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직전 이뤄진 토지개혁
지난 시간에 "토지개혁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드린 만큼, 오늘은 반공의 깃발을 든 미군정이 토지개혁을 추진한 배경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혹시 지난번 글을 못 본 분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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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소련과 중공의 확장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마자 공산주의자들과의 전쟁이 곧 시작될 것임을 짐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초기에는 공산주의의 확산에 대해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서구권 시장경제에 뿌리 내린 '재산권'에 대한 보호를 중시하는 문화 때문이었습니다.
이 상황을 타개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라데진스키였습니다(66쪽).
라데진스키는 아시아의 농업 문제와 관련해 미국 정부에 조언을 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1899년에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러시아혁명 때 미국으로 탈출한 라데진스키는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1921년 초 러시아를 떠나기 전에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 때문에 이 일을 하게 됐습니다. 바로 농민들에게 토지를 돌려줌으로써 단호하게 토지 문제를 해결했다면 공산주의자들은 결코 권력을 잡지 못했을 것이라는 교훈 말입니다."
그는 또한 가족농으로의 전환을 통해 대중적 지지를 얻은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이 뒤이어 집산화를 강요했다는 점을 언급했다. 라데진스키는 국공내전 막바지인 1949년에 토지개혁에 나서려는 농촌재건공동위원회의 뒤늦은 시도를 위해 파견됐던 중국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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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3나라(일본, 대만, 한국)에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반공의 투사로 이름 높은 맥아더 장군이 라데진스키의 주장을 수용했던 것입니다(66~67쪽).
라데진스키는 4년 전인 1945년에는 패망한 일본을 관리한 맥아더 총사령관의 지휘부에도 파견됐다. (중략) 맥아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소작) 지대를 낮추는 미온적인 정책을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라데진스키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지역적 지지 기반을 무너뜨리려면 획기적인 정책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또한 그는 지대 삭감을 강요하면 많은 지주들이 직접 농사를 지을 것이며, 그에 따라 땅이 없는 농민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라데진스키와 동지들은 보수적인 성향을 지녔으며 이전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던 맥아더를 설득하여 토지 개혁법을 제정하게 만들었다.
맥아더가 일본 정부에 지시한 내용은 중국공산당이 1947년에 발표한 토지법 대강의 서문을 빼닮았다.
"경제적 난관을 제거하여 민주적 추세를 부활 및 강화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태도를 확고히 내세우며, 수세기 동안 농민들을 봉건적 억압에 시달리게 만든 경제적 구속을 철폐하기 위해 일본 황실 정부는 농사를 짓는 사람이 노동의 결실을 누릴 수 있도록 보다 평등한 기회를 얻게 만드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중략) 따라서 일본 황실 정부는 1946년 3월 15일 전까지 농촌 토지개혁 계획을 제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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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벌어진 기적이 한국에서도 반복될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바로 북한의 토지개혁 시행이었습니다(책 70~71쪽).
토지개혁 전 한국의 토지 보유 관계는 동북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가장 불평등했다. 울프라데진스키는 1945년 분할 이전의 한국 농업을 다룬 글에서 1928년에 미 국무부가 발표한 조사보고서의 내용을 인용했다. 거기에 따르면 가구의 4% 미만이 농경지의 55%를 보유한 반면 땅을 갖지 못한 불법점유 가구가 25만 가구였다. 식민지 시대에 농업 부문에 대한 공적 투자도 대만보다 적었다. 일본은 한국에서 대만보다 완강한 정치적 저항에 직면하여 강압적인 통치를 했다. 1945년에 식민통치가 끝날 무렵 일본은 전체 한국토지의 약 5분의 1을 보유했으며, 대다수 농민은 소작인이었다.
1945년 9월부터 한국을 점령한 미군정은 지대를 통제하고 일본인 소유 토지에 대한 임대 계약을 요구했다. 그러나 군정 장관인 아처 러치(Archer L. Lerch)는 사회주의정책이라는 이유로 토지개혁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의 관심사는 소련군을 38선 북쪽에 묶어두고 남쪽에서 공산주의를 억압하는 것이었다. (중략) 1946년 3월부터 북한에서 수용 면제 기준을 5헥타르로 정한 (관대한) 토지개혁이 시행됐다. 폭력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으며, 부상하는 공산 정권에 대한 민중의 지지도가 갈수록 높아졌다.
결국 미 국무부는 1946년 가을에 토지개혁을 강행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만, 러치장군과 이승만은 계속 저항했다고 합니다(71쪽).
1947년에 러치 장군이 사망한 후 미군정은 일본인 소유 토지에 대한 재분배에 나섰다. 개혁 대상은 경작지의 10%를 약간 넘기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기대감을 높였다. 1948년에 한국은 주권국이 됐으며,이듬해에 새 국회는 지주들의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연관됐음에도 본격적인 토지개혁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이승만 대통령이 바랐던것보다 훨씬 획기적이었다. 그래서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국회에서 기각됐다.
이승만은 1949년 6월에 토지개혁법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중략) 북한은 침공 후 남한의 대다수 지역에서 신속하게 농민위원회를 구성하고 100만여 가구에게 50만 헥타르가 넘는 땅을 무상으로 재분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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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었습니다. 전쟁 발발 직전 토지개혁이 시작되지 않았다면, 한국전쟁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었을지...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한국에서 진행된 토지개혁에 대해 조금 더 인용해보겠습니다(책 72쪽).
한국에서 진행된 개혁의 공식적인 조건은 이미 일본에서 적용됐고 대만에서 적용될 조건과 비슷했다. 수용 면제 한도는 3헥타르였다.지주들에 대한 보상은 특히 인색해서 일부는 자산의 90%를 잃었다. 그러나 이 개혁은 더욱 중앙집권적으로 관리됐으며, 일본과 대만보다 농민들의 참여가 훨씬 덜했다 이 점은 결과에 나타난 여러 편차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첫째, 대량의 땅이 공식 토지개혁 절차를 벗어나 소작인이나 친척들에게 매매됐다. 둘째, 토지개혁법의 조항에 따르면 대다수가 불법인 소작이 재등장해 1970년대 말에는 약 25%의 농지가 소작됐다. 그럼에도 1945년에 농가의 10%를 조금 넘기던토지 소유 가구는 1964년에 70% 이상으로 크게 늘었다. 토지개혁이후 거의 50%의 농민이 0.5 헥타르 미만의 농경지를 보유하게 됐다.
한국의 농업 생산량은 일본만큼 빠르게 늘어나지 않았다. 이승만정부는 1950년대에 생산비 이하로 쌀을 강제수매했다. 이런 상황에서 농가는 생산량을 다소 늘렸지만 잉여분을 밑지고 팔기보다 직접 소비하는 쪽을 택했다. 1950년대 말에 한국은 기아를 면하기 위해 미국의 식량 원조에 의존했다. 뒤이어 1961년에 발생한 박정희의 군사쿠데타 이후 정부는 수매가를 올렸으며, 농촌 인프라 및 비료공장에대한 투자를 늘렸다. 또한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일본 및 대만이 1950년대에 제공했던 종류의 지원을 농가에 제공하면서 소출이 크게 증가했다. 덕분에 1950년대 중반에 헥타르당 평균 3톤이던 쌀 소출은 1970년대 중반에 헥타르당 53톤으로 늘었다. 이는 일본이나 대만 보다는 낮지만 동남아 국가나 중국보다 1.5배에서 2.0배 높은 것이었다.
추곡수매를 낮춤으로써 도시지역에서의 저임금 구조를 유지시키는 것은.. 이승만 정부 때부터 기인했음을 알 수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