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대체 산업화와 더 많은 외화를 획득할 목적으로 추진
최근 흥미롭게 읽은 책 "R의 공포가 온다"에 대한 두 번째 서평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이승만 정부가 토지개혁, 적산불하 등의 정책을 펼치는 과정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저환율 정책(적정 가치보다 대미 달러 환율을 낮게 유지하는 정책)을 펼쳤다고 덧붙인바 있습니다.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해 중점적으로 설명드리겠습니다. 혹시 지난 번 글을 못 본 분들은 아래 링크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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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부가 저환율 정책을 사용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R의 공포가 온다", 83쪽).
이승만 정권이 환원화 고평가 정책을 고수한 최대 원인은 유엔군의 대여환(원)화의 상환과 관련되어 있다. 유엔군이 한국 내환(원)화 경비 조달을 위하여 1950년 7월 정부와 주한미군 간 환(원)화 대여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주요 외화 수입원인 환율과 연관되는 공정환율이 인상되는 환(원)화의 평가절하에 반대했다. 환(원)화가 평가절하 시 받을 수 있는 대여환(원)화에 해당하는 달러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환율 정책은 미국 원조로부터 최대의 이익을 확보하고 획득하기 힘든 달러를 가능한 많이 배당받기 위한 수단이었다.
유엔군의 대여금 상환 문제를 조금 더 상세하게 인용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유엔군 대여금 조달의 법적 근거는 1950년 7월 28일 유엔군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 간의 협정체결에 의해 마련되었다.
협정 제1항은 “한국 정부는 연합군 총사령관 지휘 하에 있는 군대의 한국 및 한국 수역에서의 작전 및 활동에서 야기되는 경비지출을 위하여 그가 요구하는 금액, 종류, 시일, 장소에 따라 한국 통화와 해당 통화로써의 신용을 공여한다”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이 협정은 유엔군 대여금의 조달방법과 상환시기 및 조건에 대해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아 매일 유엔군의 필요경비로 지출되는 원화에 비례하여 전쟁기간 동안 통화량의 급격한 팽창을 초래하였다.
유엔군대여금을 비롯한 한국의 전비부담은 한국 경제를 압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기에 한국 정부 입장에서는 구호품의 다량확보와 유엔군대여금의 상환을 통한 달러 수입의 확보가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고, 1951년 3월 이래로 한국 정부는 유엔 당국과의 공식, 비공식 접촉을 시도하면서, 유엔군 대여금의 조속한 상환을 요청하였다.
즉, 해외에서 들어오는 원조를 더 받을 목적으로 저환율 정책을 시행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이승만 정부의 정책을 설명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플레 안정'이라는 목적이 추가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1954년부터 1970년까지 물가상승률과 예금금리의 추이를 보면, 돈이 은행에 들어갈 일이 없으리라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인플레보다 낮은 수준의 금리가 장기간 유지되는데, 저축 동기가 생길리 없으니 말입니다.
이런 여건에서는 해외 원조 자금이 경제의 생명줄이라 하겠습니다. 전쟁의 폐허에 인플레는 심각하고, 또 언제 전쟁이 날지 모르니 미국 달러를 최대한 확보하는 데 매달릴 수 밖에 없죠.
출처: 한국의 장기통계: 국민계정 1911-2010, 한국은행 경제통계정보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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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좋은 뜻 만으로 정책이 결정되지는 않습니다(87쪽).
한국정부가 저환율 정책을 고수한 또 하나의 이유는 이승만과 그 주변 세력의 정치적 계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의 환율체계는 원면 환율, 대충자금 예치환율, 공정환율 등 복잡하게 나누져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공정환율이 자유시장 환율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낮은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외환에 접근한다는 것은 곧 엄청난 차익을 보장받는 일이었다. 따라서 모든 자본가들은 국가가 보유하고 있는 외환을 배정받기 위해 애썼고 그 과정에서 정경유착을 통한 이익추구와 부패가 싹틀 수 있는 여지가 발생한다. 이승만 정권의 권력자들과 관료들은 선별된 자본가에게만 외환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허용하였다. 이 역시 거기에 따르는 정치적 목적의 자금이 거래되었다.
부패 문제 뿐만 아니라, 이승만정부의 '수입대체' 정책도 환율 정책에 영향을 미쳤습니다(87쪽).
이승만 정부가 추진한 수입대체산업화는 보호무역이라는 정책수단을 함께 사용했다. 이 시기 대표적인 소비재 수입대체산업은 삼백(三白)산업이라는 면방, 제분, 제당이었다. 정부는 이 분야를 중점 발전시키기 위해 강력한 보호무역정책을 폈다. 당시 무역정책의 기본방향은 제도적으로 허용되는 항목을 열거하고 이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제한하는 포지티브시스템(Positive System)이었다. 수입목록에 오른 상품만 수입할 수 있는 제도였던 것이다. 그 외의 제품은 수입제한 품목과 금수품목으로 나뉘어져 있어 수입이 불가능했다. 국내에서 육성하는 수입대체산업 품목은 수입제한으로 보호받고 있었다.
물론 이승만 정부가 이런 정책을 펼친 것은 결국 한국전쟁으로부터 회복이 이뤄지기 전이었다는 시대적인 한계도 존재합니다. 따라서 1960년 4.19 혁명으로 집권한 장면 내각은 수출주도의 산업화를 추진할 계획을 밝혔고, 실제로 아래 <그림>에 나타난 것처럼 대미 달러 환율을 조정하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물가 수준에 맞춰 환율 조정이 이뤄져야 하는 이유는 '경쟁력' 문제 때문입니다. 미국의 물가가 안정되어 있는데, 한국 물가는 한국전쟁 이후 10년 동안 거의 8배 상승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한국의 수출 경쟁력은 바닥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죠. 따라서 장면정부나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 모두 환율 조정을 최우선으로 단행한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살펴보겠습니다. 즐거운 독서, 행복한 인생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