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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위해 헌신한 엄마의 절규(1)

자아도취적 만족을 사랑으로 착각하다

by 홍주현

“내가 걔를 어떻게 키웠는데… 걔를 위해 내 모든 걸 다 헌신했는데…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 어떻게…”

오늘날 거의 모든 부모가 자식에게 열과 성을 다한다. 그녀도 그랬다. 하나밖에 없는 딸을 말 그대로 몸이 부서져라 돌봤다.


“우리 집에는 라면 없어요. 라면, 피자, 치킨… 아이에게 어떻게 그런 걸 먹어요. 아니, 저도 가끔 주기는 하지만 저는 다 제가 만들어줘요. 요즘 구하지 못하는 재료도 없고 성의만 있으면 얼마든지 엄마가 할 수 있는 음식들이에요. 아이를 생각하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어떻게 저 편하자고 사다 먹여요. 뭐가 들었는지 어떻게 알고.”

그녀 집 부엌에는 별별 요리 관련 가전제품이 다 있다. 거기서 그녀가 하는 요리는 전부 오직 딸을 위한 것이었다. 남편은 별로 안중에 없었다. 아침 일찍 나갔다가 매일 야근이나 회식으로 밤늦게 들어오기에 한집에 살아도 얼굴 볼 일이 없었다. 게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 꼭 만나려고 하는 시부모 뜻을 달래지 못해 주말엔 늘 시댁에 가 있었는데 집에 돌아오면 남편이 더 미웠다. 시댁 가족과 그녀 사이 불편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남편은 나 몰라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늘 아이와 함께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는 급격히 쇠약해지 시작했는데, 그런데도 아이와 한시도 떨어지지 못했다. 아이가 대여섯 살 때 쯤 친구와 여행을 간 적 있는데 거기서도 힘들어하자 친구가 대신 아이를 봐 줄 테니 쉬라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이가 그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 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모습은 마치 한 두 살짜리 영아와 비슷해 보인다. 아기는 양육자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하면서 칭얼대거나 울면서 양육자를 찾는다. 정신분석가 마가렛 말러Margaret Mahler에 의하면, 이는 아기가 부모(양육자)와 자기 자신을 구분하지 못하는 ‘무의식적 동일시’ 때문이다.


부모와 아이 사이에서 ‘무의식적 동일시’는 일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이가 부모, 특히 엄마와 자기 자신을 구분하지 못하듯 엄마도 아이와 자기 자신을 분리하지 못한다. 엄마를 따뜻함, 만족과 안전이며 자기 자신이라고 느끼듯 엄마도 아이를 자기 일부라고 느낀다. 자녀를 보호하고 양육하면서 생긴 이러한 부모의 동일시는 스스로 의식적으로 멈추지 않는 한 지속되는 경향이 크다.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부모와 아이, 아이와 부모가 서로를 분리하지 못하는 모습에 대해서 프로이트의 표현을 빌려 설명한 바에 따르면, 이때 자녀를 향한 부모의 애정은 일종의 ‘자아도취’적 만족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 딸 별명이 ‘팔방미인’이었어요. 피아노면 피아노, 노래면 노래, 미술이면 미술, 발레면 발레 뭐든 가르치기만 하면 못하는 게 없는 아이거든요. 공부는 기본이고요. 학부형들이나 이웃집 엄마들이 항상 그랬어요. ‘아니 그 집 딸은 어떻게 그렇게 못하는 게 없어. 천재 아니야?’ 그러니 제가 뒷바라지를 어떻게 안 하겠어요. 그건 직무유기죠.”

아이가 학창시절 내내 일등을 놓치지 않았던 이유는 비단 아이 머리가 좋아서라든가 아이가 열심히 해서만이 아니었다. 예체능 교습부터 학과목 공부까지 최고라는 선생에게 고액과외를 시켰다. 단지 좋은 선생을 찾아 거금을 들인 것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부터 교습 장소까지 데려다주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렸다가 다시 데리고 왔다. 그녀에게 자기 시간이란 건 없었다. 딸에게 쏟아 붓는 모든 노력이 곧 그녀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딸은 장학금을 받고 최고 명문대학교에 입학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는 뛸 뜻이 기뻐 주변 사람들에게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너희 애는 어디 갔니? 뭐? 어디라고? 우리 애는 글쎄 ○○ 대학에 합격했어!” 딸이 멍하니 서 있는 게 곁눈으로 보였지만, 얘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딸은 대학 생활을 만끽하는 것처럼 보였다. 조별 숙제, 공부 등 각종 활동을 한다며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날이 많았고, 엠티를 간다며 종종 외박하는 날도 있었다. 술에 잔뜩 취해 인사불성이 된 채 오는 날도 잦았다. 그녀는 걱정했고, 그럴 때마다 다퉜다.

“대체 왜 그러니? 넌 엄마에게 최고의 자랑거리였는데…”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고, 그러면 딸은 화를 참을 수 없는 듯 엄마에게 소리쳤다.

“상관 좀 하지 마! 엄마는 엄마 인생 좀 살아! 이제 내 인생에서 좀 사라지란 말이야!”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너를 위해 내 모든 걸 다 받쳤는데… 어떻게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해… 어떻게…” 큰 충격을 받은 듯한 그녀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딸은 매몰차게 말했다.


“명문대 가줬으면 된 거 아냐? 엄마는 내 공부, 성적, 대학에 관심 있는 거지 나한테는 관심 없잖아. 엄마가 내게 궁금해 하는 건 항상 그런 거였잖아. 대학 합격했단 얘기했을 때도 나보다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게 먼저였잖아?! 이제 그만하자! 내가 엄마 (학력) 콤플렉스 해결해 줬으니까, 이제 그만 각자 인생 살자!”

딸은 며칠 후 기숙사에 들어가겠다며 집을 나갔다. 동생이나 아빠에게 안부를 전할 뿐 엄마를 멀리했다. 그녀는 엄청난 허무감에 빠졌다. 좌절했다가 딸을 엄청나게 미워하다가 문득 죄책감에 반성하다가 다시 딸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반복했다.


상대를 자기 일부로 느끼는 한 그 사랑은 자아도취적 만족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때 부모는 아이를 통해 세 가지 욕구를 해소시킬 수 있다고 프롬은 지적한다. 지배욕과 소유욕 그리고 창조 욕구다. 아이는 무력하다.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고는 생존하지 못한다. 부모에게 완전히 종속된 존재로서 아이는 부모에게 절대 복종한다. 떼를 쓰거나 뜬금없이 또는 과한 애교를 부리는 건 때로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받기 위한 아이 나름의 전략이다. 그런 아이를 보면서 슬그머니 우월감이나 권력이 주는 만족감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아이는 부모 자신이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상으로 삼기에도 손색없다. 아이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점을 발견할 때마다 엄마와 아빠는 각자 자신이 만들어 낸 것 같은 이 놀라운 생명체가 흐뭇해 어쩔 줄 모른다. 그녀 역시 아이가 가ㄹ쳐주는 것을 잘 해낼 때 지배욕을, 자기 아이를 ‘팔방미인’이라며 주위에서 칭찬할 때 소유욕을, 그리고 좋은 학교에 갔을 때 창조욕구를 충족했던 것이다.


아이에게서 이런 만족을 느끼는 현상이 옳지 않다거나 잘못된 건 아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다만, 이런 욕구 만족에 빠져 있거나 또는 이런 자기 본능을 아이에 대한 사랑으로 착각하는 것이 문제다. 그 욕구 만족에 도취돼 아이를 몰아붙이는 것이다. 이 때 아이는 부모의 자기 욕구 해소를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본인은 애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아이는 그 애정의 실체를 눈치 챈다. 자기를 부모의 자기 욕구 만족을 위한 도구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다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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