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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마담 Mar 29. 2019

삼십 대, 그 미묘함에 대하여 #22 - 안티에이징

안티에이징 권하는 사회

거울을 들여다보다 입가 주변의 팔자주름을 발견했다. 콧방울에서 입가까지 이어지는 약하게 패인 줄이 생경했다. 당혹하고 조급한 마음에 그 부근을 급히 문질러대도 그것은 태초부터 그곳에 존재했던 냥 떡하니 자리 잡고 앉아 도무지 희미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럴 수가. 대체 언제부터 이게 있었단 말인가. 그 시작을 떠올려 보려 해도 기억이 날 리 없었다. 주름이 없는 얼굴이 너무나도 당연해서 신경 쓰고 있지 않던 사이 ‘그것’은 갑작스러운 재앙처럼 어느새 나를 덮쳐오고야 만 것이다.    

  

또다.      


얼마 전 느닷없이 닥친 ‘흰머리’의 기습을 떠올렸다. 처음엔 현실을 부정하며 보이는 족족 그것을 뽑아내기 바빴고, 그 후엔 흰머리 안 나는 법 등을 검색하며 그것의 흔적을 없애기 위한 해결책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 사이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기하급수적으로 급속히 수를 늘리는 흰머리의 맹렬한 공격 끝에 결국 항복을 선언하며 주기적 염색을 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고야 말았지 않았던가. 어쨌든 각고의 노력으로 남들은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나의 흰머리를 알아보지 못했으니 어느 정도는 위장에 성공할 수 있었다지만 주름의 문제는 미묘하게 달랐다. 아무리 파운데이션을 도톰히 꼼꼼하게 발라 본들 단 한 번의 웃음만으로도 그것은 무력해질 수 있었다.  

    

씁쓸하게도 신체 노화의 흔적이 이제 ‘감출 수 없는’ 얼굴에까지 옮겨온 것이다.  

   

팔자주름이 더 이상 깊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볼에 빵빵하게 공기를 물고 거울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니, 우스꽝스러운 표정에 피부 노화의 진행을 애써 부정하는 마음이 겹쳐 추한 얼굴이 그 안에 머물러 있었다.    

   



얼굴로 옮겨온 나이 듦의 흔적이 서글프고 비참하긴 해도 작게나마 위안이 되는 사실은 어느 누구에게나 시간의 흐름은 필멸의 운명이라는 것. 다행히도 노화는 분명 내게만 닥친 일은 아니었다. 올해로 서른셋이 된 나의 친구들 또한 슬금슬금 변모하는 자신의 외모에 대한 자각과 함께 각자의 고민을 껴안고 있었으니 말이다.

     

최근 모임에서 K는 결코 저렴하지 않은 미용실 탈모방지 샴푸의 사용과 함께 매일 적당량의 맥주효모를 섭취하고 있음을 고백했다. 그게 어떤 효과가 있느냐는 친구들의 물음에 K는 자신의 가르마를 가리키며 강력한 자신감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 봐. 머리카락이 진짜 새로 나는 것 같다니깐.”      


일 년 전 K의 탈모 걱정에 나는 아직 걱정할 때가 아니라니까, 하며 은근한 우월감과 함께 안도의 감정을 감추지 못했던 나도 언젠가부터 가르마 부근의 머리숱이 예전 같지 않음에 슬슬 걱정이 되던 터였다. 이젠 조금 더 사정이 낫다며 자위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진행속도로 보자면 급한 것은 오히려 내 쪽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번엔 그녀에게 새로 머리카락이 자라나는 효과가 있다는 맥주효모 제품 정보를 넘겨받은 것에 안도했다.   

   

언젠가부터 모임에서 ‘안티에이징’에 관한 주제는 삼십 대라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오랜 시간 떠들만한 적절한 대화 주제로 오르곤 했다. 우리는 피부과며 경락 마사지며 홈 케어 상품과 같은 안티에이징 제품이나 관리법에 대해 꽤 많은 정보를 주고받았고, 실제 지인들이 경험했다는 드라마틱한 효과에 대해 토론하곤 했다.  


여행을 다녀오면 멤버들을 위한 소소한 선물을 사 오는 것은 우리 사이의 오랜 관례였다. 얼마 전 남자 친구와 함께 해외여행을 다녀온 W도 그 관례를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적당한 기대감을 안고 있던 내가 그녀에게 건네받은 것은 놀랍게도 발 각질 제거제와 풋 크림으로 구성된 풋 케어 제품이었다. 발 각질 제거제라니? 어느 누가 발 각질 제거제 따위를 선물로 받고 싶어 한단 말인가. 샌들을 신는 계절도 아니었고 건조한 날씨라곤 하지만 바디로션 하나면 충분했다. 립스틱 같은 간단한 화장품, 아니면 그 나라의 간식거리 같은 것을 바랐던 나로서는 다소 못마땅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W의 선택은 옳았다. 눈치 채지 못했던 사이 어느새 쩍쩍 갈라지고 굳은살이 박여 까슬까슬해진 발뒤꿈치를 바라보며 나도 그 낯선 모습에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보이지 않아 더욱 신경 쓰고 있지 않았던 몸 구석구석에 지난 시간의 층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W는 무엇보다 알맞은 ‘안티에이징’을 위한 선물을 건네주었던 것이다.


급 후회가 밀려왔다. 노화가 늘 나와 관계없는 먼 미래의 문제일 것이라 생각해왔다는 것에, 그것에 손톱, 아니 발뒤꿈 각질만큼의 관심도 두지 않았다는 것에.     


시간의 연속성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생각할 수 있는 한계는 늘 가까운 미래였다. 언젠가 나 역시 노인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상상할 수 없었다. 내 눈에 노인은 예전부터 노인이었던 것처럼 보였고, 때문에 노화는 늘 타인의 문제였다.

  

그러나 흰머리, 팔자주름, 그리고 보드라움을 잃은 딱딱한 발뒤꿈치는 내게 아주 분명한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노화는 이제 결코 먼 미래의 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지 이 순간 나 자신의 문제인 것이다.      


일상을 뒤트는 ‘노화’라는 이름의 이 깜찍한 재앙이 가져온 것은 불행히도 외모의 변화뿐만이 아니었다. 미세하게 서서히 쇠락해가는 몸의 변화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토록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내 몸에 대한 확신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최근 W는 빈혈 증세를 자각하자마자 부랴부랴 종합 검진을 받고 주 3회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조금 더 어렸을 적에는 무심히 넘겼을 수도 있을만한 일이었다. 겨드랑이에 잡힌 작은 몽우리에 다음날 꼭두새벽부터 유방외과로 달려갔던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내 몸이 마냥 생생하지 않은, 병이 들 수 있는 몸이라는 것을 지각한 것이다. 어디선가 우연히 얻은 종합 비타민만이 자리 잡고 있었던 책상 위엔 전 같았으면 외웠을 리 만무한 복잡한 이름의 건강 제품들, 이를테면 면역력에 좋다는 프로폴리스, 간 건강을 위한 실리마린과 같은 영양제들이 착실히 가짓수를 늘려가고 있었다.

      

나도 나이가 든 것이다. 요즘 세상에 고작 삼십 대가 무슨 나이 타령이냐며 욕먹기 딱 좋은 발언이 될 수도 있겠지 앙상하고 메마른 가을은 아닐지언정 쨍쨍한 여름이라 할 수도 없었다. 서서히 하강곡선을 그리는 실상을 마주하고야 만 것이다.

    



늙고 싶지 않다. 


그것이 모두가 피해 갈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일지라도 늙고 싶지 않다. 이 바람이 그저 미성숙하고 허황된 욕망일 뿐일까.


문득 몇 달 전 엄마 받았던 리프팅 시술이 생각났다. 신사역 바로 앞 높은 건물의 구 층에 위치한 한 성형외과였다. 늦은 저녁 시간이었는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시간의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한 얼굴, 그래서 어딘지 모르게 인위적으로 보이는 이들 사이에서 기묘하게도 지난 시간의 흔적을 얼굴 곳곳에 간직한 엄마가 외려 이질적인 존재처럼 느껴졌다. 가장 매끈한 피부를 지닌 이십대로 보이는 실장이 엄마의 상담을 맡았다. 그녀의 친절하고 나긋나긋한 설명에 매료되었는지, 아니면 이십 대 특유의 눈부시고 당당한 젊음의 분위기에 압도되었는지, 어쨌거나 엄마는 망설임 없이 바로 시술 날짜를 확정했다.      


“아빠한테는 말하지 마.”     


백오십만 원이라는 거금을 영구적이지 않은 미적 효과를 위해 투자하는 것을 아빠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엄마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시술 이후 강력한 탄력 효과를 얻고 확연히 변화된 모습에 엄마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딸에게 입단속을 시켰던 것을 잊은 양 아빠에게 변한 것이 없느냐 물어보기에 이르렀다. 다행스럽게도 ‘십 년은 더 젊어 보인다.’는 아빠의 명확한 정답에 엄마는 짐짓 의기양양한 태도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당신도 나랑 같이 피부과 가서 관리 좀 해. 지금 꼭 노인네 같아.”       


오십 대 후반의 남자가 무슨 피부과 관리냐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 무시하고 말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을 깨고 웬일인지 아빠는 엄마의 제안을 군소리 없이 수긍했다. 그래, 아빠도 좀 받아봐,라고 거들면서도 육십이 다 되어가는 중년 남성의 피부 관리라는 것은 왠지 고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민망하고 부자연러웠다.    


그러나 자연스럽다는 것은 뭘까. 급속도로 진행되는 신체적 노화 앞에서 가만히 손 놓고 앉아 늙어감을 받아들이는 것? 시술 따위 흐르는 세월을 거스르는 것이라 여기고 거부하는 것?


바야흐로 안티에이징 권하는 사다.


티브이 속 동안 얼굴과 군살 없는 젊은 몸을 유지하고 있이들을 보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비단 연예인들만이 아니다. 지하철만 타도 수많은 광고판은 ‘그런 얼굴과 몸으로 살 거냐’며 관리하지 않는 나를 앞에 두고 호통치고 있는 듯했다. 젊음을 사수하기 위해 많은 이들은 그들의 시간과 돈을 기꺼이 투자했다. 흰머리, 탈모, 기미와 검버섯으로 뒤덮여 탄력을 잃고 축 처진 피부. 노화의 상징을 지닌 이들은 결코 이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소외되었다.    


나이 듦을 쇠락으로 표현하는 사회, 젊음만을 아름답다고 숭배하는 사회에서 노화는 누구에게나 결코 달갑지 않은 두려운 손님일 뿐이었다.


그런 사회에서 어떤 태도를 자연스러운 것이라 여길 수 있을까. 잠시나마 ‘중년 남성’과 ‘관리’의 조합을 부자연스럽게 여겼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신체가 쇠락했다고 한들 젊음에의 욕망까지 사그라질 수는 없는 것이다. 누구도 나이 듦을 피해 갈 순 없다지만 육십 대가 가까운 나이에도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기 위한 욕망, 사회에서 소외된 자로 전락해버린 ‘노인네’로 취급받고 싶지 않은 것은 지금의 사회에서 지닐 수 있는 자연스러운 갈망이 아닐까.


젊음을 찬양하고 나이 든 자의 가치 찾기에 소홀했던 것을 뻔히 알면서 한편으로는 원숙함을 갖추고 고상하게 나이 들기를 바랐다니.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가혹한 폭력이 될 수 있겠다고, 군데군데 검버섯이 번져있는 아빠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K에게 넘겨받은 탈모방지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맥주효모를 주문하기 위해 제품명을 검색하면서 나는 새삼 빅데이터의 위대함을 실감하고 있었다. 여러 번 노화방지와 관련된 정보를 검색해온 기록을 토대로 그것은 나라는 인간의 관심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 내게 꼭 맞는 맞춤형 노화 방지 제품 광고들을 선보이고 있었다.       


내 눈을 사로잡기 위해 번쩍이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들의 노력에 보답하듯 나는 그들이 내놓은 안티에이징 제품의 광고를 기꺼이 클릭했다. 신사동 9층 성형외과의 실장을 꼭 닮은, 나이 듦의 흔적이 전혀 쌓여있지 않은 모델들이 젊음을 사수하라며 제품을 선전하고 있었다. 안티에이징을 적극 권하는 그들의 확신 가득한 추천에 나는 고민 없이 탈모방지 맥주효모와 함께 안티에이징 제품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몇 가지 제품을 담았을 뿐인데 이십만 원이 훌쩍 넘은 장바구니를 보며 잠깐의 망설임이 일었다. 현타가 밀려오는 듯했다. 고작 팔자주름 따위에 수많은 생각들이 뒤엉켜 전전긍긍하는 내 모습이 우스웠다. 나도 역시 외모지상주의라는 사회적 압박에 제대로 굴복해버린 걸지도 몰라. 어차피 언젠가는 늙을 텐데 그냥 인정하고 순응하면서 살 것이지, 굳이 이렇게까지 하면서 추접하게 살아야 하나. 껍데기는 그저 껍데기일 뿐인데 내면을 가꾸고 품위 있게 나이 드는 것이 더 나은 자세가 아닐까.    


그러나 구구절절 옳은 내면의 소리를 외면하며 끝내 나는 주문 버튼을 클릭했다.     

 

결제 완료 창 옆으로 이번 주문만으로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듯 십 년은 어리게 만들어준다는 보톡스 필러 특가 광고가 나를 유혹하기 위해 맹렬히 노력하고 있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계속 투쟁해야 할까. 아예 나이를 왕창 먹어버리면 그땐 나이 듦을 수긍하고 초월하게 될까. 피할 수 없는 노화라는 숙명에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무엇이 옳은 길인지 혼란스러웠다.


아마 시간이 더 지난다 해도 해답을 찾긴 쉽지 않을 것이다. 하루하루 낯설어지는 몸을 볼 때마다 나는 지독한 상실감에 휩싸일 것이고, 그것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을 고통일 것임이 뻔했다.


수많은 안티에이징 제품들, 혹은 시술로 켜켜이 쌓인 세월의 층을 얼마간 퍼내 나른다고 한들 이미 두텁게 쌓인 시간의 흔적을 없애긴 역부족일 테고, 나의 발광에 가까운 발버둥은 공허함만 남긴 채 무위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젊음은 영원할 수 없고, 영원할 수 없는 것을 욕망하는 것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으므로.      


그러나 안티에이징 권하는 사회에서 나이 듦에 대한 마음가짐을 고쳐보라는 어설픈 설교는 내게 딱히 와 닿지 않는다. 미안하지만 그런 위로 따위 비겁한 허상과 위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다만 최대한 사수하고 싶다. 젊음을 앗아가는 흘러가는 시간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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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마담쌀롱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hannel/UCMVI-WRQYPQFToxaq4Nn04A

인스타그램: @hong_ma_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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