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정치
자유란 무엇인가? 흔히 자유란 하고 싶은 것을, 그 의지를 꺾는 어떤 구속 없이 마음껏 할 수 있는 상태라고 여긴다. 자칫 방종과 혼동하기 쉽다. 그래서 자유 뒤에 꼭 책임이라는 단어를 덧붙인다. 철학으로 정의해 보자면, "자유와 친구의 어원이 같은 인도게르만어를 빌려 (p.12) 진정한 자유를 느끼는 상태를 타인과 행복하게 공존할 때라고 저자는 말한다. 마르크스도 자유를 자기 소질을 모든 방향으로 온전히 발전시킬 수 있는 수단을 획득하는 상태라고 본다. 그래서 공동체 안에서 개인의 자유가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즉, 타인과 함께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자유다."
인류는 수많은 약자의 피를 대가로 자유와 평등을 쟁취했다. 새로운 것을 만들고 발견하고 많은 사람이 그것들을 같이 누렸으면 하는 인간의 욕구는 기술/발명으로 실현되고 있으며 기술은 자연스럽게 자본주의를 탄생시켰다. 자본과 기술의 발달로 인해 많은 사람이 노동에서 해방되었고 여성, 노인, 장애우, 어린이 등 많은 약자의 인권이 향상되었다.
‘돈이 돈을 부른다.’는 말이 있다. 그러려면 돈을 부를 돈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서 재테크의 기본은 종자돈 마련이다. 종자돈이 될 때까지는 최대한 절약, 저축할 것을 강조한다. 그래야 주식이든, 부동산이든 재테크를 시작할 수 있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경제체제가 자본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직후 자본은 자본을 모아야 했다. 과도한 생산량을 산출할 만큼 자본력과 기술력이 충분하지도 못했거니와 자본을 모으기 위해서 사람들의 소비를 억제해야 했다. 소비란 곧 욕망이라는 점에서 소비 억제 장려는 곧 금욕적 사회 분위기로 이어졌다.
자본이 충분히 모이자 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한 기술과 함께 끊임없이 상품을 생산한다. 누군가 그 생산품을 사야 자본주의 체제가 굴러간다. 이제 사회는 금욕적 통제가 아니라 욕망의 자유를 허용하고 부추긴다. 무엇이든 욕망대로 할 수 있는 자유 그리고 욕망이라는 감정, 기분이 중요하다. 이제 많은 연구자들이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기보다는 감정적 동물이라는 결과를 내놓고 있으며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워진 사회는 인간의 감정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자본은 제약을 받으면 성장할 수 없고 성장하지 못하는 자본은 곧 죽는다. 따라서 자유가 중요하다. 우리에게 자유를 가져다 준 것은 기실 자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은 우리를 규율하거나 제약할 수 있는 주체도 사라졌다. 한편, 물질적 생산이 포화 단계에 이르자 생산 양식은 비물질적(서비스 산업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비물질적 생산 양식에서는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중요하다.
아무도 우리를 제약하지 않는 상태에서 "비물질적 생산 양식은 노동자를 경영자로 만든다.
오늘날은 모두가 자기 자신의 기업에 고용되어 스스로를 착취하는 노동자다. (p.15) 이러한 생산 양식에서는 생산 수단의 소유자에 의해 착취당하는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물질적 생산 과정에서는 어차피 누구나 자기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p.16) 모두가 주인인 동시에 노예다. 계급투쟁은 자기 자신과의 내적 투쟁으로 탈바꿈한다. 오늘날의 생산 양식 특징은 협동하는 “다중multitude"이 아니라 홀로 고립되어 스스로와 싸우고 스스로를 착취하는 경영자의 고독solitude이다. (p.15) 자기 자산을 착취하는 성과주체는 고립화되고 이로 인해 공동의 행위를 할 수 있는 정치적 우리 자체가 형성되지 못한다. (p.16)" 이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지만 애초에 우리가 피 흘리며 쟁취한 자유(타인과 함께 자아를 실천하는)와 다른 자유를 누린다.
저자는 과거의 규율 사회가 푸코의 ‘생정치’라면 현재의 신자유주의 사회는 ‘심리정치’라고 말한다. 제약하는 타자의 지배 아래에 있는 주체가 subject라면 자유롭게 자기 자신을 기획하는 주체는 project라고 한다. ‘자기 자신을 기획’한다는 문구에 착안하여 나는 이를 조직에서 벗어나 1인 기업 또는 프리랜서를 (하고자) 하는 개인 차원에 대입해 보았다. 요즘에는 대기업 직원이나 소위 ‘사’ 전문직을 가진 사람보다도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조직을 나와 창업이든 프리랜서든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을 선망하기도 한다.
사회적 힘이 정치적 권력에서 자본 권력으로 넘어간 현상은 개인적 힘이 회사/조직 권력에서 자기 자신으로 넘어온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아이폰 같은 자본이 제공하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 우리는 시간과 노동이라는 자유를 자본에 제공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조직이든 혼자 일을 하든 우리의 시간과 노동을 제공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조직에서는 명령, 마감 기일, 성과, 타인에 대한 책임 등 타자에 의한 각종 규제를 받는다. 혼자 하는 일에서는 타자에 의한 규제가 전혀 없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한다. 엄청나게 풍부해진 시간을 어떠한 규제 없이 스스로 알아서 활용해 성과를 만들어야 한다. 온전히 자유로운 만큼 완전히 헤이해지기 쉽다. 따라서 타인에 의한 규율 대신 스스로 만든 규율 속에 자기 자신을 구속시켜서 스스로 감시하다가 규율을 지키지 못하면 쉽사리 자기 비난으로 치닫는다. 원망을 하거나 탓할 대상은 온전히 나 자신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차원에서와 마찬가지로 "외적 강제나 타인의 억압에서 해방되었다고 믿는 프로젝트로서의 자아는 성과와 최적화의 강요라는 형식으로 작동하는 내적 강제와 자기 강제에 예속된다.(p.10)" 그런 점에서 프리랜서는 내적 강제와 자기 강제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보면 프리랜서처럼 강제하거나 억압하는 타자가 없는 상태,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일하는 사람도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 그 이유는 ‘노동’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유로운 시간은 오직 노동의 타자만이, 생산력이 아닌 다른 힘, 어떤 노동력으로도 전환되지 않을 어떤 힘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다. 즉 생산 형식이 아닌 삶의 어떤 형식, 완전히 비생산적인 것, 우리 미래는 생산적인 면에서 쓸모없는 것의 쓸모를 찾아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사치는 본래 소비 행태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필요와 필연성에서 자유로운 삶의 형식이다. 자유는 일탈, 즉 필연성에서의 이탈(Luxieren, '발목 따위를 삐다. ‘)에서 시작된다. (p.74)"
그러나 어떤 경제 체제든 인간이 노동에서 해방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어쨌든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사치’는 도대체 무엇인가? "자유로서의 사치는 놀이처럼 오직 노동과 소비의 피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금욕에 가깝다. (p.74)" 금욕은 억압적 규율과 다르다. 그것이 타자에 의한 것이든 스스로에 의한 것이든 억압적 규율의 객체는 자신이 불리해지면 비난하거나 원망할 규율 주체가 있다. 이렇게 나도 모르게,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머릿속 말들 또는 행동을 통제하는 것이 금욕이다. 그래서 저자는 말한다. “사유야말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푸코가 말년에 “권력과 지배 기술”에서 “자아 기술”로 관심을 돌린 것을 두고 저자는 "신자유주의적 지배 체제가 자아의 기술을 완전히 포섭했다는 것, 신자유주의적 자아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자아의 부단한 최적화가 지배와 착취의 효율적 형식이라는 것을 푸코가 인식하지 못한다.(p.44)"라고 지적 하지만 생정치 체제든 심리 정치 체제든, 조직생활을 하든 프리랜서를 하든 결국 궁극적 자유는 타자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해방, 즉 금욕으로 얻을 수 있다고 보면 푸코를 지적할 여지가 줄어들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저자가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SNS와 빅데이터다. SNS와 빅데이터는
자본이 인간의 욕망/기분을 분출하도록 자극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대표적 수단이다. SNS를 사용하면서 우리는 빅데이터라는 새로운 빅브라더에 자발적, 능동적으로 스스로를 노출시킨다. 소통을 위해 존재하는 SNS는 즉각적 반응과 개방을 요구한다. 즉각적 반응은 곧 흥분이다. "서사적 길이와 폭을 지녀 이야기를 허용하는 감정과 달리 흥분은 스스로를 분출시키면 그만이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흥분의 즉각적 배설을 용이하기 해준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그 시간적 특성만으로도 감정보다는 흥분을 더 많이 전달한다. (p.62)"
SNS의 개방 요구에 노출된 사람들은 내면이 없는 존재로 바뀌어간다. "내면은 소통을 방해하고 느리게 하기 때문이다. (p.21) 이러한 전면적 커뮤니케이션은 보이지 않는 진행자에 의해 모두가 동의하는 지점으로 하향평준화 된 전면적 획일화를 촉진한다. (p.22)" 그렇다면 SNS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여론이라고 간주하고 그를 바탕으로 내리는 의사결정을 타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한편, 자발적으로 네트워크에 올리는 모든 자료는 빅데이터가 수치화한다. 개인은 디지털이 나열하여 분석한 수치의 정보 무더기로 양화된다. 자본은 더 이상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묻지 않으며 나도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정보 무더기는 정치인에게 아주 유용하다. 오바마 대선 캠프에서 주효 전략으로 꼽는 "마이크로 타게팅은 권력의 미시물리학이 실현되는 방식이며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심리 정치다. 지능적 알고리즘은 투표 행태를 예측하고 유권자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최적화하는데 활용된다. 개인 맞춤형으로 만들어진 선거용 메시지는 개인화된 광고와 거의 다르지 않다. 선거와 쇼핑, 국가와 시장, 시민과 소비자는 점점 더 닮아간다. (p.89)"
"시민의 자유도 소비자의 수동성으로 대체된다. 유권자는 궁시렁 궁시렁 불평하면서 정치에 수동적으로 반응할 따름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품이나 서비스에 대해 불만을 늘어놓는 소비자와 같다. 정치가와 정당 역시 이러한 소비 논리를 따른다. 그들은 “납품” 의무를 지닌다. 유권자 고객에게 만족스러운 상품을 제공해야 하는 납품업자로 전락한다. (p.22)"
"오늘날 사람들이 정치가에게 요구하는 투명성은 정치적 요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소비자는 그저 정치가를 벌거벗기고 폭로하고 추문 속으로 몰아가는 데만 관심이 있다. 그것은 참여하는 시민의 요구가 아니라 수동적인 구경꾼의 요구다. 참여는 고객 불만 신고, 환불 요청 같은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구경꾼과 소비자들이 거주하는 투명사회는 구경꾼 민주주의를 수립한다. (p.23)"
빅데이터는 시대의 흐름이다. 이러한 위험이 있다고 해서 그 대세를 우리가 거스를 수는 없다. 설사 빅데이터 또는 자본이나 기술을 막는다고 해도 "자유는 결국 에피소드(막간극)로 끝날 것이다. 자유의 감정은 일정한 삶의 형태에서 다른 삶의 형태로 넘어가는 이행기에 나타나 새로운 삶의 형태 자체가 강제의 형식임이 밝혀지기 전까지만 지속될 뿐이다. 그리하여 해방 뒤에 새로운 예속이 온다. 그것이 주체의 운명이다. 주체, Subject는 문자 그대로 예속되어 있다. (p.9)"
환경의 변화는 피할 수 없거니와 도망치는 삶은 영원히 노예의 삶이다. 우리 환경은 점점 “사유” 즉, 내 반응이나 생각 등 나 자신에 대한 건전한 의심을 절실하게 요구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존재”만이 자기 자신을 지키고 나아가 문명의 이기를 지혜롭게 이용하는 자유를 누리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