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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평화 속에서 서서히 질식당하는 가족

갈등을 가족의 존립 위협으로 여기다

by 홍주현

화가 나면 입을 닫아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대학 동창 가운데 캠퍼스 커플이었던 부부가 그런 경우다. 이 부부는 여자가 약간 예민하고 완벽주의 성향이 있는 반면, 남자는 털털하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성격이다. 그래서인지 주로 여자가 남자에게 화가 나는 일이 많고, 그때마다 몇 날 며칠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덕분에 이 집은 언제나 평화로운 듯 조용했다. 언젠가 여자인 친구, 즉 아내가 말했다.


“화가 나면 아무 말 하고 싶지 않아. 정말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하는데, 처음엔 황당하고 어이없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그러다가 화가 나는데 그 땐 또 화가 나서 말하고 싶지 않은 거야. 근데 내가 그러면 더 긴장하는지 더 실수를 해. 내 눈에 미워서 더 실수처럼 보이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러면 나는 또 더 화가 나고. 그 땐 내가 입을 열면 무슨 심한 말이 나올지 모르겠어서 더 아무 말도 못하겠어. 그게 몇 날 며칠을 가는 거야. 나 혼자 속으로 화를 있는 대로 끝까지 내다가 제 풀에 꺾이는데, 앙금이 남는지 남편에 대한 감정이 자꾸 쌓이는 것 같아.”


그 얘길 들으면서 내 남편 생각이 났다. 남편도 다투다가 화가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그 때부터 입을 딱 다물고 동굴로 들어가 버린다. 반면 나는 서로 얘기하길 원한다. 그래서 처음엔 남편의 반응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를 말하게 하려고 무진장 애썼다. 화내면서 따지다가, 묵묵부답에 지쳐 가만히 있다가, 또 달려가서 애원하기도 하는 등 이런저런 방법을 썼다. 마치 벽을 보고 얘기하는 것 같은 기분이 그와 같을 것이다. 입을 그토록 꾹 다무는 데는 나름 이유가 있겠지만, 갈등이 해결되지 않았는데 그러면 상대방은 마치 커다란 불씨를 혼자 떠안은 채 차갑게 닫힌 셔터문 앞에 버려진 느낌이다. 대화를 거부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공격이다. 아마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된다면 상대방은 무척 힘들고 위축될 것이다.


“집에 들어가면 마음이 편치 않아. 뭔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거나 화나거나 짜증나면 말을 하지 않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풀어주려고 노력했는데 그래서 습관이 된 걸까? 며칠 동안 말을 안 하다가 항상 내가 눈치껏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어야 돼. 좀 풀어진 것 같아서 왜 그랬는지 물어보면 말을 돌려버려. 내가 잘못한 거면 나는 왜 그랬을지 내 입장도 한 번 이해하려고 하고, 자기가 원하는 걸 내가 해 줄 수 있는지 맞춰봐야 될 거 아냐. 숨 막혀. 점점 무슨 일을 해도 자신이 없고 마음이 위축돼. 아내를 자꾸 피하게 되고.”


화가 극에 달해서 거친 말이나 행동을 할 것 같을 때는 극단적 상황이 되는 걸 피하기 위해 잠시 입을 다물고 자리를 피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처음에 그저 마음에 안 들 때 또는 나중에 화가 풀어졌을 때에도 자기 의사를 표현하지 않으면 그 역시 상황을 악화시킨다. 화에 못 이겨 거친 말이나 행동을 할 때만큼 해롭다. 자기가 원하는 걸 말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개선되지 않고, 그러면 또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단 생각에 원망이 커진다. 시간이 지나 저절로 화가 풀려도 남편에 대한 감정이 자꾸 쌓이는 이유일 테다.


한편, 말을 하지 않는 배우자 기분을 무조건 풀어주려고 하며 눈치를 보는 것 역시 결과적으로는 그 침묵을 부추기고, 오히려 상대가 말할 기회를 차단하는 역효과까지 가져올 수 있다. 그런 반응은 본의 아니게 배우자의 침묵에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화를 참고, 그런 상대 기분에 자신을 무조건 맞추려고 하는 이런 태도의 밑바탕에는 두려움이 깔려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자기 요구를 말로 잘 표현하지 못할지도 모르고, 그래서 상대 요구만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 같은 것이다. 갈등의 책임을 자기가 다 떠맡게 되는 상황을 피하려는 일종의 책임 회피 행동이다. 화가 난 자기 상태와 원인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또 그런 상대에게 무조건 맞추려고 함으로써 문제를 외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기만적 의도만 숨어있는 게 아니다. 그에 앞서는 것은 가족을 위한 선한 의도다. 우울증이나 상대에 대한 애정, 어린 시절 가정환경에 따른 영향 등 개인적 원인은 각각 다를 수 있지만, 부부가 이렇게 자기 욕구를 억누르는 공통적인 이유는 무엇보다 가족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나름대로 희생적 노력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부부가 서로 다르다는 것, 서로 다른 바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갈등이 심해지면 가정의 평화가 깨질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런 선한 의도는 부부 사이에서만 발현되는 것이 아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발동된다. 고등학교 다닐 때 나는 가족에게 불만이 많았다. 그 때 내 일기장을 보면, 온통 엄마 아빠 그리고 내가 너무나 귀여워하고 좋아하던 동생에 대한 불만이 한 가득이다. 그런데, 나만 그랬던 건 아닌 듯하다. 지금까지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은 방과 후 집에서 전화통을 한 시간 씩 붙잡고 서로 자기 가족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으면서 공감했던 아이들이다.


지금 돌아보면 가족에게 미안하고 스스로도 머쓱한 모습이지만, 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정신 발달 과정이다. 어린 아이에게 가장 이상적이고 완벽한 영웅이었던 부모, 그 부모가 들려주는 이상적이고 단순한 동화 같은 세상일에 대해서 의심하고 따지고 비판하면서 현실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심리학자 장 피아제의 인지 발달 단계에 따르면, 이런 모습은 ‘형식적 조작기’에 해당한다. 아동기 사고 습관에서 벗어나 종합적 사고와 논리적 이해가 가능해지는 단계라고 한다. 그 과정에서 세상, 특히 부모 형제 같은 가족을 삐딱한 시선으로 보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를 ‘아비 부정’이라고도 했다. 어른이 돼 홀로 서서 자기 삶을 일궈가려면 누구나 부모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비단 물리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그렇다. 지금까지 내 보호막이었던 세계를 완강하게 부정할수록 거기서 벗어나고픈 욕망과 의지를 갖게 되고, 이를 실천함으로써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분고분 착하기만 하던 아이가 가족을 판단하고 비난하며 도전적 태도를 보이는 이런 변화를 부모는 대개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전문가들은 대개 이런 부모의 반응에 대해서 부모 자신의 권위에 대한 자녀의 도전으로 보고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비단 그것 때문만이 아니다. 부부 사이에서 한쪽은 화를 참고 다른 한쪽은 그런 상대 기분에 자신을 맞추려고 하는 행동의 바탕인 그 선한 의도가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화가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배우자의 기분에 자기를 맞추려고 하듯이 부모에게 자식을 맞추게 만들기 위해서 부모와 다른 태도, 판단, 행동을 허용하지 않는 이유도 있는 것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어떤 집단의 존엄과 존재 이유를 ‘집단적 동일성’에 둘 때 그 집단 구성원은 갈등을 견디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공동체 질서를 이루는 토대가 공동체의 동일성, 즉 (어떤 특정) 동일성이라는 가치에 따라 서로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사람들이 느끼면, 외부에서 유입된 것이든 내부에서 생성된 것이든, 집단을 존속하기 위해 사람들은 집단 구성원 주류 또는 다수와 ‘다름’을 배제하거나 억압하는 방법으로 그 ‘다름’이 유발한 갈등을 해결하려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서로 같아서 함께 사는 것이라 여긴다면, 그런 공동체에서 ‘다름’은 쉽사리 무질서와 갈등으로 비화되고, 나아가 격렬한 다툼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를 원만하게 다루는 방법을 알기는커녕 견디지 못할 정도로 불편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런 상황에 처할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다름’이나 갈등을 아예 금기시하게 된다. 이에 의하면, 한국인이 왜 특히, 다른 의견을 쉽사리 그저 ‘다름’이 아닌 ‘공격’으로 받아들이는지 이해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왜 특히, 서로 다른 의견, 서로 다른 입장에 선 사람들로 인해 생기는 갈등이 쉽사리 격렬한 투쟁으로 악화되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위대한 한민족’이라면서 한국이라는 국가 공동체의 토대를 ‘같은 민족’에 두는 성향이 다른 의견,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을 위협적 존재로 느끼는 것이다.


공동체 형성 근간을 집단 구성원 사이 동일성, 서로 같은 특별한 뭔가를 공유하는 특별한 관계라고 느끼는데 두는 것은 가족을 빼 놓을 수 없다. ‘한민족’이란 단어 역시 피와 살을 나눈 육체적 공통점을 강조하는 표현인데 가족은 그 차원에서 벗어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혈연적 특징이라 하면 ‘민족’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특별하고 끈끈한 사이다. 그냥 한 몸이나 마찬가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이런 집단 안에서 다른 의견, 다른 욕구를 들어내는 것, 그로 인한 갈등은 그 집단의 존재 위협 자체다. 아이가 야기하는 것이든 부부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든 가족 사이 갈등은 가족 구성원, 특히 어른인 부모 또는 부부 자신에게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존엄을 훼손하려는 시도, 즉 가족 집단의 존립 위협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사회든 가족이든 이런 집단은 갈등을 변화에 필요한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크게 잘못된 심각한 문제 또는 악으로 받아들인다. 세넷에 의하면, 가족에서는 부부 사이, 부모 자식 사이, 또 형제자매 사이 다툼이나 성격에 따른 불화 등을 뭔가 문제 있는 가족의 표시라고 여긴다. 이런 관념은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이나 다툼에 대해서 구성원이 죄책감을 갖는 현상으로 이어진다. 이 죄책감이 자기 비하로 이어지면, 반성을 넘어 강박적으로 자기 자신을 책망하는 ‘갈등에 대한 죄책감 증후군’이다.


소위 혈육이라는, 서로 같은 존재라는 생각을 바탕에 두고 가족 질서를 유지하려는 시도는 생물학적 차이뿐만 아니라 성격, 취향, 생각, 욕망 같은 개인적 차이마저 무시하게 된다고 세넷은 지적한다. 서로에 대해서 가족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당연하게 믿지만, 오히려 가족이라서 서로에 대해서 더 모르는 게 사실이다. ‘우리’는 가족이니까 그 구성원은 다 나와 같을 것이고 같아야 한다고 넘겨짚기 쉽기 때문이다. 한편, (가족)집단과 다른 자기(개인)만의 독특한 특징을 이해받지 못하고 부정당하면 그 구성원은 자존감과 만족감을 갖기 어렵다. 가족 사이 돈독한 유대를 강화하려는 의도가 오히려 갈등을 회피하거나 억압함으로써 가족을 파괴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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