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대, 그 미묘함에 대하여 #3 - 가십걸

드디어 가십걸에서 벗어나다

by 홍마담

열렬한 짝사랑의 상대도 없겠다, 대단하게 도전할 만한 과제도 없겠다. 무난하고도 감흥 없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서른둘 여성의 감정을 요동치게 만들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 새롭게 시작한 수영? 조금씩 늘어가는 실력이 뿌듯하긴 하지만 딱히 내 스타일의 남자가 없어서인지 이건 뭐, 그저 그렇다. 매주 오천 원어치 사는 로또 당첨번호 발표? 음, 항상 통틀어 세네 개의 숫자만이 일치하는 데도 불구하고 발표 날마다 매번 기대감이 살짝 고개를 쳐드는 건 맞지만 이것도 말 그대로 살짝 일뿐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내가 아직까지는 ‘자발적으로’ 결혼을 선택하지 않은 서른둘의 비혼 여성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친구들의 결혼 소식을 들을 때, 그때만큼은 왠지 여러 종류의 뒤섞인 감정이라는 것이 속에서부터 마구 뿜어져 나오면서 결코 평온한 마음을 유지할 수 없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나 부탁인데 제발 오해는 말았으면 좋겠다. 이건 그녀들이 부럽다든지, 혹은 질투가 난다든지 하는 수준의 문제가 절대, 절대, 절대로 아니다.


야, 걱정 마.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나 결혼해도 아가씨처럼 살 거야.


너 결혼하면 난 누구랑 노냐고! 한 번만 더 생각해봐. 삼 년 전, 조심스레 결혼 소식을 알리는 그녀를 앞에 두고 울부짖는 나를 향해 Y는 마치 자신에게 하는 다짐인 냥 대답했다. 그러나 이미 친구들 몇몇이 앞서 기혼자의 길로 들어선 후였다. 웃기고 있네, 내가 또 속을까 보냐.

그렇다. 인정하긴 싫지만 우리 여성들의 깊고 진한 우정. 그것의 유지를 그 어떤 고난과 역경의 길보다 힘들게 만드는 방해물에는 ‘결혼’이라는 것이 크게 한몫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이미 다수의 사례를 통해 체득하고야 말았다.

21세기가 되어도 아가씨 같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아줌마는 며느리 앞에서 과일을 깎는 시아버지를 발견하는 만큼이나 흔치 않은 일이지 않던가.

오늘이 만남의 날이었다는 것을 잊었는지 아침부터 아무 말 없는 고요한 단체 톡방을 쏘아보다가 결국 나는 gg를 선언하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속아보기로 한다.

[얘들아, 오늘 건대에서 만나기로 한 거 알지?]

[미안, 나 모레가 아주버님 생신인데 오늘 갑자기 저녁 약속 잡힘ㅠ 쏘리. 담엔 내가 쏜다!]

오, 역시나. 넌 날 실망시키질 않는군.

Y는 조심스레 불참을 선언했다. 오늘도 K와 W, 그리고 나. 셋만 만나게 되겠구나. 이제는 그러려니 할 법도 한데, 섭섭한 감정이 쉽사리 가시지가 않는다.


아니, 아니다. 차라리 잘됐다. 최근 들어 우리의 대화 주제가 미묘하게 어긋나기 시작한 까닭에 은근히 이 단체의 결속력이 약해지는 게 아닐까 걱정하던 참이었다. 결혼 생활, 특히 내게 Y의 시댁 이야기는 견딜 수 없는 노잼 주제였고, 한편 Y는 다른 친구들의 소개팅이나 남자, 회사 이야기 등에 전과는 다르게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가끔씩 당시 화제가 되었던 연예인 가십거리라도 얘기할라 치면 ‘얘들은 아직까지 무슨 그런 이야기를?’이라며 표정으로 말하고 있는 Y를 포착하기도 했던 터라 나는 대화의 공동 테마를 생각해내는데 애를 먹고 있었던 것이다.




“섭섭하긴, 그럼 가정이 중요하지, 니들이 중요하겠냐. 포기할 건 포기해.”


미참석자에 대한 섭섭함은 W의 직설적이고 시크한 태도에 왠지 모르게 누그러졌다. 그녀에게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만 MBTI 성격유형 검사를 해본다면 그녀는 아마도 ESTJ, 그러니까 ‘엄격한 관리자’ 유형일 것이 분명하다. 현실적이고 논리적이며 원리원칙이 확실한. 나서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막상 큰일이 터졌을 땐 냉철하게 해결하는, 그렇기 때문에 무리에 꼭 필요한 믿음직한 스타일이랄까. 그래서인지 사실 그는 내게 가장 의지가 되는 친구이기도 했다.

“W야, 나 흰머리 엄청났다?”

“수영이네 춤이네 뭐네, 아무리 까불어봤자 너도 늙었다는 거지. 염색해.”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다시 정정하겠다. W로 말할 것 같으면 냉철하다 못해 성격이 더러운, 무리에 꼭 필요한 존재이지만 그 존재가 다수일 필요 없이 한 명이면 족할, 딱 그 정도의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한 마디로 엄격하게 못된 년.

“아 맞다, 대박. K 소개팅했대.”

“어 맞아. 이번 주 주말에 한 번 더 보기로 하긴 했거든. 왠지 잘 될 것 같아. 너네랑 같이 한 번 보면 좋겠다.”

“너는 이젠 얼굴만 보지 말고 성격이나 뭐, 다른 것 부분 좀 봐.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전에 걔는 졸라 병신이었던 것 알지? 안목 좀 높여.”

역시. 기분은 좋지 않지만 뭐라 반박할 수 없는 W의 엄격한 지적에 K 역시 나와 같은 표정으로 어떠한 대답을 하지 않는 것으로 패배를 선언한다.

“회사에는 좀 괜찮은 남자 없어? 남자고 여자 고간에 건실한 게 최고야. 맞아, 너 예전에 썸 탔던 그…, 그 누구 있잖아.” W가 기세를 이어 말한다.

“썸 아니라니깐. 사람들이 그냥 엮은 거지. 그 사람도 올해 결혼했어. 드디어 소문에서 해방.”


발끈하는 K를 보자 한참 동안 잊고 있던 기억이 스멀스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K가 지독하게 스트레스받았었던 일이었지, 참. 몇 년 전, K의 회사에서 유 대리라는 당시 삼십 대 초반의 남성과 K를 하도 엮어대는 통에 K는 우리를 만나기만 하면 그 문제에 대한 하소연을 하곤 했다. 회식 자리에서 K와 유 대리를 옆자리에 앉히는 것은 물론, 워크숍에서 커플 게임을 하게 하는 등 짓궂은 장난이 계속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그런 스트레스를 받는 건 K 뿐만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크고 작은 비슷한 문제로 난감한 일을 겪는 주변 사람들이 결코 한 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 날 화장실에서 화장을 고치고 있는 내게 옆 옆 자리 이 과장이 다가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이 과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십 대 초중반에 결혼을 해 당시 결혼한 지 십오 년이 훌쩍 넘은 유부녀였는데, 당시 그녀가 결혼한 상대는 한 남자뿐만이 아니었다. 마치 ‘나는 일과 결혼했다’는 진부한 카피를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니는 것만 같은, 죽어라 일하는 전형적인 워커홀릭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야근과 초과근무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대단한 충성심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다수의 워커홀릭이 그렇듯 예민하고, 욕심 많고, 게다가 완벽주의자 성격까지 갖추고 있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스타일이었다. 어쨌거나 일과도 결혼했다며 인정받을 정도였던 그녀의 판단에 부하직원들, 특히 여직원들은 무기력해 보이고 소극적이라고 생각했는지, 가끔씩 그녀의 눈에 차지 않는 여직원들을 쥐 잡듯이 잡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진짜 문제는 지나친 워커홀릭에서 비롯된 피곤한 성격, 단지 그것이 아니었다.

“홍주연 씨, 이런저런 얘기가 떠돌던데.”


“예?”


“영업팀 박 주임이랑 조조영화 봤다면서? 소문 다 났더라. 사귀기로 한 거야?”

이게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박 주임과는 업무 차 두어 번 정도 얘기를 나눠본 적이 있었을까. 서로 번호도 알고 있지 않을 정도로 사적으로는 전혀 얽힌 관계가 아니었다. 게다가 아침잠이 많은 탓에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조조영화를 본 적이 없는 나였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냐고? 그 어려운 걸 내가 증명하고 있었다.

“아닌데요? 저 그분 만난 적도 없고, 아예 전혀 모르는 사이예요.”


“그래? 여기저기서 주연 씨에 대해 말이 많아. 내가 노파심에 하는 소린데, 사내 연애는, 알지? 행동 조심해야 된다. 괜한 얘기 안 들리게 하려면 여자로서 처신 잘하고.”


그녀는 알까. 그녀가 지닌 문제는 셀 수 없이 많지만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꼰대’인 것을 모른다는 것임을. 무슨 행동을 조심하고 뭘 어떻게 처신을 똑바로 하라는 것인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소문의 근원지를 찾아서 아작을 내고 싶기도 하고, 이 말 저 말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욕지거리를 날려 주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가장 큰 분노, 극대노(極大怒)를 불러일으킨 인물은 역시 다름 아닌 이 과장이었다.

‘미친년. 지도 여자면서 무슨 여자로서 처신을 똑바로 하래. 어이없네. 맘에 안 들었는데 한 번 들이받을까 보다.’


그러나 당시 사회초년생이었던 K와 나는 그들을 들이받기는커녕, 불쾌하다는 표현 한 번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아주 쉽게 사내 가십거리의 주제로, 술자리의 안줏거리로 놓이곤 했다. 그들에 따르면 나는 영업팀 박 주임과 사귀는 사이였다가, 이태원 거리에서 포착되는 클럽녀이기도 했다가, 일은 열심히 안 하고 남사원들에게 ‘끼나 부리는’ 여우 같은 직원이기도 했다.

온갖 루머와 악플에 시달리는 연예인들의 심정이 이해 가던 어느 날, ‘술 마시면 남자한테 앵긴다더라’는 악의적인 소문이 또다시 내 귀에 들려온 날, 도저히 혼자 삭일 수가 없던 나는 할머니 제사를 지내러 간 큰집에서 오랜만에 만난 사촌 언니를 붙잡고 그간 내가 겪은 사건들을 A부터 Z까지 구구절절이 토로하기에 이르렀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아주 맹렬하게 전투적으로 뱉어내는 내 말을 심각하게 들어주는가 싶더니, 어이없게도 언니는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주연아. 정말로 시간이 약이야.”

“그 새끼들이 이상한 건데 무슨 시간이 약이야?”

“그냥 젊은 여자가 중심 타깃이지 뭐, 서서히 사그라지게 될 거야.”

“그럼 그냥 따지지도 말고 냅두란 소리야?”

“그냥 질투나 관심이라고 생각해. 너, 화제의 중심의 가십걸, 그것도 한 때다.”


“언니, 뭔가 기성세대 같다.”


시원한 해결책 하나 제시해주지도 않고 단지 시간이 약이라는 소리만 하다니. 언니도 어쩔 수 없구나. 꼰대 같다는 소리를 돌려 말했다.




“저기, 혹시 세 분이 오셨어요?”

과거의 회상에서 나를 소환한 것은 어떤 앳된 남자의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목소리만큼이나 앳되고 피부가 뽀얀 남자 한 명이 말을 걸고 있었다. 말을 거는 대상은 당연히 우리, 가 아닌 옆 테이블에 앉은 딱 봐도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 무리. 왠지 모르게 순간적으로 들떴던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나도 참, 무엇을 기대한 거야.


남자는 흰 피부에 귀엽게 생긴, 요새 아이돌처럼 트렌디한 외모였다. 아마도 저 트렌디한 외모 덕에 그들 무리 중 여자들에게 말을 걸 대표로 뽑혔으리라. 옆 테이블 여자들은 뭐가 그렇게 쑥스러운지 대답은 않고 서로를 본채 까르르 웃으며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다소 촌스럽게 보일 수 있는, 진한 화장과 짧은 옷차림도 그녀들의 앳됨을 완벽히 커버할 수는 없었다. 고개를 돌려 K와 W를 쳐다본다. 어머, 얘들이 언제 이렇게... 이 쪽도 정교한 화장으로 성숙함을 가릴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헌팅의 메카, 건대답다. 근데, 우리도 세 명인데.”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K가 연기를 하고 있다.

“1차 내가 계산할게. 일어나. 2차 가자.”


K와 나의 장난을 차단하려는 듯, 엄격한 관리자 W가 시크하게 일어났다.




박 대리(박 주임은 이년 전 대리로 승진을 했다)를 만난 건, 다음 날 출근길에서였다. 같은 열차를 탔는지 개찰구를 통과하기 전 벽면에 붙은 전신 거울을 바라보며 전체적인 차림새를 점검하고 있는데, 마침 박 대리가 곁을 지나고 있던 것이다. 그가 목례를 하며 먼저 알은체를 해왔다.

회사는 지하철역에서부터 걸어서 십분 정도. 지하철역 화장실이라도 들를 걸 그랬나, 싶게 십 분이란 시간을 남자와 같이 걷는다는 것은 어색하다. 아니, 어쩌면 박 대리이기 때문일까. 예전 그 소문이 내가 그를 더욱 의식하게 만들고 있는 건지 모른다. 그나저나 지금 보니 선이 굵고 시원시원하게 생긴 것이, 꽤 호감 형이다. 참, 내가 과거에 왜 그렇게까지 흥분을 했을까. 그런데 이 사람, 애인이 있다고 했었나.


“사람들이 저한테 사귀냐고 묻는 것 있죠?”

“예?”


박 대리가 기습적으로 꺼낸 얘기에 순간적으로 심장이 덜컹한다. 설마, 아직도?

“그 이번에 신입사원으로 들어온 옆 팀 J 씨 있잖아요. 왜, 머리 길고 차분한.”

옆 팀에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 J의 이야기였다. 도시적이고 세련된 외모와 다르게 차분하고 여성스러운 말투 덕에 남 사원 몇몇이 관심을 갖는다는 소리는 익히 들었던 터였다.


“아아.”

아, 그래요? 네, 그런데 왜요? 같이 대화가 이어질 수 있는 대답은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전혀 그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는 의견을 강력하게 표출한다. 그러나 박 대리, 이 자식은 왜인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지난번에 어쩌다 보니 시간이 맞아서 밥 한 번 같이 먹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사람들이 저더러 사귀냐고 묻더라고요. 하하, 어이없죠?”

지랄. 넌 전혀 어이없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러워 미치겠다는 거, 누가 모를 줄 알고? 은근한 미소며, 왠지 모르게 거들먹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그 태도가 얄미워 커피를 사러 간다는 핑계로 그를 보내준다. 아,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 걸까.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얘기잖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합석할래요?라는 소리는 언제 마지막으로 들었는지 까마득하다. 회사 내 가십거리의 주인공은 더 이상 내가 아니다. 정말, K를 소문에서 해방시킨 건 유 대리의 결혼 때문 만일까? 이상하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헛소문에 시달리지 않는데 왜 마냥 기쁘지만은 않을까? K는 어떨까? 그녀는 소문에서 해방돼서 정말 행복할까?


설마. 나는 정말 서서히 주변인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일까?


그때는 꼰대 같다고 생각했던 사촌언니의 말이 자꾸만 귀를 맴돈다. ‘중심부에서 서서히 벗어나는 때가 와. 서서히 사그라진다고. 언제까지 이십 대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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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마담쌀롱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hannel/UCMVI-WRQYPQFToxaq4Nn0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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