로 나 자신을 떠밀곤 했다. 거기에서 파생된 결핍감은 그것을 더욱 재촉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닌데도,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데도 자꾸만 나의 부족함만을 떠올리곤 모호한 목표를 세운 채 그저 노력해왔던 것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는 시간은 ‘버리는’ 시간으로, 아무 일 하지 않는 자는 마치 ‘잉여인간’이 된 것처럼 여기게 되는 시대의 은밀한 기류가 나를 압박했다. 나는 거대한 기류에 압도되었다. 안정감을 위해 나는 여유로움을 즐기기보다 자기 계발이라는 이름의 ‘막연한 노력’을 하는 행위를 선택했다. 그것은 한시적으로 불안감에서 해방된 느낌을 가져다주곤 했던 것이다.

      

어느 날, 연차까지 사용해 금, 토, 일 연속으로 3일 동안 진행되는 유명 강연회에 참여한 내게 W는 말했었다.

      

[야 적당히 좀 해, 그것도 중독이야.]   

  

맞다. 어쩌면 이것은 하나의 중독이다.

      

알코올, 도박, 게임 중독만이 문제가 아니다. 내면의 두려움에서 도피하기 위한 수단을 중독이라 한다면 불안감과 우울함을 노력의 행위로 채우려 하는 것도 중독이다. 성장 중독, 학습 중독, 노력 중독, 그리고 자기 계발 중독.      


현재의 삶에 안주하지 말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오력하라. 더 많이 배우고 학습과 자기 계발을 소비하라. 불안의 세계에서 사회는 잘만 하면 벗어날 수 있을 거라며 깊숙한 곳에서의 욕망을 끄집어내곤 성장을 위한 온갖 것들을 눈앞에서 흔들어대곤 했다. 나는 쉽게 현혹되었다.

     

안정되지 않은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을 늘 껴안고 살아왔기 때문일까. 두려움은 언젠가부터 자연스레 내면화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나 자신을 계속해서 닦달하는 것은 현대사회에서의 변질된 생존 방식일지도 몰랐다. 모든 것에 쓸모를 따지는 사회에서 나라는 인간의 쓸모를 찾고 경쟁력과 상품성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한 행위. 희망 없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어떻게 된 일일까.

     

냉정하고 불안한 세계에서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지닌 채 나는 자기 계발이 대단한 무기라도 되는 양 그것을 꽉 움켜쥐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 불안해져 갔고, 그 불안감은 아이러니하게도 다시금 자기 계발의 동력으로 작동하며 만족 없는 노력, 완결 없는 레이스를 끝없이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anyone’이 불러온 당혹감은 그 속에서 내가 얼마나 열심히, 주체적으로 쳇바퀴를 굴리며 다람쥐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 기묘한 현실을 깨닫게 해주고 있었다.

      



잠들기 전 습관처럼 유튜브 버튼을 누르자, 15초짜리 독서모임 서비스 광고가 재생된다. 세상을 조금 더 지적으로! 이완되었던 몸이 다시금 긴장된다. 내게 당혹감을 안겨주었던 ‘팝콘 먹을 사람?’이 생각난다. 거대하게 몸집을 이룬 자기 계발서 앞에서의 설명할 수 없었던 무력감이 떠오른다.

      

온 사회가 노력하고 발전해야만, 그래야만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최면을 걸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불 것이라며 겁을 주고 있다. 눈길이 닿는 모든 곳을 점령하다시피 한 자기 계발 광고들이 자신들 해결자처하며 나를 결여된 존재라고 세뇌시키고 있는 것만 같다.

      

더 많이 노력하면 불안함을 제거할 수 있을까.

자기 계발이 불안의 세계에서 나를 구원해 줄 수 있을까.

      

그러나 그 모든 것들 뒤에는 결국 무엇이 남을까. 그것은 단지 쓸모를 따져보기 위한 자기 위로일 뿐이거나, 쓸모없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끝없는 소모전에 불과할 것이다.

     

평생을 학생인 듯 살아온 내가 행복해지는 법을 스스로 찾아내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명확한 건 불안의 세계에서 나를 구원하는 것은 결코 끝없이 반복되는 자기 계발만큼은 아닐 것이라는 것.

     

핸드폰 화면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니 오늘따라 책장이 그 단단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주 52시간 근무가 확정되고 나서 혹시 쓸모가 있을까 싶어 사두었던 자격증 독학 책들이 무거운 기운을 내뿜으며 책꽂이 한 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저걸 몇 페이지나 봤더라, 슬슬 다시 죄책감이 피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워라밸, 따지고 보면 그것 역시 인간다운 삶을 위한 개념이 아니었던가.

     

‘작작하라’는 K의 말마따나 때로는 ‘적당히’ 하는 것이 옳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금세 피로감이 몰려왔다. 소진되어 있었던 사실조차 외면하고 있던 걸까. 내일은 수영을 가지 말아야지. 내 몸이 당장 필요로 하는 것은 ‘잉여로움’ 인지도 몰랐다.

     

물론 한순간에 바뀔 리 없고 금세 불안감에 항복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능동형 인간 따위 당분간 집어던져버린다 하더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조급하게 성장에 몰두했던 때에도 어떤 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았듯, 그러지 않아도 극적인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 anyone을 몰라도, 명사의 강연을 찾아보지 않아도, 운동을 며칠 쉰다고 하더라도, 사실 그 어떤 두려운 일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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