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직원 병문안을 통해 알게 된 미얀마의 열악한 공공의료 현실
미얀마에 있는 동안, 나는 익숙함과 스스로 지운 의무에서 벗어나고자 매일 새로운 시도를 해 나갔다. 그 원리는 간단했다. 가슴을 따르는 거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나를 더욱 자유롭고 인간답게 만들고 있었다.
퇴근길, '집에 가서 책도 읽고 미얀마어 공부도 해야지' 하며 마음먹고 사무소를 나오는데 입구에 현지 직원 이 모 미예가 서 있었다. 어디 가냐는 물음에 병원에 간다고 하길래, 왜 가냐고 다시 물었더니 우리 사무소에서 미화원으로 일하는 '릴리'라는 직원의 아버지께서 위독하셔서 병문안을 가는 거란다. 평소 같았으면 나는 그 순간 ‘어 그래? 잘 갔다 와’ 하고 내 길을 갔을 거다. 그러나 내 가슴은 같이 가보자고 이미 마음을 먹고 있었다.
누군가의 병문안을 가본 적이 거의 없다. 대학 동기 가족 장례식장에도 가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 순간 내가 속한 공동체 구성원의 가족이 위독하다는 사실을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내일 한국 직원들이 방문한다고 했지만,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만 같았다. 그 현장에서 가족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나를 막을 한계가 전혀 없었다.
나, 헤이만, 이모미예 이렇게 차를 타고 양곤 외곽에 있는 병원에 도착했다. 근처에 사는 아웅민툰도 불렀다. 나의 첫 미얀마 병원 방문,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치료비가 거의 무료인, '삐뚜 세용(Geeneral Hospital)'이라 불리는 미얀마 국립병원의 모습은 정말, 정말 열악했다. 병원 입구부터 사방 곳곳 바닥에 환자들이 방치되어 있었다. 양곤에서 가난하고도 아픈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나중에 돌아와 정보를 찾아보니 미얀마의 의료 서비스는 너무도 열악했다. 먼저 현지 의사들의 수가 너무 적다. 인구 10만 명 당 약 61명의 의사(2012 자료)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의사 1명당 약 1,670명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도 불구, 미얀마 정부는 의과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의대 학생들 수를 줄이고 있다. 2012년 의대 학생 수는 2,400명에서 1,200명으로 절반이나 줄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연히 의료 서비스가 모든 계층에게 골고루 공급되기가 어려울 게 뻔하다. 2012년 통계에 따르면 병원에서 사망에 이르는 환자들의 22.5%는 감염, 17.1%는 혈관질환, 12.3%가 임산부 질환 등의 순으로 많다. 발병 시 즉각적인 대처가 필요한 병들이다. 내 눈으로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보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이렇게 미얀마 국민들의 삶의 생사가 직접적으로 연관된 의료분야에도 우리나라 정부가 도움을 주면 좋겠다. 용돈을 조금씩이라도 모아서 이곳의 환경을 개선하는데 기여하자는 마음을 먹은 계기가 됐다. (결국 다짐대로 하지는 못했지만, 이후 NGO 봉사단으로 미얀마 아동들의 구순구개열 수술 지원을 위해 활동할 수 있어 감사했다.)
릴리 아버지께서 누워 계신 병실을 따라 들어갔다. 의식을 잃은 채 링거와 소변 호스만 끼고 있는 아버지를 보자마자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마치 내 아버지인 것처럼 슬퍼졌다. 릴리 아버지는 전 날 새벽, 갑자기 쓰러지신 릴리 아버지께서는 지금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계시다. 원래 당뇨가 있으셨는데 갑자기 혈압이 높아지면서 뇌출혈이 발생한 것이다. 찾아보니 뇌출혈은 발생 직후 3시간의 골든 타임 내 응급조치를 취해야 회복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한다. 릴리 아버지는 이미 하루 반나절 이상을 누워 계셨기에 이미 상황은 악화될 대로 된 상태였다.
가족을 곁에 두고 떠나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깨어나려 하는 그의 외로운 사투가 내 것으로 느껴졌다. 어디서 그 의지가 나왔는지, 갑자기 나도 예상치 못한 행동들을 해버렸다. 같이 온 선생님들이 나보고 종교를 물었다. 릴리 가족은 모두 기독교인이다. 아버지를 위한 기도를 하려는 데 다른 선생님들은 자신이 불교라서 못하고, 나보고 하려면 하라고 했다. 누군가를 위한 희망을 비는 데 종교가 무슨 상관일까? 나는 성큼 다가가 아버지 앞에서 릴리 가족과 함께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직감적으로 생사를 오가는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지속적인 사랑과 관심의 표현, 그리고 믿음과 의지라는 걸 떠올렸다.
릴리 아버지가 삶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도록, 지속해서 신체 감각을 자극하고 대화를 거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 즉시 나는 릴리 아버지 곁에 앉아 수족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그의 다리를 만지며 가슴이 더 미워졌다. 그의 손을 잡아 주무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순간 울음이 날 것 같았다. 그가 내 손을 강하게 쥐어 잡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아직 의식이 있고, 깨어나기 위해 온 몸으로 애쓰고 있다는 증거였다. 의지만 있다면 신체적 고통을 이겨내는 기적도 나타날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속으로 ‘당신은 일어날 거예요, 일어날 수 있어요.’라고 외치고, 미얀마어로도 ‘쿤 선생님, 일어나세요.’를 되새겼다. 가족들에게 이 상황은 별 일이 아닌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가 곧 일어날 거라고 확신 있게 말하며 병원을 빠져 나왔다.
처음 만난 릴리의 가족들은 어느새 내 가족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릴리는 내가 이곳에 올 줄 몰랐다며 너무 놀라 하는 눈치였다. 그러면서 계속 고맙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자리에 동참하여 가슴을 나누게 해 준 그녀에게 나는 더 고마웠다.
사무소 밖에서 처음 모인 우리는, 릴리를 데리고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병원을 나와 근처 라카인 전통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이 날 저녁 우리는 잠시라도 슬픔을 잊고 다 같이 배 부르게 먹었다. 그리고 내가 모든 비용을 지불했다. 전혀 망설임도 거리낌도 없이 행해진 나눔이었다. 이 순간에 내가 함께 해 준 이들에게 너무 감사하기만 했다. 미얀마에 처음 와서 현지 가족들의 일부가 되어 버린 다른 단원들을 보면서, 나도 과연 이곳에 가족 같은 친구들이 생길까 의심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내게 이렇게 멋진 친구들이 생길 줄 정말 몰랐다. 그러니 이 순간 자체가 내겐 선물이자 축복이었다. 오늘 밤과 당분간은 릴리 아버지를 위해 온 가슴으로 기도한다.
2017년 3월 4일 토요일 새벽, 고통스러운 시간을 넘어 릴리 아버지께서 운명하셨다. 끝까지 견뎌서 일어나시길 소원했는데, 너무도 힘드셨나 보다. 코이카 사무소 현지 직원들과 함께 월요일 아침 사무소 차를 타고 장례식장에 참석했다. 처음으로 참석해 보는 미얀마에서의 장례식, 그것도 소수를 이루는 기독교 미얀마인들의 장례식이었다. 미얀마 장례식장은 공동묘지와 함께 사람들이 모여 식을 치를 수 있는 회관이 있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모여 앉아 미얀마인 목사님의 성경 말씀을 듣고 찬양의 노래를 부른다. 나는 알아들을 수 없어 답답했지만 사람의 생과 죽음, 그리고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말씀이 끝나고 사람들이 릴리 아버지가 잠든 관을 들고나가기 시작했고, 우리들은 그 행렬의 뒤를 따랐다. 건물 뒤에 마련한 묘소에 릴리 아버지가 눕혀졌다.
마지막 찬양의 인사와 함께 사람들은 떠나고, 어디선가 허름한 모습의 목수가 오더니 관의 뚜껑에 못을 박는 작업을 시작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세상에 나서 살다가 외롭게 관 속에 갇히는 모습을 보며 허무함이 들었다. 그의 영혼은 어디에 숨 쉬고 있을까? 육신은 모습을 잃어버리고 사라질 것이다. 나는 저 관 속에 있는 존재가 나라는 상상을 하며, 오늘 이 순간을 보다 열린 가슴으로 사랑하는데 바치리라 다짐했다. 아버지를 떠나 보낸 릴리의 마음은 어떨까? 그 슬픔이 외롭지 않게 내가 곁에 있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