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여행을 할 때 골치 아픈 것은 단연 소매치기 문제다. 한국에서는 소매치기가 이제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 급격한 사양 산업 중 하나일 것이다 - 유럽에 갔을 때 마주하게 되는 소매치기 문제는 여행객에게 커다란 공포로 다가온다.
게다가 여행 가이드 북이나 인터넷 여행 후기를 읽어보아도 뾰족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
‘백팩은 뒤로 메지 말고 앞으로 메세요’
‘지갑은 절대 뒷주머니에 넣어선 안됩니다’
→ <앞에 메면 내 것, 옆에 메면 우리 것, 뒤에 메면 네 것> 이란 말도 있다.
‘복대를 차고 그 안에 귀중품을 넣고 다니세요’
→ 고전적인 소매치기 예방법이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애용한다.
‘휴대폰은 꼭 손에 쥐고 다니세요’
→ 심지어 도난방지용 휴대폰 스트랩도 불티나게 팔린다.
‘절대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지 마세요’
→ 카페 테이블에 노트북을 놔두고 화장실에 다녀와도 도난당하는 일이 거의 없는 한국 사람들이
흔히 하는 실수
‘길에서 말을 걸어오거나 짐을 들어주겠다는 사람은 조심해야 합니다’
→ 갑작스런 호의와 친절은 언제나 의심스러운 법이다.
이렇게 다양한 방법들이 제시되어 있지만, 막상 현지에 가보면 ‘뭐? 별로 효과 없는데?’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파리에서 만난 어느 젊은 여성의 피해 사례
그녀는 지하철 역 승강장에서 구글 맵을 골똘히 보고 있었다. 휴대폰엔 도난방지용 스트랩이 연결되어 있었고 주위에 의심스런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지하철이 섬광을 뿜으며 승강장으로 들어오는 순간, 흑인 남자 소매치기가 그녀의 휴대폰을 순식간에 낚아챘다. “어..어…”하며 당황하는 사이 소매치기는 달음박질쳐 저 멀리 사라졌다.
도난방지용 스트랩은 힘없이 끊어져 버렸는데 차라리 끊어진 게 다행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스트랩이 안 끊어졌다면 소매치기에게 통째로 이끌려가, 더욱 험악한 상황이 벌어졌을 지도 몰랐다.
해외여행 중 소매치기를 당하면 어떤 기분일까? 그녀에 따르면 곧장 귀국하고 싶어진다고 한다. 여행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하루 빨리 안전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밖에 안 든다고-
하지만 여행 일정이 많이 남아있던 그녀는 가까스로 냉정을 되찾았다. 여행자 커뮤니티를 급히 수소문해 오래된 갤럭시를 중고로 구매했다. 그녀가 잃어버린 것은 최신형 아이폰 11이었다 - 심지어 휴대폰 할부도 이제 막 시작이었다- 그녀는 해탈한 표정으로 오래된 갤럭시와 함께 남은 여행을 계속 할 것이라고 말했다.
소매치기 문제,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솔직히 말해 정답은 없다. 소매치기는 수법이 너무 다양하고 어떤 경우엔 예술적 경지에까지 이르러서, 획일적인 ‘예방 매뉴얼’을 지킨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 경험에 비춰보면, 소매치기를 너무 겁내지 말고 신경 안 쓰는 척 다니는 게 -속으론 엄청 신경 쓰더라도- 가장 효과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소매치기로 악명 높은 파리와 로마에도 사람들은 산다. 현지인들이 매일 소매치기를 걱정하며 노이로제 속에 살진 않을 것이다.
핵심은 ‘자연스러운 기세’다. 너무 긴장하면 안된다. 백팩을 앞으로 메고, 도난방지용 스트랩을 휴대폰에 묶었으며, 복대 때문에 배가 살짝 불룩해보이는 사람은 누가봐도 ‘긴장한 여행객’ 이다. 소매치기 입장에선 너무나 알기 쉬운 표지판인 셈이다. 역설적이게도 너무 많은 대비를 하면, 너무 쉽게 표적이 될 수 있다.
돌이켜보면 나도 처음엔 복대를 차고 도난방지용 스트랩도 휴대폰에 달았다. 사람이 많은 곳에선 백팩을 앞으로 메고 꼬옥 움켜쥐었다. 길거리를 배회하는 집시들과 불량해보이는 부랑자들만 마주쳐도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다행히 소매치기는 당하지 않았지만, 문제는 여행이 즐겁지 않았다.
복대에서 지갑을 꺼내 계산을 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스트랩이 달린 휴대폰은 내가 ‘긴장한 여행자’임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시간이 지나도 여행지의 분위기와 공기에 익숙해질 수 없었다.
나는 결국 복대도 벗고 도난방지 스트랩도 풀었다. 될 대로 되라 식으로 백팩도 과감히 뒤로 멨다. 그리고 그 날 거리에서, 사인을 해달라며 찾아오는 집시 소매치기와 조를 이뤄 순식간에 여행객을 둘러싸는 청소년 소매치기들을 차례로 만났다. 나는 내심 긴장했다. 그런데 그들은 나를 지나쳐 다른 여행객들에게 다가갔다. 신기하게도 여행객의 부담감을 내려놓자마자 소매치기들은 마치 짠 것처럼 나를 열외시켰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경험이고 난 단지 운이 좋았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해외여행이라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힘들다. 하루 세 끼를 해결하는 것도, 하루의 일정을 정하는 것도 무척 힘든 일이다.
그런데 소매치기까지 너무 신경 쓰다 보면 우리는 정작 ‘여행의 기쁨’을 놓쳐버릴 지도 모른다. 어차피 소매치기가 운이 작용하는 불행이라면, 기본적인 주의는 기울이 돼 너무 큰 신경은 안 쓰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이왕 운에 달린 것, 마음이라도 편한 게 좋지 않을까.
사실 여행객 입장에선 소매치기 같은 건 전부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소매치기 입장에서 생각해보면(생각해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많겠지만) 그들은 ‘사양산업’에서 일하고 있는, 조금은 불쌍한 사람들이다.
현금을 갖고 다니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카드를 쓰는 사람들은 급격히 늘어난다. CCTV는 이곳저곳 설치되고, 훔친 카드라도 잘못 썼다간 곧바로 체포된다. 8, 90년대만 해도 꽤 많았던 한국의 소매치기들은 그렇게 사라졌다.
전세계적인 소매치기 산업의 입장에서 보면, 최후의 보루는 역시 유럽의 몇몇 도시들이다. CCTV는 그나마 아직 적고, 현금을 갖고 다니는 관광객들은 끊임없이 몰려든다. 최후의 소매치기가 남아 시대의 변화에 마지막까지 저항하게 될 곳은 파리,로마, 베니스 같은 곳일 것이다. 관광객이 있는 한 소매치기도 있을 테니까.
하루를 마친 소매치기는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푸념한다.
“갈수록 사람들이 돈을 적게 갖고 다니네…”
아내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소매치기는 그런 아내의 표정을 잠시 즐기듯 바라본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휴대폰 몇 대를 꺼낸다. 아내의 표정이 밝아진다. 휴대폰은 이제 그들의 새로운 ‘일용할 양식’이다. 부부는 방긋 웃고, 특별한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아무튼 가까운 미래에 해외여행을 계획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휴대폰은 꼭 잘 챙기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