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당시의 통화) 가치의 의도적인 평가절상 이유는?
최근 흥미롭게 읽은 책 "R의 공포가 온다"에서 이승만 대통령 시절 겪은 위기에 대해 인용해 볼까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 때의 주요 경제적 사건은 1950년의 토지개혁, 그리고 1954년부터 시작된 적산불하를 들 수 있습니다(81쪽).
해방 당시 일본인들이 남긴 재산, 즉 귀속재산(Vested Property)또는 적산(Enemy Property)의 규모는 대략 농지는 남한 전체 농지의 12.3%(논 16.7%, 밭 6.5%), 기업체는 고용노동자의 수나 생산액비중을 기준으로 볼 때 대개 전체의 1/3~1/2 수준이었다. 이런 귀속기업체를 민간에게 불하하는 법(귀속재산처리법)이 1949년 12월제정되었지만 한국전쟁 이전에는 실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전쟁이 터지자 이승만 정부는 생산을 활성화하여 물자 공급을 늘리고 재정적자를 보충하기 위해 귀속 기업체에 대한 불하를 서둘렀고, 그 결과 1953년까지 전체 귀속기업체 불하 건수의 약 43%가 매각되었다.
이후 1954년 시작된 귀속재산 불하사업은 1958년 5월까지 총26만 3,774건으로 90% 이상 처리가 완료되었다. 당시 귀속재산이 우리 경제에 차지하는 규모가 워낙 막대하기도 했지만, 특히귀속사업체는 생산시설이 좋은 대규모 기업이 대부분이었고 귀속농지도 토질이 비옥하고 생산성 높은 논의 비중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당시 한국 경제는 귀속재산에 의해 주도되다시피 했다.
어마어마한 자산이었음을 알 수있습니다. 그리고 이 알짜자산은 매우 헐값에 매각되었습니다(82쪽).
당시 귀속기업체는 상당히 유리한 조건으로 민간에 불하되었다. 우선 불하 가격이 저렴했고 불하 대금도 고율의 인플레이션하에서 15년 분할 납부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이 대금마저도 은행의 특혜 융자를 받아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많은 자본가들이 불하에 참여하기 위해 애썼고 그 과정에서 정경유착을 통한 이익추구와 부패가 발생했다. 이승만 주변의 권력자들과 관료들은 선별된 사람에게만 불하의 기회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개인적 혹은 정치적 목적에서 필요로 하는 자금을 각출했다. 불하 과정에서 부정과 정경유착과 같은 부조리가 발생했고, 그 결과 건전하고 민주적인 국민경제 건설은 상당히 지연되었다.
전쟁 중이었으니, 인플레가 발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 정부는 환(당시 공식 화폐)의 가치를 의도적으로 높게 유지했습니다. 즉, 달러에 대한 환율을 시장 균형 수준보다 낮게 형성시켰던 것입니다(책 82~83쪽).
1950년대 당시는 심각한 물자 결핍 상태였기에 원조물자를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구매자는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극심한 인플레이션 상태에서 정부가 인위적으로 환(원)화 가치를 고평가해서 정한 공정환율로 배정받는 원조물자는 실세환율로 적용 시 많은 이익이 뒤따랐다. 또한 원면, 원사, 원당 등의 경우는 대자본으로 성장한 기업에 실수요자 배정으로 특혜가 주어졌다.
한국정부가 미국의 환율 평가절하 압력에 반대한 것은 환(원) 고평가 정책에 의해서 수입업자가 막대한 이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정부가 수입업자에게 원조물자 수입을 할당하는 것은 큰 이권이 되었다. 공정환율이 실제보다 과대평가되어 있어 수입업자에 대한 정부의 외환 경매 입찰도 큰 이권이었다. 정부가 저환율정책에 의해서 수입허가와 외환분배 과정에서 업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재벌기업 대부분이 이때 탄생한 것이 이해되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그렇더라도 환율을 적정 수준보다 낮게 유지하면, 수출의 기회를 노리는 기업들에게는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칠 것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승만 정부에게도 할말은 있었습니다(책 83쪽).
이승만 정권이 환원화 고평가 정책을 고수한 최대 원인은 유엔군의 대여환(원)화의 상환과 관련되어 있다. 유엔군이 한국 내환(원)화 경비 조달을 위하여 1950년 7월 정부와 주한미군 간 환(원)화 대여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주요 외화 수입원인 환율과 연관되는 공정환율이 인상되는 환(원)화의 평가절하에 반대했다. 환(원)화가 평가절하 시 받을 수 있는 대여환(원)화에 해당하는 달러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환율 정책은 미국 원조로부터 최대의 이익을 확보하고 획득하기 힘든 달러를 가능한 많이 배당받기 위한 수단이었다.
즉, 달러를 더 받을 목적으로 환율을 인위적으로 낮게 유지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승만 정부가 수출을 부양하는 데 아무 의지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한국 경제사의 재해석, 127~128쪽).
면방직 산업은 종전 이후 빠르게 생산은 늘렸다. 1954년에는 이미 전쟁 전 수준을 회복했으며, 1958년에는 전쟁 전 수준의 2배가 넘는 제품을 생산하였다. 이러한 빠른 생산증가로 인해 1955년에 접어들면 이미 ‘과잉생산’의 조짐마저 나타났다. (중략)
면방직 생산자들은 (공급과잉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수출에 총력을 기울였다. 실제로 한국은행은 1957년 10월 ‘조사통계월보’에서 “해외 수출이 현저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출은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미국이 수출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원조를 통해 공급된 원면으로 생산된 제품을 다른 나라에 수출하는 것을 매우 제한된 수준으로만 허용하였다. (중략) 수출이 본격화된 것은 1960년에 접어들어 미국이 수출에 동의를 하면서부터였다. 이후 면방직 제품의 수출은 큰 폭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다만 정책의 우선순위가 원조에 집중되었다는 것이죠. 실제로 원조가 점차 줄어들면서부터 한국은 제조업 중심의 산업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성과도 크게 거두었습니다. 다만.. 공격적인 수출 부양정책은 아닌 면이 컸다는 것도 인정해야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