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은 없다
부모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자식의 ‘희생’적 효도는 시대가 바뀌면서 따라서 바뀌었다. 신분이 해체되면서 사회적 성공의 문이 모두에게 활짝 열리자 자식의 잠재적 유용성이 압도적으로 커졌다. 부모는 아이에게 과도하게 투자하기 시작했고, 그 부담은 자식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을 수 있다는 부모의 ‘희생’적 양육으로 변했다. 이제 효도는 부모의 희생에 보답해야 한다는 일종의 채무다.
그리고 최근에는 또다시, 부모에게 아이의 잠재적 효용성이 급속도로 낮아지고 있다. 사회적 환경 변화와 요구 등으로 아이를 키울 부모의 자질 요구 및 아이에 대한 투입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데 한편으로는 아이에 대한 인권 의식, 개인주의 가치관이 심화되면서 아이 양육으로 부모가 얻는 물질적, 심리적 이익은 급속도로 작아지고 있다. 이런 변화 때문에 부모의 ‘희생’은 상대적으로 더욱 커지고, 그에 따라 자식의 효도 채무도 커지고 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러는(이렇게 사는) 건데, 다 너 잘 되라고 이러는 거 아니니?!”
“누가 낳아달라고 했어?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거냐고! 엄마(아빠)가 낳고 싶어서 낳은 거잖아!”
서로를 위해 ‘희생’하는 ‘착한’ 사람들은 서로를 위하는 그 간절한 마음만큼 불행하다. 그 ‘희생’하는 착한 마음은 원망의 화살이 되어 사랑하는 가족에게 날아가고, 또 되돌아온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결과다. ‘희생’이란 원래 실체가 없는 것으로 집단 이익을 위한 위선적 포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밝힌 바에 따르면, ‘희생’은 원래 고대 신에게 제물을 받치면서 생긴 집단 콤플렉스에서 유래한 것이다. 희생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sacrifice의 또 다른 의미가 ‘제물’이며, 또한 이 단어가 신성한이란 뜻인 sacred에서 파생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신의 가호를 받으려는 집단 이익을 위해 어떤 한 생명을 살아있는 채로 신에게 받치는 의식을 치르면서 그 구성원 무의식 깊은 곳에 집단 죄의식을 남겼다. 제물이 된 사람의 태도나 삶을 타인을 위한 헌신, 숭고한 희생이라고 추앙하는 건 그 죄책감과 그로 인한 공포감에서 스스로 벗어나려는 방어기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제물이 되는 사람은 억울하고 원통해 하며 마지못해 제단에 올랐을까? 고대 신에게 받쳐질 제물로 선정되는 사람은 어땠을까? 멕시코 칸쿤에 있는 마야 유적지 치첸이트사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여겨지는 쿠쿨칸 피라미드가 있다. 고대 종교 의식을 거행하던 신전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구기장이 있다. 신전 옆에 있는 그런 큰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공식적인 경기는 종교 의식의 연장이었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경기는 신에게 바칠 제물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고, 제물은 경기를 뛰었던 선수 가운데 한 명의 심장이었다.
그렇다면, 현대인은 당연히 경기에서 진 팀원 가운데 하나가 제물이 되리라 생각할 테다. 그런데, 진 팀이 아니라 이긴 팀,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크게 활약한 사람 심장을 제물로 선택했다. 그러면 또, 누가 이기려고 하겠나, 과연 누가 열심히 뛰려고 하겠나 싶다. 고대 사람들은 서로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에게 신의 제물이 되는 건 처벌이 아니라 가장 큰 영광이었다.
봉건 시대나 오늘날 ‘희생’은 여성이나 어린 아이, 자녀 같은 상대적 약자의 몫이지만, ‘희생’이란 단어의 기원을 제공한 고대인의 종교 의식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인이 명절 제사 음식을 마련할 때 가장 좋은 재료로 정성껏 만든 최상품을 상에 올리듯이 집단과 자기 자신, 자기 정체성을 동일하게 여기던 집단주의 사회에서는 집단을 위해, 그리고 그 집단을 지키는 신에게 자기를 바칠 기회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인물만 누릴 수 있는 명예였다. 제물이 되는 당사자로서는 가장 영광을 누리는 일이었던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누군가를 위한 ‘희생’이란 없다. 그것은 자기 이익을 숨기려는 포장, 즉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다. 희생량이든 그 희생을 숭고한 것이라고 치켜세우는 사람들이든. 그런 면에서 어쩌면 ‘희생’은 자기 이익 추구를 죄악시하는 사회가 만들어낸 발명품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