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이즈 캔슬링, 하지 말아 줄래요?

by 인기

요즘 내가 푹 빠진 기술이 있는데 바로 노이즈 캔슬링(Noise cancelling)이다. 이어폰이나 헤드폰에 내장된 소음 조절기가 외부 소음을 줄여주는 기술인데 덕분에 음악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요 근래 출시된 고급형 기기엔 꼭 들어가 있는 이 신기한 기술을 나는 얼마 전에야 접하게 됐다.


(늘 그렇듯) 충동결에 구매한 에어팟 프로는 노이즈 캔슬링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듣기 전엔 ‘뭐 얼마나 대단하겠어’ 하는 의심스런 마음이었는데 막상 들어보니 ‘이 녀석 진짜 대단한데’라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오랜만에 돈 쓴 보람을 느끼게 하는- '진짜 자본주의'적인 물건이었다.


에어팟 프로가 출시된 직후 트위터엔 <퇴근길 지하철에서 에어팟 프로로 음악을 듣던 사람들이 안내 방송을 듣지 못해 단체로 못 내렸다>는 트윗이 올라왔다. 트위터가 과장의 산실이긴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에어팟 프로의 ‘노이즈 캔슬링’ 기능은 놀라운 수준이다. 주변 소음은 극적으로 줄어들고, 음악과 나 둘만 오롯이 남게 되는 1:1 만남이 주선된다. 어떤 사람은 우주에 혼자 붕 떠있는 기분이라고 표현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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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는 일상에서도 ‘노이즈 캔슬링’ 시키고 싶은 사람들을 만난다.


유형 1. 나는 듣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은-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

유형 2. 자기 딴엔 걱정인데, 듣는 사람 입장에선 ‘잔소리’ 혹은 ‘간섭’을 쏟아내는 사람

유형3. 부주의하고 공격적인 말을 거침없이 하는 사람

유형 4. 대다수의 직장 상사 (극소수 제외)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내 머릿속에 자체적인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A: 그러니까 나 때는 말이지….

나: (노이즈 캔슬링 ON)

A: (소리 없이 열심히 움직이는 입모양)



문제는 우리 삶에 ‘노이즈 캔슬링’ 시키고 싶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어제도 만났고, 오늘도 만나고 있으며, 내일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문득 걱정도 든다. 반대로 내 말을 노이즈 캔슬링 시키고 싶어 했던 사람이 있진 않았을까. 고백하자면 난 잔소리가 많은 편이다. 평소에 말이 많은 편은 아닌데, 한번 시작하면 봇물 터지듯 이런 저런 잔소리를 쏟아낸다.


< 지옥의 잔소리 루프 > (예시)

(여자친구에게) 퇴근 했어? → 버스 탔어? → 집에 왔어? → 씻었어? → TV 봐?

→ 잠 안 자? → 핸드폰 많이 보지 말라니깐 → 얼른 자 내일 일찍 나가야 하잖아…

→일어났어? → 출근했어? →점심 먹었어? → 오늘은 많이 바빠? → 또 김부장?

→ 오늘 칼퇴각? →퇴근했어? → (다시 무한반복…)



나의 옛 여자친구들은 일일 허용치 이상의 잔소리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정신 건강에 좋지 않을 정도로- 그녀들은 하루에도 수없이 나를 노이즈 캔슬링 하고 싶었을 것이다. 일부는 내 메시지에 답장을 안 하거나 한참 뒤에 하는 것으로 직접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


가까운 미래, 사람의 머릿속에서 자체적으로 노이즈 캔슬링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다. 많은 말들이 소음으로 간주되어 배제된다. 대화의 양상은 극적으로 바뀐다. 미래의 우리는 처음 대화를 시작할 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노이즈 캔슬링, 하지 말아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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