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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마담 Jan 02. 2020

삼십 대, 그 미묘함에 대하여 #27 - 아등바등

서른셋의 나를 표현하는 그 말, 아등바등.

“고객님한테 딱인데요. 화려한 쪽 좋아하시면 이 스타일은 어떠세요?”

“아, 잠시만요. 좀 둘러보고 다시 올게요.”

    

직원이 추천해준 귀걸이를 귀에 댄 채 거울을 들여다보다 슬그머니 제자리에 내려놓고는 ‘당신과 당신의 상품은 전혀 문제가 없지만’이라는, 그가 섭섭하지 않을 만한 뉘앙스를 최대한 풍기고 은은한 미소를 유지한 채 그에게서 등을 돌린다.        


몇 발자국이나 걸었을까. 그와 최대한 멀리 떨어져 이제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데도 막 뜰채로 건져 올려진, 곧 횟감이 될 물고기처럼 내 심장은 아직도 파닥파닥 뛰고 있다. 내 분수에 맞지 않는 과한 가격 때문만은 아니다. 점원의 사분사분하고 친절한 칭찬이 진심이 아닌 내 소비를 끌어내기 위 실제 감정을 억제한 표면행위라는 진실을 간파했기 때문도 아니다.      


단지 귀걸이를 귀에 대보려 넘긴 옆머리에서 ‘또다시’ 한 무더기의 흰머리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없는데, 뿌리 염색을 한지 겨우 삼 주가 지났을 뿐이었다. 어떡하지, 낯선 곳에 떨어진 듯 생경함이 몰아치더니 이내 나를 덮치고 만다. 그 어떤 빈(貧)함을 허락하지 않는 눈부시게 호화로운 백화점, 아무런 걱정 없이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사람들. 나 역시도 방금 전 까진 그들과 함께 어우러져 있었건만 불현듯 찾아온 흰머리의 등장에 이제는 홀로 뚝 떨어져 마치 이방인인 듯 어색하게 겉돌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도무지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안고 밖으로 나오니 비가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아 정말 지랄 맞은 하루다, 지하철역까지는 오 분 정도. 달리면 아마도 삼 분 안에는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필 백화점에 온다고 평상시 잘 가지고 다니지도 않던 고급 브랜드의 가방을 메고 온 터였다. 이걸 쓸 순 없잖아, 내 한 달 월급의 반이나 되는 고급 브랜드 가방을 코트 안쪽으로 집어넣고, 나는 달린다.      


갑자기 거세진 빗줄기에 나무 밑으로 급히 몸을 피해 보지만 앙상한 겨울나무는 비를 막아주기에 역부족이다. 푸른 봄, 그토록 풍성할 수 없었던 이파리들은 이제 지고 없다. 잿빛의 나무들이 처량하다. 청춘일 땐 생각이나 했을까. 나도 이 나무처럼 저물어갈 줄을. 지하철역까지는 이제 스무 걸음 정도. 그러나 나는 결국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타고야 만다.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을 도저히 주체할 수 없었으므로.     




그렇다. 마구 소리 내어 울고 싶을 정도로 현재 내 인생의 가장 큰 화두는 ‘흰머리’이다. 나쁜 시력, 튼튼하지 않은 치아와 함께 부모님께 물려받은 반갑지 않은 선물이 또 있다는 것을 나는 서른셋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아우 그냥 염색해, 마흔셋도 아니고 서른셋밖에 안 먹어놓고 왜 그래, 대체. 망연자실한 심정으로 가까운 이들에게 이야기를 꺼냈다가 그게 뭐 그리 수선 피울 일이냐는 식의 무안한 면박을 몇 번 당하고 나서야 나는 입을 닫았다. 그들에게 내 고민거리란 ‘고작 흰머리’, ‘고작 서른셋’ 따위인 것이다.     


못돼 처먹은 것들. 이그렇게 가볍게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고작, 이라는 말로 깎아내릴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란 말이다. 그들은 무딘  것인가. 아니면 이런 문제쯤이야 가볍게 떨칠 수 있을 정도로 훅 숙해버린 것인가.     


그러나 장담컨대 흰머리는 인생의 어두운 진실을 담고 있는 대단히 무거운 문제다.  


문제는 흰머리 그 자체가 아니다. 늙어간다는 것이다. 부정할 수 없이 인생의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내가 맞닥뜨린 아주 중요한 문제다.

     

늙음. 그 달갑지 않은 손님은 내가 눈치 채지 못하게 찾아온다. 살금살금, 천천히, 아주 고요하게. 그러곤 오늘처럼 불시에, 느닷없이 제 모습을 드러내며 기어코 벼락같은 충격을 던져주고야 마는 것이다.      


물론 누구나 예외 없이 나이가 든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것은 지구 상의 생명체로 태어난 이상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자연의 순리니까. 그러니 흰머리를 얻는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나이가 든다는, 늙어가고 있다는 명확한 신호를 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늙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쌓아온 경험만큼이나 인생의 지혜와 원숙함을 축적하게 되는 것? 연륜에 걸맞은 고상한 품위를 갖게 되는 것?      


맞다. 삶의 경험에서 터득한 그들의 지혜도, 나이 듦에서 오는 긍정적 가치도 상당 부분 인정할만하다. 그러나 아니다. 미안하지만 그렇게 낭만적인 것은 아니다. 늙음이 그런 후한 평가만을 받는다면 그의 방문이 내게 이렇게 충격적인 기습 공격으로 다가올 리가 있는가. 이토록 외면하고 도피하고 싶을 리 있냐는 거다. 나는 아직 받아들일 수 없다. 늙는다는 것은 젊음을 잃는다는 것이고, 젊음을 잃는다는 것은 인생의 메인무대에서 밀려나는 것이다. 의도했든 그러지 않았든 당연히 누려왔던 젊음의 특권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적어도 이 사회에서는.

     

청춘예찬, 젊음을 숭상하는 사회에서 젊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강력한 힘을 갖게 한다. 보잘것없고 변변찮은 조건들만 지녔다 할지라도 젊음 하나만으로  무엇도 두렵지 않을 만큼 막강한 위세를 떨칠 수 있으니까. 나의 이십 대 역시 그것을 명명백백 증명했다.      


젊음이 추앙받는 현대사회의 흐름 안에서, 서른 이전의 나는 언제나 강자 쪽이었다. 나름대로 무대 위에서 강력한 스포트라이트를 쐬는 주인공의 역할을 거머쥐고 있던 것이다. 오해는 마시라. 연예인처럼 대단히 주목받고 사랑받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은 아니니까. 적어도 내가 포함된 작은 세계에서만큼은 내 목소리를 내는 것에 당당하고, 나에 대한 남들의 관심이 납득되는 삶을 살았다는 뜻이다. 매사에 치열하게 살진 않았던 탓에 자랑할 만한 사회적 신분과 지위 따위 얻지 못했지만, 젊음 숭배의 사회에서만큼은 나도 기득권층일 수 있었다. 특권 자유이용권이라도 지닌 듯 내게 주어진 권력을 나름대로 누려보았던 것이다.


만일 불행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달라졌을까. 언젠가 비중이 떨어지는 다른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는, 혹은 관객의 시선이 차단된 어둑한 무대 뒤로 끌려 날 것이라는 생각을 했더라면. 팥 한 알, 쌀 한 톨만큼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기막힌 무지 나를 더 큰 혼란의 세계에 놓이게 하고야 말았다.


흐르는 시간 앞에 나는 결국 약자일 수밖에 없다. 아직 더 신나게 즐겨야만 할 것 같은데 만료일은 쏜살같이 다가온다. 이용 가능 기간이 지나고 나면 티켓은 그저 화려했던 추억만을 불러일으키는, 어느 짝에도 쓸모없는 무용지물로 전락하고 만다. 그때부턴 돌연 세상의 관심으로 둘러싸였던 주연의 삶에서 벗어나 어둑한 조연의 세계, 소외되고 차단된 세계로 편입되고야 마는 것이다. 이제 스포트라이트는 또 다른 주연을 찾고, 관객들은 내게 시선을 두지 않는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남자들의 관심에서도 나는 서서히 멀어지고야 있다는 사실 또한 나를 슬프게 하는 것 중 하나다. 뭐, 이해는 한다. 침대 위 무장해제된 채 널브러져 있는 여자에게서 희끗희끗한 흰머리, 두피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발견한다면, 그녀에게 뜨겁고 격렬한 섹스를 갈망하기보다 아무래도 연민의 감정을 더 품고야 말 테니까.       


그러나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타인의 관심과 주목의 사그라짐이나 단지 나를 이 사회에서 ‘젊은 여성’으로서 기능하게 만들었던 여성성과 성적 매력의 상실뿐만이 아니다. 나는 몰랐다. 나의 신념이 이토록 헐거운 줄은. 나의 세계관이 이리도 연약한 줄은. 틈 없이 촘촘한 줄로만 알았던 나의 정체성은 강렬한 젊음이 숨 쉼으로써 형성된 것이었고, 견고하다고 여겼던 신념은 젊음 위에 허약하게 올려졌던 것임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사회가 선물처럼 주었던 특권을 빼앗기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을 명료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저항, 비판, 페미니스트. 스스로 나를 정체화하던, 몹시 단단한 줄로만 알았던 단어들. 내가 언제나 내 신념에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젊음이 주었던 주목과 관심, 그리고 파워 때문이었을까. 젊음의 권력을 잃고 나자 나의 세계관과 신념은 맥없이 스러졌다. 사람들은 이전만큼 내게 시선을 두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종종 ‘비혼’과 같은 나의 선택은 주체적 선택이 아닌 실패자의 행위로 조롱받기도 한다. 나이 듦은 당당함마저 앗아가 버렸다. 이제 나 역시도 나의 신념이 주체적으로 확립된 것이었는지, 그간 나의 선택이 진실로 자유로운 선택이었던 건지 의문이 들기까지 한다. 여성이 남성의 성적 대상으로서 비하되고 사물화 되는 것에 격렬한 분노를 느낌에도 여성성의 사그라짐을 느끼자 초조해지고, 시대에 만연한 젊음 예찬 주의를 냉소하면서 결국 청춘의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억압된 지식에 저항한다고 말하서도 사실 시대가 요구하는 온갖 억압된 조건과 규범을 맞추기 위해 가식과 위선으로 뒤덮여 아등바등 고군분투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야 말았으니까.    

  

아등바등.  


어쩌면 이것은 또 다른 저항이 아닐까. 순응은 포기의 다른 말일뿐이다. 나는 굴욕적으로 패배하고 싶지 않다. 순응과 저항의 두 갈림길 중, 그렇게 나는 저항의 길을 택하고야 말았다. 청춘의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기 위해 발악하고 몸부림친다. 그 몸부림은 더욱 강렬해진다. 아등바등 그토록 냉소해 마지않던 미용시술을 받고, 아등바등 피부과에 수백만 원을 지출하리에 애쓰고, 아등바등 안티에이징 제품을 찾 주문하고….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주변인들과 함께 늙어간다는 것 정도. 주변인들의 늙어감을 확인하면서 그들도 나와 같은 구렁텅이에 빠졌음에, 같은 불행을 지녔음에 안도하는 내가 있었다.

        



흰머리만큼이나 ‘몸’ 역시 삶의 어두운 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수영장 샤워실, 나와 같은 시간 수영을 하는, 두 명의 여학생들이 서로의 빨개 벗은 몸에 비눗물을 묻히고 깔깔대며 연신 장난을 치고 있다. 군살 없이 암팡진 몸을 슬쩍 쳐다본다. 그들의 몸은 환하고, 빛나고, 당당하다. 세월이 쌓이지 않은 몸젊음의 광채가 있다. 그들의 옆에 중년과 노년의 시간 사이에 걸친 한 여성도 몸을 닦고 있다. 의자에 걸터앉아 한 눈에도 거칠어 보이는 발뒤꿈치의 각질을 벗겨내고 있다. 각질을 문질러댈 때마다 그 반동으로 살이 출렁댄다. 나이 든 몸에는 군살과 함께 세월의 흔적이 박있다. 서글프고, 먹먹하고, 고단하다. 아무리 박박 벗겨 내봐야 깊숙한 곳부터 그 세월까지 벗겨낼 수 있을까. 그리곤 문득 어두운 진실을 떠올린다. 나도 그 몸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가능성을 기대할 수 없는 몸, 여성성을 상실하고, 여성으로서의 기능을 마무리하고, 욕망이 사라지고, 씁쓸한 세월이 쌓인 몸으로.

     

이럴 수가. 갑작스럽게 여학생들을 향한 강렬한 질투심이 인다. <은교>에서의 이적요의 심정이 이랬을까. 늙음이 나의 잘못으로 받은 벌은 아니라지만 젊음을 잃는다는 것이 이토록 잔인한 것일지, 이처럼 눈물 나게 서러운 것일지 그땐 몰랐다.      


양면성. 새삼 우리네 삶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상반되는 개념들이 늘 악착같이 라다닌다는 것을 깨닫는다. 비단 젊음 늙음일까. 만남과 이별, 탄생과 소멸, 성장과 쇠퇴, 생과 사. 필연적으로 모순과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인생. 돌이켜보면 내 인생은 늘 ‘아등바등’과 함께한 역사이지 않았던가. 늙지 않기 위해, 이별하지 않기 위해, 쇠퇴하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단 한 번도 뜻대로 된 적은 없었지만.  

     

모를 리 있겠는가. 언젠가는 선택의 여지없이 체념의 길을 걸어야만 한다는 것을. 세상에 태어난 이상 쇠락의 길을 밟아야 하는, 결국 죽음으로 다다르고야 마는 인간에게 주어진 가혹한 형벌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을. 하지만 모든 걸 놔버려야만 하는 그날, 그날이 오기 전까진 어떻게든 버티어 있고 싶은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직은 때가 아닌 것이다. 사실 젊음을 숭배하고 늙음을 배척하는 사회에서 나이 듦에 순응하라는 말이야말로 극치의 위선이 아닌가. 장 아메리의 말을 인용하자면 “속절없이 늙어가는 사람에게 그 쇠락을 두고 ‘우아한 체념’이라거나 ‘황혼의 지혜’라는 말 따위로 위로하는 것은 굴욕적인 기만에 지나지 않는”것이다.

     

거울을 들여다본다. 시간의 흐름 속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 그 안에 생경한 나 자신이 있다. 사실 흰머리뿐 만은 아니다. 조금 더 깊어진 듯한 주름, 턱밑으로 둥글게 처진 살들, 그 때문에 더 크고 넓어 보이는 모공. 일단 먼저 헤어 파운데이션을 주문하기로 한다. 며칠은 이것으로 버티다가 돌아오는 주말에 염색을 하러 가야지. 그리고 나선 피부과를 가보고, 또….     


아등바등. 나를 표현하는 말이 이런 말일 줄은, 내 삶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몰랐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여기려 해 봐야 그 단어는 암담함, 비참함과 같은 절망만을 떠올리게 할 뿐이니까.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이것은 나의 생존전략이다. 나를 둘러싼 세상의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과거의 욕망을 놓지 못하는 나 자신이 조금도 추해 보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늙음을 죄악시하고 젊음만을 부르짖는 시대에서 어떻게든 젊음의 시간에 더 가까이 있기 위해 지푸라기 하나라도 부여잡는 것을 두고 그 어떤 이가 틀린 선택이라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나는 그저 오늘도 젊음 예찬의 삶에서 버티기 위해, 근원적 모순의 인생을 살아내기 위해, 늙음으로의 격렬한 질주를 막기 위해 분투할 뿐이다. 아등바등. 아등바등.      




2020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격렬히 저항했지만 저도 서른셋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2019년을 정리하며 제 자신을 표현하는 말을 찾다 보니 결국 '아등바등'이 당첨되었더군요. '아 미친, 진짜 이거야?'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보다 적절한 단어를 도통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흠. 올해부턴 조금 '설렁설렁'이고 싶었는데 헤어 파운데이션이 제때 도착하지 않아 새해 첫날부터 종일 우울한 것을 보면 '설렁설렁'은 제겐 아직 머나먼 미래의 이야기인 듯싶네요. 뭐 어쩌겠습니까. 이게 저라는 사람인 것을. ^^; 다른 곳에 기고한 글이라 중복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참고해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홍마담쌀롱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hannel/UCMVI-WRQYPQFToxaq4Nn0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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