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자상한 억압'
축구에 대한 반응을 보면서 느낀 점 두 가지 (1)
경기가 끝날 때마다 한국 선수 가운데는 눈물을 뚝뚝 흘리는 사람이 꼭 있다. 세계 유수의 스카우터들이 지켜보는 자리인 만큼 자기 기량을 제대로 평가 받아야 하는데 잘 못해서 우는 건지, 왜 우는 건지 모르겠다. 남미나 유럽 선수 가운데도 축구 졌다고 우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하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눈물이 날 때 우는 건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위로한답시고 한구인이 흔히 하는 말, '울지마' 이건 정말 바뀌어야 한다. 이것은 위로를 빙자한 억압이다. 슬프고 억울하고, 또는 왜 우는지 몰겠지만, 아무튼 당사자는 눈물이 난다면 울어야 한다! 우는 사람 앞에서 안쓰러워 하면서 다정하게 '울지마'라고 하는 건 일단 상대가 왜 우는지 잘 모르는 상태일 가능성이 크다. 그가 왜 우는지도 모르면서 어줍잖이 위로한답시고 남의 감정을 두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모습은 '자상한 억압'이다.
한국인은 이 '자상한 억압'을 아무 거리낌 없이 서로서로 마구 휘두른다. 이런 태도는 눈물을 유발하는 '슬픔' '고난' '고통'을 금기시하는 생각 때문이다. 인간은, 한국인은 항상 행복에 겨워 웃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야 보는 사람도 마음 편하고 즐겁다. 하지만, 이런 삶이 가능한가? 가능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삶이 바람직한가? 이렇게 살면 사는 맛이 날까?
슬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인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타인도, 자식도, 가족도 모두가 그런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과 그런 환경을 이상적이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우는 사람 앞에서 자상하게 '울지마'라고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위선과 폭력을 느낀다. 이를 바람직하고 흐뭇하게 보는 사람들은 또 어떠한가.
뚝뚝 떨어지는 눈물, 가슴에서 뭔가 북받쳐서 터져나오는 반응을 공감한답시고, 위로한답시고 '자상하게 억압'하도록 유도하는 연습을 하다 보면, 그 당사자는 점점 자기 자신과 멀어진다. 그것이 슬픔이든, 기쁨이든, 분노든, 실망이든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은 이유가 있어서다. 인간은 그것을 직면할 때 자기 자신을 만난다. 그런 감정은 내 안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슬픔, 기쁨, 분노, 실망, 크게 이렇게 네 가지 감정이 있다면 한국인이 흔히 있는 그대로 표현하도록 허용하는 감정은 기쁨 뿐이다. 때에 따라서 간혹 실망 정도까지는 허용한다. 하지만, 슬픔이나 분노는 스스로 자각하는 즉시 억누르려고 한다. 물론, 이를 억누르지 않는 사람도 있다. 슬픔 같은 경우는 아이들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분노 같은 경우는 감정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데서나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분노 같은 경우, 대개 누군가를 원망하는 대상에게 드러내는데, 자기 감정에 솔직한 태도는 스스로 그 감정을 직면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지 그 대상에게 함부로 마음껏 분노를 쏟아내라는 의미가 아니다.)
어린 아이는 이런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그런데, 주위에서 이것을 억압한다. 부모가, 선생님이, 친구들이 사회 생활을 위한 태도를 가르치기 위해 울지마, 실망하지마, 힘내 라는 말을 하면서 당사자가 자기 감정을 제대로 살펴보기 전에 얼른 감추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대개 우리는 어릴 때부터 그런 태도를 연습하고, 이것이 내면화 돼 커서는 스스로 이런 감정을 억압한다. 그러면, 일단 사회에서는 불만스러워 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따라서 사회 생활은 잘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기 자신과는 점점 멀어진다.
우리는 더 이상 이런 식의 '자상한 억압'을 멈춰야 한다.
하도 습관이 되다 보니, 이런 태도는 '하기 싫은 일'을 만났을 때도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얼른 '하기 싫어 하면 안 돼!' '해야 돼!'라며 다그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더 벼랑으로 내 몬다. 스스로! 하기 싫은 마음이든, 슬픔이든, 분노든 이를 제대로 직시하고 가장 먼저 위로하고 격려해야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주위 사람들이 할 일은 얼른 그렇게 하라고 다그칠 게 아니라 그가 스스로 위로하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지켜보고 기다리며 믿어주는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