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상처를 위한 겨울잠

by 인기

인생을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안 좋은 일도 일어나는데 내 경우엔 2:1 정도의 비율인 것 같다. 좋은 일이 두 배쯤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행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하곤 있지만- 문제는 안 좋은 일의 경우 그 여파도 오래가고 상처도 잘 아물지 않는다.


이건 뱃가죽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인생을 길게 살다 보면 심한 말을 듣거나 부당한 상황에 놓이는 경험이 점점 쌓인다- 그에 비례해- 인생의 뱃가죽은 점점 두꺼워진다. 그래서 누가 칼끝으로 뱃가죽을 찔러도 멀쩡한 경우도 있다. '뭐, 이쯤이야’ 하며 상처도 잘 입지 않는다. 상처를 입는다 해도 처음엔 피를 많이 흘리지도 않는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피는 적게 흘리는데 출혈은 오래간다. 상처는 덜 입는데 회복력은 떨어지는 것이다.

처음엔 ‘어? 그럭저럭 괜찮네’하며 견디다가도 발 밑을 쳐다보면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어떤 경우엔 한 달이 지나도 피는 멈추지 않는다. 마음의 상처는 점점 벌어지고 고통 속에 매일

밤잠을 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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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상처를 회복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내 경우엔 ‘잠’이다. 마음에 상처를 받는 일이 생기면 나는 조용히 휴일을 기다린다. 그때까지는 묵묵히 출혈을 견디는 수밖에 없다.


휴일이 오면 나는 동면에 들어가는 곰처럼 단단히 준비한다. 좋은 식사로 배를 채우고 , 시간을 들여 깨끗이 샤워하고, 좋은 잠옷을 입고, 안락한 침대 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휴대폰은 방해금지 모드, 귀마개까지 단단히 낀다. 그리고 짧게는 반나절, 길게는 하루까지 길고 긴 잠을 잔다.


물론 중간에 깨는 경우도 있다 - 화장실에 가거나 물을 마신다거나- 나는 터벅터벅 걸으며 깊은 잠의 여운 속에 되뇐다. ‘나는 겨울잠을 자는 곰이다’

다른 복잡한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다. 나는 곰이니까 침대로 곧장 돌아와 다시 겨울잠을 잔다.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리 많이 잘 수 있는지 신기한데, 아마 마음이 스스로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선 1) 머리를 텅 비운 시간과 2) 넉넉한 몸의 휴식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동면에 들어갔던 나는 어느 순간 눈을 뜬다. 대부분 하루쯤 지나있다. 한결 기분이 괜찮다. 몸을 움직일 기운도 나고 심란하던 마음도 가라앉아있다.


일어나서 창문을 연다. 어떤 날엔 미세먼지가, 또 어떤 날엔 기분 좋은 바람이 밀려 들어온다. 밀린 집안일을 처리하고, 번거롭지만 시간을 들여 식사도 준비한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런 기운도 없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마음속에서 작은 의욕 하나가 수줍게 머리를 쳐들고 있다. 이 녀석이 다시 잘 자라길 기원하며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산책을 한다.


물론 나에게 상처를 준 사건과 사람을 다시 마주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상처는 다시 욱신거리고 피도 조금 배어 나온다. 그래도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 내게 일어났던 나쁜 일에 대해 조금 멀리서, 조금 더 객관적인 시선에서 바라보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 예전처럼 나쁜 일에 모든 마음이 휘말려 들어가, 스스로 마음의 지옥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나쁜 일을 다시 만났을 때 봉합됐던 상처가 터지고, 마음을 다잡을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또 한 번 겨울잠을 자면 그만이다. 나에겐 그게 뭐니 뭐니 해도 제일이다. 겨울잠이 없었다면 아마 내 인생은 지금보다 더 거칠고 삭막했을 것이다. 좋은 일이 일어나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나쁜 일이 일어나면 거기에만 매달렸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도 상처가 욱신거린다.

그런 의미에서, 이만 저는 겨울잠 자러 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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