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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마담 May 15. 2019

삼십 대, 그 미묘함에 대하여 #23 - W의 비밀

타인의 내밀한 비밀에 무뎌지기

옆 팀 이 팀장이 그의 핸드폰에 이형주로 저장되어 있는 우리 회사 인턴 이영주 씨와 주말을 이용해 펜션에 다녀왔다. 나와 W의 중학교 동창 A는 최근 별거를 시작했다. 전 남자 친구와의 동거 경험이 결혼 후에 문제가 된 모양이었다. 그녀는 불광동 신혼집에서 나와 충북 제천의 부모님 집에 머물러 있다고 했다. 나와 한 때 매우 가까운 사이였던 P가 스포츠토토로 약 1억 가량을 까먹은 것을, 그리고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여전히 토토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을 아직 그의 부모님은 알지 못한다.      


최근 한 달간 은밀하게 전해 들은 비밀 이야기들이다. ‘너만 알고 있어라.’로 시작되는 이 내밀한 이야기들을 전하는 이들은 10 정도는 분명 안쓰러운 감정을 담아 이야기하는 한편, 90 정도는 이 비밀을 권태롭고 밋밋한 루틴이 반복되는 일상에 꽤 짜릿한 감정을 일깨워주는 이벤트쯤으로 여기는 것 같은 인상을 숨기지 못한다.      


게다가 그 내밀한 이야기들은 비밀의 주인공이 ‘여태껏 얼마나 매끈한 모습을 보여 왔었나.’의 정도에 따라 더욱 흥미로운 사건이 된다.


그리하여 누구보다 젠틀한 중년 남성의 스탠더드처럼 보였던 이 팀장의 불륜이라는 비밀 이야기가 그의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공공연한 비밀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순간, 누구보다 여유롭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것처럼 보였던 P의 어리석음과 우둔함을 날카롭게 포착하게 되는 순간, 깔끔한 가면에 가려져있던 그들의 민낯과 추악한 욕망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의 입을 통하고 통하여 최애 안주보다도 훨씬 더 맛있는 술자리 안주거리가 되거나, 혹은 이야기를 공유하는 집단의 견고함을 유지하기 위한 한낱 장치 따위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자랑은 아니지만 사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군가의 가면을 기어코 벗겨내고 그간 가려진 흠집과 불완전한 민낯을, 마치 심판원의 자격이라도 얻은 냥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예민하게 파고드는 행위 내게 있어 작은 죄책감을 수반할지언 그저 가볍고 진지하지 않은 놀이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랬었다.      


요 근래 남자 친구와 상견례며, 웨딩홀이며, 뭐며 결혼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W의 입에서 은밀한 비밀 이야기가 삐져나오기 전까진.     




 두병 가까이 마셨을 때였을까. 오늘따라 미묘하게 심드렁한 태도에 자작을 고집하며 연거푸 술잔을 들이켜던 W의 입에서 갑작스러운 첫 번째 비밀 이야기가 삐져나온 것은.      


-람 폈-대.”      


꼬불꼬불하게 삐져나오는 그 문장엔 주어가 빠져 있었다.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잠깐 동안 생각해야만 했다. 전달형으로 말하는 것으로 봐서 W 본인의 이야기는 아니다. 취기가 오를 대로 오른 후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봐선 친구나 지인의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남자 친구. 이것은 W와 결혼을 앞두고 있는 W의 남자 친구의 일임이 분명했다.   

     

대답을 하는 대신 비어있는 내 술잔에 술을 따르며 곰곰이 W의 남자 친구를 떠올려보았다. W와 2년 동안 사귄 사이였다. 서글서글한 미소를 띤 채 W와 다정히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내가 가장 자주 보았던 장면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부드럽고 너그러웠으며 건실했다. 기념일을 챙기는 것에 적극적이었고, 연락을 잊는 법이 없었으며, 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질 때면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W를 데리러 올 정도로 연애에 충실한 스타일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삼십 대에 보기 드문 사랑꾼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이다.        


근데 대체 왜? 나름대로 사람 보는 눈은 있다고 자부했는데, 다른 건 몰라도 W의 남자 친구가 그런 문제로 속 썩일지는 몰랐는데. 역시 사람은 겪어보기 전까진, 아니, 한참을 겪어봐도 모른다.      


어쩌다 한 번의 실수였을까, 권태로움에 지쳐 잠시 한 눈을 판 걸까. 아니, 이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쨌거나 그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 친구와의 암묵적인 관계의 법칙을 어긴 것이다. 그러나 결혼을 앞두었다는 특이점을 제외하면 이것이 그 정도로 큰일인가? 내 기준에서 보자면 엄청나게 충격적인 일까지는 아다. 최근 한 달 동안 들은 바람 이야기만 벌써 두 건이 넘었다. 게다가 당사자는 W였다. 우리 중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W.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W의 성격을 미루어 보건대, 술에서 깨고 나면 내일이나 늦어도 모레쯤, 아마도 W는 친구들에게 단호하게 결혼을 다시 생각해보겠다는 말을 할 거다. 주변 사람들 중 가장 똑 부러지고, 자존심 세고, 남다른 결단력을 지녔으니까. 내가 아는 그녀는 항상 그래 왔고 나는 그냥 그녀의 선택을 묵묵히 지지해주면 될 테다.    

  

별 일 아니다. 바람은 흔한 문제고, 서른셋이 감당하기에 세상이 무너질 정도로 무거운 것도 아니다. 잠깐 웅크려 있던 이성이 고개를 들면 자연스레 해결될 일이다. 몇 년, 아니 몇 개월만 지나 생각해보면 가슴을 쓸어내리며 큰일 날 뻔했다고, 어쩌면 술안주 삼아 웃으며 넘길 수도 있을 만한 일인 것이다.      


임신했다.”     


내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갑작스러운 두 번째 비밀 이야기였다. 빨간 얼굴, 충혈된 눈을 살짝 뜨고 아까보단 비교적 또렷한 말로, W가 말했다.      


임신?”      


이거 완전 또라이 아니야? 남자 친구가 바람을 피웠다는데 임신했다고? 아니, 그보다 지금 술 처마시면서 한다는 소리가 임신이라고? 할 말은 넘쳐나는데 말문이 막혀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W에게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어쨌든, 이젠 더 이상 가볍게 여길 만한 문제가 아니다. 최대한 빨리 결정을 내리고 실행에 옮겨야만 하는 것이다.      


W는 당연히 그와의 만남을 정리할 테고, 그렇다면 빠른 시간 안에 수술이 가능한 병원을 알아보는 것이 옳은 선택일 것이다. 병원엔 그녀의 남자 친구 대신 내가 동행하면 되고, 오늘 내가 들었던 말은 없었던 셈 치면 된다. 우리에겐 깨끗이 씻겨나가기 힘든 감정의 덩어리가 묵직하게 남게 되겠지만 그 선택이 아니라면 별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는 나이가 아니던가. 그래, 쉽진 않겠지만 미칠 듯이 어려운 일도 아니다. 생각대로 실행에 옮기기만 하면 되는 거다.      


아니, 그 여자가.”  


.”  


내 속을 들여다 보기라도 한 것처럼 W가 참혹한 상상의 진행을 저지했다.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일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끔찍하게 여겨졌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W와 함께 바람녀를 찾아가 욕이라도 실컷 퍼부어주어야 하나, 쓰레기 하나 걸러주어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 하나, 아님 절대 방출하지 말고 끝까지 데리고 살아달라며 빌어야 하나.


결혼할 거야.”  


머릿속에서 온갖 시나리오를 굴려보고 있던 나를 얼어붙게 만드는 마지막 밀까지 순식간에 털어놓고, W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로는 누군가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는 생각은 오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아무래도 난 거의 매일매일 실시간 카톡을 주고받는 아주, 아주 오래된 친구는 그 대상에서 열외라고 당연하게 여겨왔는지 모르겠다. 매일같이 수백 통의 카톡을 주고받고, 진지한 고민거리에서부터 사사로운 걱정들까지 털어놓는 그녀의 모든 것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명백히 자연스러운 일일 테니까. 


그러나 어제 내가 본 W의 모습은 분명 매우 낯설다.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보다 똑 부러지게 행동해왔던 W인데, 이 정도 일을 덮어두고 인생의 가장 중요한 선택일 수 있는 결혼을 진행한다니. 지금껏 내가 알던 W와는 다르다. 게다가 그 상대 여자는 어쩌고? 분명 제정신이 아니거나 무언가가 잘못된 것이다.     


대체 왜일까. 왜 그녀는 기어코 이 길을 선택하고야 만 것일까. 무엇보다 체면이 중요한 것일까. 그녀에게 지워진 기대에 대한 부담 탓일까. 아님, 원래부터 나약함을 숨겨두고 있던 걸까.    

 

[야 청첩장 어디에서 하기로 했어? 내가 했던 데 알려줄까?]     


W의 내밀한 비밀을 전혀 알지 못하는 Y의 카톡이 조용했던 단톡 방을 깨우고 있었다. 과연 W는 무어라 대답할까. 어쩌면 내가 예상했던 대로 이성을 되찾고 잘못 판단했노라며 성급했던 결혼 결정을 번복할지도 모를 일이다. 소주 두 병이면 분위기나 안주 상태에 따라 취할 수도 있는 양이니까.        


[어어, 알려주라]     


그러나 W의 신속한 대답은 어제의 일을 마치 꿈인 냥 아득하게 만들었다. 아니다. 차라리 꿈이었다면, 없었던 일이라면 좋으련만 불행히도 내 핸드폰에 찍힌 결제 내역은 어제의 일이 결코 환상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녀와 가장 가까운 친구로서 이것만큼은 어떻게든 중단시켜야 한다. 지금 당장 전화를 할까, 오늘 저녁에 다시 한번 만나자고 해야 하나. 어쩌면 그녀는 내게 말했던 것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수 있다. 슬쩍 어제 했던 대화의 운을 띄워놓고 맨 정신에 대화하며 설득하다 보면 정신을 차리고 제자리로 돌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주연이 니가 부케 받아라 ㅋㅋ]     


그러나 얼핏 보면 평상시와 다름없이 평범해 보이는 W의 카톡은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개입을 저지하, 의미심장한 뜻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녀는 확실히 내게 거리감을 요구하고 있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해도 범접하지 않아야 할 지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W가 지금 내게 바라는 것은 그녀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어주는 것이고, W가 선택한 세계에 균열을 내지 않은 채 어제의 일을 오랜 시간 동안 봉인해 두어야 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역할이라는 것을, 나는 깨닫고 있었다. 


아마도 십 년 전쯤이었더라면, 친구라는 이름으로 나는 그녀의 욕망과 진실을 찾아, 그녀의 비밀을 자꾸만 공유하려 들고, 감추어두었던 수치심과 나약함까지도 기어코 끄집어내려 했을지도 모르겠다.      


[알았어]     


그러나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이 지점에서부터 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이란 필연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누구도 완벽한 해답을 얻지 못한 채 복잡한 미로 속을 헤매며 살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 결국 인간이 사회적 존재인 이상 누구나 가슴속에 묵직한 비밀 하나쯤은 품고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바로 그 순간.


W는 비밀을 간직한 채 실수 없고 강인한 이미지를 유지하며 평소의 모습대로 살아갈 것이다. 옆 팀 이 팀장의 책상 위엔 세상 화목해 보이는 가족사진이 자리 잡고 있고, 중학교 동창 A의 카톡 프로필은 여전히 단란한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P의 인스타 피드는 값비싼 아이템과 고급 음식 사진들로 가득 차 있듯이.      

 

그 속에 어떤 비밀한 욕망과 갈등을 봉인해 두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모습이 진실된 자신이 아닌 만들어진 페르소나에 불과할 지라, 그것을 여는 것이 가면을 벗겨내는 것이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생각보다 단순하리만큼 평범한 삶일 수 있으므로.


타인의 연약함을 난도질하고, 비웃으면서 나는 실은 안도해왔는지 모른다. 나는 아직 내밀한 곳에 숨겨진 비밀의 자아를 들키지 않았다는 안도와, 너도 역시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똑같은 인간이구나, 하는 안도를.   

   

그러나 나는 무뎌지기로 했다. 타인의 비밀한 욕망과 우둔함, 그리고 위선에 무딘 듯 살기로 했다. 어쩌면 비밀의 자아와 사회적 자아의 분리를 필요로 하는 이 사회에서, 적당한 거리감에 적당한 잣대로 적당히 모른 척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필수적 예의일 테니까.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나가 비밀을 숨기고 페르소나를 쓴 채 얼마간 연기하며 산다. 결국 그것이야말로 사회적 인간의 조건인 셈이다. 하긴, 나 역시 어떤 나 자신을 은폐하고 가면을 뒤집어쓴 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내밀한 비밀 몇 조각쯤은 간직하고 산다. 여고시절부터 종종 동성 친구에게 성적 욕망과 호기심을 느껴왔다는 비밀,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될 S 다이어리를 십 년 넘게 써왔다는 비밀 외에도 사회적 가면을 쓴 나를 지키기 위해 절대 털어놓을 수 없는 불완전한 비밀 조각들을.      


아마도 누군가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나를 보며 공감과 연민의 감정을 껴안은 채 침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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