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내시경 그리고 인생 카스테라

카스테라에 진심이 된 날

by 홍천밴드

인생 처음으로 대장내시경을 했다. 올 초에 소화기 쪽에 문제가 생겨서 병원을 갔었고 다행히 치료를 잘 받아 지금은 별 이상이 없는데, 일정 기간 지나면 대장내시경을 하는 게 좋다고 해서 진행하게 됐다. 말로만 듣던 대장내시경을 막상 해보니 할 만은 했는데 그렇다고 자주 할 그런 성격의 검사는 아니다.


무엇보다 준비 과정이 길고 번거롭다. 검사 3일 전부터 음식 조절을 해야 되는데 씨앗류, 깨, 나물과 같은 건 금지라 한식은 거의 먹을 수 없었다. 대신 닭가슴살, 생선, 계란, 두부와 같은 음식을 먹을 수 있어 뜻밖에 단백질 파티 음식을 이틀 동안 먹었다. 검사 전날은 그나마 단백질 음식도 안되고 흰 죽 하고 카스테라만 먹을 수 있었다. 하루 종일 맛있는 것을 못 먹고 흰 죽만 먹으니 삶의 의욕도 스르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흰 죽을 다 먹고 카스테라 먹을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졌다. 카스테라 한입을 베어 무니 세상 맛있었다. 평소에는 일부러 찾아 먹지 않는 디저트인데, 흰 죽만 먹다 먹는 카스테라는 정말 감동 그 자체였다. 조금씩 카스테라가 사라지는 게 아쉬워서 천천히 더 음미하면서 먹었다. 누가 옆에서 뺏어 먹었으면 진심 의절 각이었다. 단 며칠 만에 카스테라 하나에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라니 인간은 참 간사하고도 나약한 존재라는 걸, 그 순간 다시 한번 느꼈다.


검사 전날 장세정제 2통, 검사 당일 새벽 1통을 마셨는데 이때부터는 이제 본격적으로 화장실과 친구가 된다. (참고로 혹시라도 식사 전이라면 이 글을 읽지 않기를 권장한다.) 장세정제 복용하고 2시간 후부터 효과가 나타났고 거의 맑은 색이 될 때까지 계속 나온다. 그래도 잠은 충분하지는 않지만 잘 수 있는 시간은 됐다. 새벽에 일어나서 한통을 마시면 다시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한다. 집에서 병원까지 갈 때 어마무시한 일이 생기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체면을 지켜냈다.


언젠가 기술이 더 발전해 대장 내시경도 이런 준비 과정 없이 좀 더 쉽게 진단할 수 있는 기술이 빨리 나오면 좋겠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기다려진다. 그런 기술이 발전되지 않는다면 다음 대장내시경 때에도, 나의 유일한 희망은 '카스테라'일 것이다.

스크린샷 2025-07-29 오후 5.04.29.png 대장내시경 필수 준비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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