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저녁
처음 책에 흥미를 느끼고 읽은 것은 언제였을까? 아주 옛날 기억을 더듬어 보면 늘 ABC 문고가 떠오른다.
아마 국민학교 학생이었을 것이다. 그때 ABC 문고를 읽었다. 내게 처음으로 수십 권의 문고본이 주어졌으니 꽤 설렜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내가 다 소화하기에는 너무 많기도 해서 완독보다는 그저 내키는 구간만 읽었다. '우리 읍내'라는 희곡도 그때 보았다. 어째서인가 "스쳐 지나갈 때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여자"란 대목만 기억난다.(어쩌면 다른 책의 문구일지도 모른다) 난 그런 여자란 어떤 여자일까? 하고 굉장히 궁금했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1학년 때쯤 그게 어떤 여자인지 알게 되었다.
'콘티키'란 책도 그때 보았다. 난 이걸 소설로 알았는데,(나중에 알았는데 일종의 실험 기록에 가까운 글이었다) 너무 리얼해서 소설 같지가 않다고 생각했다. 옛 폴리네시안 종족들이 뗏목으로 태평양에서 아르헨티나 쪽으로 긴 항해를 한 문헌을 시작으로, 이는 불가능하다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박사가 직접 동료를 모아 고증대로 뗏목을 만들어 태평양을 횡단하는 이야기였다. 나무위키나 구글로 '콘티기'가 아니라 '콘티키'라는 것만 확인하고 아무것도 본 게 없는데 제법 쓸만한 기억이 난다. 물을 마실 때 바닷물을 일정 지분 섞으니 갈증이 딱 멈췄다는 대목이나, 바다 위 플랑크톤을 뜰채로 건져내 식량으로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식수는 뗏목 아래 대나무에 저장해두었다는 대목도 생각난다. 분명 청소년 축약본이었을 텐데, 꽤 많은 양이 쓰여 있던 게 기억난다. 아무래도 콘티키 만큼은 꽤 감명 깊게 읽었나 보다.
중학교 2학년. 친구 하나가 신기한 말을 했다.
중국 소설인데 한 거지가 섬으로 휘파람을 불며 찾아와 섬의 주인과 대결한다는 내용이었다. 휘파람과 피리, 거문고로 음악 대결을 한다나? 그런데 음악에 내공이란 게 담겨서 상대를 죽이거나 미치게 만들 수 있다는 황당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역사랑 잘 버무려서 만들었기에 역사 소설로 읽어도 좋다고 했다. 호기심에 한 권 샀는데, 18권을 다 사는데 한 4~5개월 걸렸던 거 같다. 아마 설날이 껴 있지 않았다면 더 걸렸을 것이다. 그렇게 소위 '무협 소설'인 김용의 영웅문 3부작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를 봤다. 샀기 때문에 반복해서 본 기억이 엄청나다. 수십 번은 반복해서 봤던 것 같다. 같이 살던 큰고모가 나중에 내가 집을 떠나 살게 되었을 때 조카가 자주 읽던 책이라 읽어보셨는데 끝까지 손을 놓지 못하고 재미나게 보셨다고 했다.
그 후 돈이 없던 나는 만화가게에서 무협지를 많이 읽을 수도 있고 빌려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만화가게, 대본소(도서 대여점)를 알아가며 푹 빠져서 봤다. 중학생 때는 수백 권도 넘게 읽었던 것 같다. 그러나 명작은 1할도 채 되지 않았고, 나머지는 그냥 킬링타임 용일 뿐이라 실망스러웠다.(이때 만화가게를 들르다 보니 많은 만화를 섭렵하던 시기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는 무협지를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걸 읽기보다는 영화와 영화음악에 빠졌던 시간이었다. 아마 중3 때부터 들었던 라디오의 영향일 것이다. '정은임의 영화음악'은 내게 교과서였고 친구였다. 그리고 매주 게스트로 나오는 정성일. 처음 나와서 "영화는 배우가 아니라 감독이 만드는 겁니다. 감독을 보세요." 하는 말이 기억난다. 아마 그 멘트 이후 그의 말은 모두 의심 없이 믿었던 것 같다. 지금도 영화나 네러티브에 관한 내 관점은 중,고등학교 때 지분이 지대할 것이다.
그러다가 소위 현대문학이라 불리는 소설도 보게 되었다. 글로 조각하는 게 매력이 있었고 시처럼 근사한 문장은 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때까지는 그렇게 많이 읽은 건 아니었으나, 전학해 온 한 친구가 영화를 좋아해서 친해졌는데 알고 보니 현대문학에 본격적으로 빠져 백일장까지 다니던 친구였다. 그 친구와 함께하며 고등학교 내내 많은 소설을 보았다. 신경숙, 황석영, 오정희, 이문열,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미 류... 여러 소설을 읽었다. 그중 어째선가 난 무라카미 하루키가 좋아서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만큼은 수십 번을 다시 읽었다. 영웅문 3부작 이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오랜만이었다. 현대문학의 시간은 대학을 지나 군대 초반까지 계속 이어졌다.(그때는 시와 희곡 등 두루두루 관심이 많았던 시기였다)
군대에서 상병 말 호봉 때 절벽에서 떨어졌다.
굴러떨어져서 죽지는 않았지만, 허리와 얼굴을 크게 다쳐서 3개월간 군 병원 신세를 졌다. 3개월이나 되다 보니 무료했는데, 1층 휴게소 작은 책장에는 어느 군인이든 빌릴 수 있는 책들이 있었다. 빌려보고 돌려주는 구조인데 금방 다른 손님이 와서 끝까지 읽기 힘든 소설이 하나 있어서 호기심에 한참 동안 기다려서 빌렸다. 그게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였고 그게 내가 본 첫 판타지 소설이었다.
드래곤 라자를 다 본 후 1층 책장에서 판타지 소설만 골라 가며 한 달 안에 다 읽었던 것 같다. 판타지는 중세를 배경으로 검과 마법, 드래곤과 마법사, 기사와 공주, 마왕과 용사 등 매력적인 소재가 가득했고 그 당시가 대한민국에 처음 판타지 소설들이 PC 통신을 통해 성장하던 시기라 명작이 많았다. 군대를 제대한 후에도 한동안 푹 빠져서 봤는데 무협지처럼 보다 보니 명작은 1할도 되지 않았고, 나머지는 시간 때우는 책이 많았다.
사랑도 하고 좌절도 하고 직장을 다니는 등 바쁘게 지냈는데 시간이 날 때마다 영화를 보거나 문학상을 받은 책을 읽었다. 잘 직조해 낸 옷을 바라보는 기분이 즐거웠던 것 같다. 하지만 직장을 다니면서 취미를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다.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던 시기였다.
....그러다가 10년 전쯤일까, 어느 사이트에서 소설을 연재하는 곳을 발견했다. 호기심으로 갔던 사이트에서 인기 많은 것 위주로 소설을 봤다. 그러다가 나중에 그 사이트를 핸드폰으로도 볼 수 있다는 걸 알았는데,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웹소설을 읽었던 것 같다. 장르는 다양했지만, 무협이나 판타지 중 나름 명작이라 생각되는 것 위주로 보았다. 가끔 종이책을 읽긴 했지만, 빈도는 점점 줄어들었고 웹소설, 혹은 YES24 디지털 북 같은 것으로 보기 시작했다.
나는 책을 읽는다. 아니다 읽지 않는다.
종이책은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탈 때 산 뒤로 사지 않았다. 종이책은 요즘 읽을 일이 없다. 그런데 또 지루한 것은 견디지 못한다. 화장실을 갈 때도 핸드폰이 함께 한다. 일할 때도 가끔 쉬는 시간에 볼 때가 있는 것 같다. 운동을 할 때도 핸드폰이다. 그런데 또 유튜브 쇼츠나 스트리밍 방송 같은 영상들은 자투리 시간일수록 보지 않는다. 자투리 시간은 늘 읽는다. 자투리 시간에 보기 마련이라 웹소설을 주로 읽지만, 가끔 디지털 북도 읽는다. 나름 까다로운 편이라서 재미는 기본이고 발상이 기발하거나 깊이가 있거나 매력적인 캐릭터가 없으면 읽지 않는다. 그래도 세상에 글 쓰는 인간들은 많아서 볼 게 없는 일은 없다. 음악을 듣기도 하는데(음악 이야기는 나중에 또 쓸 일이 있겠지.) 역시 나는 읽는 게 좋다. 나는 책을 읽는다.
하지만 무협 소설이나 판타지 소설을 읽는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부끄러운 건 아니고 매력도 있는데, 영 시원찮은 수준 미달인 책들도 많아서 그런지 말하기 좀 그렇다. 그래서 그냥 책을 안 본다고 말하는 편이다. 주변 사람들이 아는 나는 책을 읽지 않는다.
나와 주변과 책과 읽는다는 것. 일을 하고 다른 취미를 즐기기도 하고, 술을 마시고, 대화를 하는 매일. 또 읽는 것이 낙이기도 한 그런 매일. 나는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