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의 등장
“방에서 거실로 나가면 곧바로 엄마가 나를 훑어보는 시선이 느껴져요. ‘너 왜 그거 입었어? 그 옷, 별로야. 색깔이 너무 칙칙해. 네 얼굴에 안 맞아. 젊은 애가 좀 밝고 화사하게 입어.’라는 목소리가 어김없이 들려와요. 밤에 뭘 좀 먹으려고 냉장고 문을 열기만 하면, ‘너 운동은 하니? 몸무게 몇 킬로그램이야? 요즘엔 살찌면 안 돼. 자기 관리 못하는 게으른 사람처럼 보여.’라고 제게 말하고요.”
20대 후반의 한 여성은 학교 다닐 때부터 방 정리해 준다면서 물건을 뒤져서 자기 일거수일투족에 간섭하더니 지금까지도 그런다고 호소한다. 심지어 남자 친구, 진로, 결혼 문제까지 꼬치꼬치 캐묻고, 궁금하지도 않은 엄마 의견을 말하면서 ‘지시’하려고 한다며, 집에 들어가기가 무섭다고 했다. 그런데, 집이 아니라 직장생활에서 이와 비슷한 고충을 토로하는 사람도 있다.
“제 얼굴에 약간 트러블이 있고, 몸이 비민인 편이긴 하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니에요. 통통 하달까 덩치가 좀 있는 편이랄까, 그 정도거든요. 아침에 제가 밥을 못 먹고 나와서 출근하고 나서 에너지 바나 초코바 같은 걸로 때우는데, 아침마다 저만 보면 그걸 갖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오십대 초반 정도 되는 사람인데, 얼마 전엔 제 배 나온 거 보면서 ‘그만 먹어라, 살 빼라, 인스턴트 패스트푸드 먹지 마라. 그런 거 먹으니 얼굴에도 자꾸 뭐 나는 거 아니냐’ 그러는 거예요. 참고 참다가 그때 폭발해서 큰 소리로 ‘알았다고요!’하면서 신경질 적으로 대답했어요. 그랬더니 뭐라는 줄 아세요? ‘다 너 생각해서 그러는데 왜 그러냐. 태도가 그게 뭐냐. 잔소리 듣기 싫으면 네가 그렇게 만들지 마라’ 이러더라고요!”
20대 중반의 한 직장 남성은 70대 이상 어르신은 예의 바르고 반말을 해도 자상하게 말하는데, 오히려 그 이하 나이의 사람들이 사리판단을 못하는 것 같다고, 어느 소셜 미디어에 울분을 토했다. 그런 사람이라도 자상하고 예의바르고 털털한 사람에게는 자기도 모르게 깍듯한 자세가 나오는데, 여기가 직장인지, 집인지 친구들 모임인지 공사 구분 못하고 아무렇게나 말하는 사람에게는 계급장, 나이딱지, 성별딱지 다 떼버리고 싸우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이다. 소위 꼰대다.
‘꼰대’라는 단어는 몇 해 전부터 자기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의미로 변형 돼 새로이 등장했다. 대체적으로 꼽는 꼰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요즘 젊은 사람들은 ~”, “내가 ○○했을 때는 ~”이란 말을 하면서 부탁받지 않은 조언이나 충고를 하는 태도다. 이들 가운데는 악의를 갖고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하나 같이 그와 같은 일이나 상황을 먼저 경험한 선배로서 아직 모든 게 새로운 경험일 후배에게 자기와 같은 실수나 실패를 피하거나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려는 ‘선한’ 의도를 갖고 있다. 마치 Mother knows best!라고 선언하는 부모와 비슷하다. 부탁하지 않은 조언과 충고를 먼저 해주는 것이다.
‘공동 과제’와 ‘중성 과제’를 구분하지 못하고, 또 서툴고 위태로워 보이는 젊은이를 믿고 기다리지 못해서 무작위로 이루어지는 지적은 선배나 부모 입장에서는 조언과 충고지만, 후배나 자식 입장에서는 간섭이다. 이 간섭은 옷이나 먹는 것 같은 사소한 잔소리로서 그저 귀찮은 정도에 그치는 게 아니다. 후배나 자식에게 이런 조언과 충고는 ‘경험할 기회’를 가로막는 권리 박탈이 된다. 내가 선택한 것이 부모 마음에 바람직하지 않은 선택일 때마다 그것보다 이것이 더 좋더라는 선의의 조언과 충고를 하고, 자식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부모(선배)가 이미 해 봐서 안 다며 강요하는 것은 흡사 폭력과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부모(선배)가 이미 해 봐서 안 다는 말 앞에서 자녀 또는 후배는 더 이상 반박할 방패가 없다. 이미 해 봐서 안다고 확신하는 사람을 도대체 무엇으로 설득하겠는가. 그런 말 앞에서 부모 또는 선배가 알려주는 것 아닌 다른 경험을 하고자 하는 자녀 또는 후배는 그저 그들보다 늦게 태어난 게 죄다. 자신이 바꿀 수 없는 조건을 약점으로 잡아 일방적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역시 폭력 아닐까.
‘경험할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은 자기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과 같다. 인간은 경험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행복하든 불행해지든 부모나 선배가 기뻐하든 슬퍼하던, 자기 욕구에 따라 스스로 어떤 경험을 할지 선택하고 그것을 실행하면서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을 느낄 때 ‘자존감’을 가질 수 있다. 요즘 자존감에 그토록 목말라하는 사람들과 꼰대질의 주요 대상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꼰대’가 사회적 단어가 된 배경을 대개 나이 등으로 서열화하는 동양적 사고를 거부하는 사회적 변화 현상이라고 설명하지만, 이는 어쩌면 ‘개인’이 생존하기 위한 표현적 저항일지도 모른다. Mother knows best라고 말하는 부모를 겨우 벗어난 곳이 The olders knows best라고 말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면, 절망 그 자체가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