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란 무엇인가?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
문학도가 되기 전부터 오랫동안 속에 품어온 질문이 있다. 창작은 무엇이고 문학은 무엇인가? 나는 왜 이것을 택하였는가? 작가는 어떤 사람이고 그들의 창작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시인은 누구고 시는 무엇일까? 다양한 형태의 문학 작품 중 시는 나를 항상 압도했다. 나에게 시는 고작 종이 위에 쓰인 글자들이 아니었다. 시인들의 문장은 질투가 날 정도로 아름다웠고 그들의 문장은 내 머릿속에 들어올 때마다 생명력을 가졌다.
내게 시는 무엇이었을까. 내게 시는, 삶의 모호함을, 그 속의 아름다움과 기묘함을 조용히 노래하는 언어였다.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연대였다. 사랑을 가장 아름답게 포착하는 방식이었다. 마음이 언어를 건드릴 때 생기는 파동이었다. 일상의 언어로는 도달할 수 없는 깊이와 사유를, 최소한의 말로 극대화하는 방식의 예술이었다.
의미 이전의 울림, 말보다 앞선 침묵의 순간, 설명보다 암시, 사실보다는 진리를 말하는 것 때때로 ‘이해’보다는 ‘느낌’, 논리보다 먼저 음악성으로 다가오는 것. 내가 너무 가까워 말하지 못했던 진심을 낯설게 보아 도달하게 해 주는 것. 언어의 속살을 들추어 진실을 드러내 보이는 것, 때로는 살아 있음 자체의 증거가 되기도 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시였다.
읽는 사람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껴진 순간이 있었다. 그때 나는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마침내 결심했다. 다만 내 글이, 내가 쓴 시가 ‘좋다’고 말하기는 힘들어 자괴감이 들었다. 나는 좋은 시의 조건이란 무엇인지, 내 시는 왜 좋지 못한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시의 요건은 무엇인가? 좋은 시란, 언어를 통해 감정과 사유를 가장 밀도 있게 전달해야 한다. 무엇보다 언어의 절제를 통해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시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잘 말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덜 말하고도 더 느끼게 하느냐’에 있다. 따라서 좋은 시는 불필요한 설명이나 장식을 걷어내고, 한 단어 한구절마다 시인의 의도와 깊은 고심을 품은, 정제된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좋은 시는 독자에게 낯선 시선을 제공해야 한다. 너무 익숙해서 우리가 쉬이 지나쳤던 사물이나 감정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게 만들어야 하며, 일상의 언어를 시의 언어로 전복해야 한다. 이를 통해 시는 독자로 하여금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게 만드는 힘, 즉 ‘낯설게 하기’의 기능을 가진다. 이 과정에서 형식적 실험, 문학적 장치의 활용 등이 효과적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좋은 시에는 감정의 진실성과 공통된 개인의 경험이 녹아들어 있어야 한다. 시는 현실을 그대로 복제하는 예술이 아니다. 시인이 살아낸 감정과 삶을, 그의 진심을 고유한 언어로 응축시킨 것이다. 이는 독자의 마음에 진정성 있게 와 닿으며 깊은 울림을 남긴다. 공통된 개인의 삶을 적절히 다뤄야 하므로, 독자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겨야 한다. 시가 모든 것을 친절히 말해주는 순간, 독자가 능동적으로 참여할 여지는 줄어든다. 반면 좋은 시는 여백 속에서 독자의 상상과 감정이 개입할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둔다. 형식적으로 좋은 시는 내용과 리듬, 압축과 반복, 적절한 언어, 행간의 여백 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시는 말만이 아니라 그 말이 배치된 방식, 즉 행과 여운까지도 장치로 활용하는 것이다. 좋은 시는 개인적이되 보편적이고, 낯설지만 진실하며, 짧지만 오래 남아야 한다.
내가 생각했을 때 이러한 조건을 모두 부합하는 시는 기형도의 시이다. 그의 시는 젊음이 가지는 특유의 혼란스러움을 쓸쓸한 언어로 포착해낸다. 모두 20대에 창작된 작품들로 독창적인 자신만의 색을 갖추고 있으며, 전반적으로 센티멘털하고 우울한 분위기의 시들. 삶이 뭔지 도저히 몰랐을 때 그의 시집 ‘잎 속의 검은 잎’을 읽어 왔다.
가장 좋아하는 시는 ‘질투는 나의 힘’이다. 시 속에서 화자는 젊음의 열정이 식을 만큼의 시간이 지난 미래의 시점(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을 가정하여 자신의 청춘(현재)을 성찰하고 있다. 이때 ‘이 종이’는 이 시를 쓰고 있는 종이를 의미하며, ‘책’은 개인의 삶 즉 청춘을 기록한 글을 의미한다. ‘힘없는 책갈피’가 ‘이 종이를 떨어뜨리’는 모습에서 독자는 화자의 젊은 시절 열정이 힘을 잃었음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다.
청춘 시절의 ‘나’는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꿈을 갖고 정신없이 창조하고, 기록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는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우’고,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고,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린다. 미래의 화자는 이를 두고 ‘어리석다’고 평가하며 오히려 자책하는 모습을 보인다. 젊은 시절 그는 열정적으로 살았지만, 시간이 지난 후 실제로 이룬 것이 없다고 느끼고 있는 미래의 자신에게는 오히려 부끄러우며 어리석은 인물로 여겨진다.
미래의 ‘나’는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면서 지난날의 세월을 반복, 즉 자아를 객관적으로 성찰한다. 이때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다는 결론을 도출하며, 타자와 자신 사이의 관계를 성찰한다. 결국 화자가 해왔던 일들은 타자를 의식한 ‘질투’에서 나온 것들이며 타인은 화자를 신경쓰지 않고, 자기 자신조차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소외 현상에 직면했다는 것.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그는 마지막에 ‘짧은 글’로 칭해지는 청춘을 위한 유서를 남긴다. 그의 청춘은 사랑과 인정에 목말라있던 시절이었으나, 결코 스스로를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결론과 함께 스스로를 이해하고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과거에 대한 반성을 기록한다. 자신을 용서하며 성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삶에서 무언가를 성취하고자 허덕이는 시간은 청춘을 상징한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내 시가 좋지 않게 느껴진다는 사실과 이미 잘 쓰인 시에 ‘질투’를 느낀다는 사실은 결국 내가 ‘잘 쓰고 싶어 한다,’ 혹은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정을 가졌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나는 욕심이 많은 편이지만 내 힘은 ‘질투’에서 나왔으며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다.’
기형도 시인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해 결국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를 맞이하지 못했다는 점 또한 씁쓸한 사실 중 하나이다. 나는 언젠가 이 열정과 불안을, 젊은 날의 미완성된 꿈을 안아주고 이해해줄 날이 올까. 열정으로 내 모든 걸 홀라당 태워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시를 읽고 배운 것은 오래 쓰고 오래 살려면 나라도 나를 이해하고 ‘나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빈 집’이 있다. 화자는 사랑을 잃고 시를 쓰고 있다. 누구나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잃어 본 경험이 있을 것. 반대로 말해 사랑을 잃은 적이 있으면 그 사람은 사랑을 해 본 적이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 그렇지만 화자는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는 선언을 통해 상실을 기록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 구절만큼 시인의 정신을 드러내는 것이 있을까. 시인은 자신이 겪은 상처를, 상실을 생생하게 기록하는 사람이다.
화자는 ‘잘 있거라’라는 말을 하며 집 안에 사물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여기서 ‘있다’라는 동사를 보아 집을 떠나는 사람은 화자 자신이며, 사랑했던 시간의 기억과 공간을 두고 나아가기 전 작별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때 ‘짧았던 밤,’ ‘겨울 안개,’ ‘촛불,’ 등의 낯설지만 사랑을 상징하는 대상들에게 이별을 선언하며 새로움을 동반한다. 사랑과 이별의 이미지와 더불어 생각했을 때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은 글을 쓰는 어두운 시인의 방을 밝혀주는 불빛을,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은 일상을 기록하는 일기 내지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쓴 편지를,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은 이별의 순간에 흘리는 눈물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좋은 시는 낯선 사물을 통해 보편적인 감정을 전달한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 은 시인이 비로소 주체적으로 이별을 결심했음을 보여준다. 사랑하던 시절의 열망들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잘 있거라’라는 인사와 함께 남겨두고 가는 것.
마지막으로 화자는 불 꺼진 방에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근다. 이때 문을 밖에서 잠갔는지, 안에서 잠갔는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밖에서 잘 있으란 인사와 함께 ‘가엾은 내 사랑’을 이젠 텅 빈 집에 넣고 가두는 모습일수도, 혹은 빈집 안에서 문을 잠그며 불 꺼진 방에서 홀로 갇히기를 택하는 모습일수도 있다.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접하는 시는 더 큰 생명력을 가진다. 내게는 ‘대학 시절’이 그랬다. 대학 시절이 가장 아름답다고들 하지만 가장 아픈 시절이 대학 시절이 아닌가. 특히 화자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가장 많이 보았던 시 중 하나이다.
AI로 생성한 이미지와 편지, 시들이 범람하는 시대이며 기술이 가장 중요하다고들 한다. 이런 시대에서 문학이 아직 가치를 가지는지 회의감이 들 때도 있다. 문과가 돈 벌어먹고 살기 위해서는 로스쿨에 가거나 외교관이 되란다. 나는 ‘나무의자 밑’에 ‘버려진 책들’을 바라본다. 배움이나 학문이 더 이상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이 된 것은 아닌가.
특히 이 시는 80년대 대학 내의 치열했던 정치적 투쟁을 보여주는 시로 해석되기도 한다. ‘시를 쓰던 후배’가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으며 가장 낭만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인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여주고, ‘존경하는 교수’가 ‘말이 없’는 모습에서 부정적인 현실을 외면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고 화자는 털어놓는다. 부정적 사회 현실을 외면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혼자가 된 화자의 모습이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른 모습의 혼란을 마주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념과 극단의 대립과 갈등 사이에서, ‘플라톤을 읽’는 화자의 모습과 나의 모습은 유사하지 않은가. 그렇다. 나는 부정적인 현실을 대면할 때마다 화가 나지만 두렵고, 대학을 떠나는 것이 미치도록 두렵다. 시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두려운 ‘대학 생활.’
내게 기형도 시인의 시가 그렇게 깊게 와 닿는 건 아마 그가 끝내 말하지 못한 것들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잠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말을 아끼되, 침묵보다 더 많은 걸 말하는 시인이다. 외롭고 불안한 세계 속에서 작고 흐릿한 감정을 선명히 붙잡아 내는 방식으로. 그의 시는 예쁘지 않고, 위로를 내세우지 않지만 그 쓸쓸한 감정 속에서 우리는 ‘진실’에 도달한 것만 같은 감정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