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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춘욱 Dec 11. 2022

아시아의 힘2 - 토지개혁이 농업생산성 향상으로!

빈곤의 악순환을 중단시키고 교육의 여력을 높이며, 무역수지도 개선시켜

지난 시간에 "저소득 국가를 고소득 국가로 바꾸는 3가지 정책 수단"에 대해 말씀드린 만큼, 오늘은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수단인 자영농 육성에 대해 이야기할까 합니다. 혹시 지난번 글을 못 본 분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아시아의 힘 - 저소득 국가가 비상하는 3가지 방법


***


먼저 자영농의 육성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책 37~38쪽).


간단히 답하자면 개발 초기 단계에 있는 국가의 경우 대개 인구의 75%가 농업에 종사하며, 땅을 토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2차대전 후의 동아시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1870년대에 75%의 농촌인구와 함께 개발을 시작한 일본도 전쟁 초기에 거의 절반의 노동인구가 여전히 농장에 있었다. (중략)

(저소득 국가) 농업의 문제는 시장의 힘을 그냥 방치하면 소출이 정체되거나 심지어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토지에 대한 수요가 공급보다 빨리 늘어나서 지주들이 갈수록 높은 지대로 땅을 임대하기 때문이다. 지주들은 또한 높은 이자를 물리는 대금업자 역할도 한다. 높은 지대와 비싼 이자 그리고 사용권 보장을 받지 못한 임대인들은 소출을 늘리기 위해 관개 시설을 개선하거나 비료를 사는 등의 투자를 할 수 없다. 지주들은 소출을 늘리기 위한 투자를 할 수 있지만 가능한 한 높은 지대를 요구하고 대출자가 빚을 갚지 못하면 담보로 잡힌 땅을 취해 보유 토지를 늘리는 고리대금을 통해 더 쉽게 돈을 벌 수 있다. 


특히 한국에게 이 문제가 심각했던 것은 해방 이후 인구가 폭증한 것입니다. 물론 출산율의 상승도 영향을 미쳤습니다만, 정확하게는 만주와 일본으로 이주했던 동포들의 귀국 때문에 빚어진 일이죠. 1949년 단 2천 만 명 내외로 추산되었던 남한 지역 인구나 1965년에는 3천 만 명에 근접할 정도로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였습니다. 한국 전쟁으로 엄청난 희생을 입었음에도 발생한 일이라는 게 참 놀랍습니다. 


출처: 통계청(2015), "통계로 본 광복 70년 한국사회의 변화".


***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바로 토지개혁이었습니다(책 38~39쪽).


변화의 수단은 중국, 일본, 한국, 대만에서 집행된 일련의 토지개혁 프로그램이었다. 중국의 경우 공산주의자, 나머지 국가의 경우 반공주의자들이 전개하기는 했지만 그 목표는 같았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가용 농지를 토지의 질적 차이를 감안하여) 평등한 토대 위에서 농업 인구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중략)

생산량은 농경이 근본적으로 일종의 대규모 텃밭농사에 해당하는 조건에서 급증했다. 5인, 6인 혹은 7인 가족들은 1헥타르 미만의 토지를 일궜다. 일반적인 경제 이론에 따르면 이런 구조는 비효율적이어야 한다. 소위 '자유시장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규모가 효율을 기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입을 모아 주장했다. 중국, 북한, 베트남(그리고 그들 이전의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런 주장에 따라 (수백만 명을 불운에 빠트리며 가족 농지를 대규모 집단농장으로 바꾸었다.


러시아나 중국의 집단 농장이 엄청난 비극을 유발한 이유는 결국 '인센티브' 문제였습니다("중국의 도시화와 발전축", 75~76 페이지).


(1978년 봄 안후이성 성장) 완리가 한 농가에 들러보니, 집 안에는 남루한 옷을 걸친 중년 여성 혼자 있었다. 완리가 그녀에게 집안 상황을 물었다. "가족이 몇 명입니까?" "부부하고 아이가 둘 해서 네 명입니다" 완리가 이어 물었다. "아이들은 어디에 있나요" 어머니가 대답했다. "놀러 나갔습니다". 완리가 수상한 마음에 아이들을 계속 보고 싶다고 물으니,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부뚜막으로 가서 솥뚜껑을 들어올렸고 아궁이 안에 두 명의 벌거벗은 여자 아이가 있었다.

밥을 짓고 나서 아직 열이 남아 있는 아궁이에서 무쇠솥을 들어내고 어린아이들을 그 안에 넣어두고 솥뚜껑으로 덮어 두었던 것이다. 그 순간 완리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그가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혁명전쟁 당시 이 지구의 인민들이 혁명을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가? 그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우리의 오늘이 있었겠는가? 그런데 해방 후 30년이 다 된 오늘까지도 백성들의 가난이 이 지경으로, 배를 채울만큼 먹지도 못하고 몸을 가릴 옷조차 없다니.. 무슨 낯으로 강동의 어른들을 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끔찍한 상황을 타개한 것은 안후이성 샤오강 지역 농민들이었습니다("중국의 도시화와 발전축", 81~82 페이지).


1978년 추수를 끝낸 후 안후성의 평양현 샤오강 생산대(=인민공사)는 2개조, 4개조 등의 작업조를 나누고 , '조별 도급제'를 실행했으나 각 작업조 내부에서 작업량의 기록과 출근 그리고 작업태도 등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분규가 끊이지 않아, 결국 모두 "차라리 해산하고 말자"고 말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중략)

생산대의 부대장 옌홍창이 마을의 어른인 관팅주의 집에 찾아서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조언을 구하자, 관팅주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1962년 잠깐 시행했던 책임전이 매우 좋았다. 서로 다투고 싸우지 않으려면 한집씩 분리해야 한다. 겁나는 것은 정부가 허가를 안해주는 것이다." (중략) 1978년 11월 24일 밤, 샤오강촌 생산대의 18호 농가 호주들은 1차 비밀회의를 열었다. 자유로운 토론을 거쳐 옌홍창이 '생사협약'이라고 부른 협약서 초고를 낭독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각 호 단위로 농지를 나누고, 각 호 호주가 서명하고 날인한다. 이후 가정마다 정부에 납부하는 공량 외에는 어떤 돈도 양식도 다시 요구하지 않는다. 상부와 외부에 비밀을 유지하고, 발설하는 자는 전 촌민의 적이다. 만일, 실패하여 우리 간부들이 감옥에 가게 되면, 남은 사람들은 우리의 아이들을 18세가 될때까지 양육할 것을 보장한다."


***


물론 인센티브 문제가 잘 해결된 상태에서는 대농장 경영이 더 우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낮은 수준의 경제 발전 단계에서는 소규모의 구분경작이 훨씬 유리하다고 합니다(책 39쪽).


현실적으로 효율의 문제는 어떤 결과를 기대하는지에 좌우된다. 자본주의식 대단위 농장은 투자자본에 대비하여 가장 높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개발도상국에 적합한 농업적 ‘효율’이 아니다. 노동력이 넘치는 개발 초기 단계의 빈국에게는 추가 노동력에 따른 수익이 제로가 될 때까지 작물 생산을 극대화하는 편이 낫다. 다시 말해서 인사(人時)당 수익이 형편없이 낮다고 해도 노동자를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용도이기 때문에 보유 노동력을 활용하는 편이 낫다. 텃밭농사를 하는 사람은 모두 알듯이 텃밭농사 접근법은 최대의 생산량을 거두는 방법이다.


실제로 1978년 샤오강촌의 농민들은 구분경작으로 돌아선 이후 기적같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979년 단 한해에 생산된 양식 6.6만 킬로그램은 1966~1970년의 5년간 생산량과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하니까요. 


출처: 위클리 비즈(2019.6.7), "집단농장 해체하자 수확량 4배↑"


***


이렇게 생산량이 늘어나자, 경제 전체에 선순환이 발생했습니다(44~45쪽). 


대규모 소출 증가는 농촌의 소비가 대규모로 늘어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농민들이 소비재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는 것은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메이지 시대 일본부터 전후 한국, 현대 중국의 유명 기업들은 초기에, 규모는 크지만 현금이 부족한 농촌시장에 맞춘 제품으로 수익을 올렸다. (중략) 

농업 생산량 증가에 따른 또 다른 혜택은 대외교역 개선이다. 경제개발을 시작하는 국가들은 항상 외화가 부족하다. 외화를 쉽게 낭비하는 일 중 하나는 식품 수입에 필요한 수준보다 많은 돈을 쓰는 것이다. 이는 개발과 학습에 필수적인 기술제품을 수입할 능력을 떨어뜨릴 것이다. (중략)

가난한 나라는 실업 수당이나 다른 복지 급여를 제공하지 않는다. 따라서 불경기 때 해고당한 이주 공장노동자들이 가족농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는 엄청난 중요성을 지닌다. 대만의 경우 약 20만 명의 공장노동자들이 1970년대 중반에 일어난 1차 석유위기때 고향으로 돌아갔다. 근래에는 중국에서도 불경기 때 비슷한 역이주가 발생했다. 토지개혁에 성공한 아시아 국가들은 18세기 영국부터 현대 필리핀까지 대단위 농업에 의존하는 국가들이 직면한 수많은 빈곤층이나 드넓은 불법거주지 문제를 피할 수 있었다.


가장 직접적인 효과는 농촌이 부유해지며 교육 투자가 늘어난 것이지만, 농촌의 소비와 저축이 늘어나면서 사업가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장을 열어준 것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더 나아가 수입 농산물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 무역수지를 개선하며, 불황에 대비한 안전판을 만들어 내는 등 토지개혁에 따른 생산성 향상의 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반공의 깃발'을 높게 든, 미국 군정 당국이 어떻게 토지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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