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은 대상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동력으로 하는 결과적 표현
이 집을 처음 보러 왔을 때, 내가 반한 건 마당 만이 아니었다. 마당 가장자리를 가로두르는 화단이었다. 너른 마당도 아니고 시멘트로 올린 흙 속에 뿌리를 내린 그럴 듯한 대추나무와 포도류 나무로 추정되는 다른 작은 나무의 푸른 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에 나는 그만 정말 한 눈에 반해 버렸다. 하지만 내가 그런 모습에 반한 건 조금 의아한 일이다. 내가 정책만 담당하는 자리에 가야겠다고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의원실 화초 가꾸는 일에 대한 거부감이었기 때문이다.
나이 지긋한 여성 의원이었던 보스는 의원실 정돈에 신경을 썼고, 의원실 창가 앞에 일렬로 나란히 줄 지어 놓은 난과 화초에 물을 제 때 줬는지 체크했다. 의정활동과 하등 상관 없는 일에 내가 왜 이렇게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웠다. 나는 물 주는 시늉만 하면서 얼른 말라 죽어라 빌었다. 다음 국회에서 면접 볼 때 의원에게 나는 남자 의원과 일하고 싶다고 말했던 것도 화초 등 때문이었다. 어린 마음에 핵심이 아니라 의원실 살림 등 주변 일에 신경 쓰는 게 여성, 특히 기혼 여성의 성격이라고 탓했던 것이다.
이런 내가 변한 건 아무래도 나이 덕일까. 아이가 없는 영향도 있을 듯하다. 어쨌든 마치 교통사고처럼 또는 첫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기회로 나는 무언가를 키울 마음을 내게 되었고, 마침 계절이 늦가을이라 죽은 화초도 살려내는 솜씨를 가진 엄마가 심어둔 화초 몇 개를 화분에 옮겨 심어 실내 겨울 내 베란다에 두고 나름 돌보았다. 그렇게 매일 화초를 들여다 보면서 전에 모르던 마음을 발견한다. 간단하게는 아이를 돌보는 마음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있냐는 말처럼 정말 몇 개 되지 않아서인지 하나같이 마음 가지 않는 화분이 없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도 더 내 마음을 끄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잘 자라는 화분과 자꾸 시들해지는 듯한 화분이다. 그런 화분에는 아무래도 더 시선을 오래 멈추게 된다. 쑥쑥 잘 자라 가지를 하늘로 뻗으며 화려한 꽃을 활짝 피우면서 생기를 내뿜는 것들은 볼 때마다 뿌듯함으로 가슴을 가득 채운다. 자꾸 잎사귀가 누렇게 변하고 꽃잎도 누래지는 아이는 얘가 왜 이러는 걸까, 뭘 더 어떻게 해줘야 건강해질까 이렇게저렇게 안절부절 마음 쓰인다. 잘 자라는 녀석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고, 시들시들한 아이는 안타깝고 애틋하다. 나머지 아이들에게도 눈길을 매일 주지만, 아무래도 이 아이들만큼은 못하다. 미안하고 그래도 묵묵히 잘 자라주는 모습이 고맙다.
얼마 되지 않은 정말 초보지만, 이 아이들을 돌보면서 문득 '성실'에 대해서도 깨닫는 바가 있다. 사람부터 강아지나 고양이 그리고 식물까지 무언가를 돌보는 일은 기본적으로 내 관심과 에너지를 나누어야 하는 일로서 내 품 안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그에 대한 책임을 부과받게 된다. 물론, 나눠야 할 에너지와 책임의 무게는 각각 비교할 수 없이 다르지만, 어쨌든 그 책임을 다하는데 필요한 기본은 같은데 , 바로 성실이다.
화초가 최소한 시들어 죽지 않게 하려면, 제때 물을 줘야하고 또 햇볕을 쬐이도록 해 주어야 한다. 햇볕은 해가 가장 잘 드는 곳을 찾아 자리잡게 하면 끝이지만, 물은 그토록 단순하지 않다. 겨울엔 열흘에 한 번, 물 온도도 너무 차갑지 않게, 너무 많이 줘서도 안 되고 너무 적게 주어서도 안 된다. 내가 주고 싶을 때, 내 맘이 내키는 대로 주는 게 아니라 달력에 표시해 두고, 또 아이들 상태를 봐 가면서 줘야 한다. 화초가 싱싱하고 무럭무럭 자라면서 나를 기쁘게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먼저 화초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면서 그 니즈를 충족해야 하는, 즉 무게 중심이 나 아니라 화초에 있는 것이다.
소파에 누워서 화초를 바라보다가 물을 주려고 일어나기 싫은 몸을 일으킬 때 나는 내 모습에 새삼 놀랐다. '뭐야, 나 왜 이렇게 성실해?!' 내가 언제 이때만큼 성실했던 적이 있었던가. 학교 다닐 때 내가 좋든 아니든 공부해야 했지만, 나는 언뜻 고분고분해 보일 뿐 학생으로서 해야 할 일에 성실하지 않았다. 물론 직장 생활을 하면서는 부지기수로 내 호오와 아무 상관 없이 내게 부여된 업무를 이행하고 완수했지만, 그것은 그 과를 온전히 나만 감당하면 됐던 공부와 달리, 내가 하지 않으면 보스에게, 조직에게, 또 내 월급의 원천인 유권자에게 해를 입히는 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반강제적인 태도였다. 반면, 화초에 물을 주기 위해 몸의 나태함을 물리치는 건 그런 강제성과 다른 성질을 내포한다. 쉽게 말하면, 직장에서의 태도는 죽지 못해 갖았던 것이라면, 화초를 대하는 태도는 전혀 그렇지 않은 차이랄까. 후자는 그 대상에 대한 애정이 바탕하고 있다. 대상과 나라는 구체적이고 독립적인 관계 속에서 대상에 대한 깊은 관심과 응원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게 만든다. 성실이 단순히 부지런함과 구별되는 것은 바로 이 대상에 대한 참된 마음인 것이란 사실을 이제사 깨닫는 것이다.
무언가를 돌보는 일은 언뜻 귀찮은 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도 인간이 자꾸만 무언가를 돌보고자 하는 의지를 내는 건 아마도 이 참된 마음, 진심 어린 관심과 애정의 느낌이 어떤 것인지, 그 느낌에 온 몸을 흠뻑 적시고 싶어서 일지도 모른다.
2021.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