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은 자신의 삶의 목적은 오직 음악(피아노 연주, 재즈)이라고 생각하며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어렸을 적 자신이 처음 재즈에 대한 전율을 느끼게 해 준 그 공연장에서 연주하는 것을 평생 꿈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그것만 성취된다면 자신은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쭉 살아갈 것이라 믿어왔다. 그러다 그 꿈을 이룰 기회가 기적적으로 찾아왔고, 자신이 ‘새로 태어날’ 그 공연 당일, 사고로 몸과 영혼이 분리돼 영혼의 세계에 갇히게 된다.
그는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아 수 천년을 버틴 한 영혼의 멘토가 된다. 그러나 그에게 모든 것은 지구로 돌아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것과 결부되었고 그 방황하는 멘티 영혼을 그 수단으로 이용하려 한다. 결국 자신은 꿈을 이뤘지만, 뭔가 허무함을 느끼며 영화는 또 다른 국면에 접어든다.
"물고기는 바다를 찾아 평생을 헤맸지만, 결국 자신이 처음부터 바다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인간의 삶을 처음 살아 보는 그 순수한 어린 영혼을 보며 삶의 행복이자 의미는 일상의 아주 작은 순간들을 즐기고, 누리고, 만족하는 데서 온다는 걸 그도, 나도 깨닫는다. 내가 간절히 열망한, 가장 이상적인 나의 모습을 만나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표는 아님을.
최근 나는 십 년 넘게 열망해 온 나의 꿈, 책 출간의 소원을 이뤘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과 여전히 나는 멀다고 여겨질 때 느끼는 우울함과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그것도 못 하는 능력 없는 사람'이라는 자기 비난이 반복 주입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일상의 활력도 저하된다. 나도 그러한 시간을 꽤 오래 보냈다.
그런 내가 꿈을 이루었다니! 그 쾌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내 원고가 최종 선정되었을 때, 출판 계약서에 서명을 했을 때, 책 디자인이 나왔을 때, 그리고 최종 인쇄본이 내 손에 쥐어졌을 때. 수년간의 상상을 실제상황으로 만나면서 '아 내가 정말 이루었구나' 하는 감격이 솟았다.
그러나 그 쾌감은 잠시 뿐이었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 책이 내 인생을 책임지는 것도 아니고, 내 24시간의 모든 것을 채워 주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의 칭찬과 축하를 받는 행복에만 살 수 없다. 나는 다음 여정으로 나아가야 한다.
<소울>을 보며 삶의 수수께끼를 풀어 나가는 것만 같았다. 사실 내가 행복했던 이유는 '책을 냈다'는데 있는 게 아니라 '평소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스스로 노력을 통해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대한 나의 기쁨'에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우리 삶의 목표(꿈)는 단 하나, 단 한순간에만 한정 되어 있는 게 아닌지 모른다. 스스로 평생에 거쳐 여러 작은 도전과제들을 만들어 매일매일 성취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그 자체'에 있지 않을까 한다. 물론 모든 것을 떠나 일상의 여유와 이웃과의 나눔을 느끼는 것에 있어서도.
지상에 몸을 두고 살아가고 있지만 이러한 삶의 의미를 잃고 영혼을 가둔 채
죽은 것이나 다름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묘사한 장면이 오랫동안 여운에 남는다.
마치 예전의 나를 보는 것만 같아서.
지금 내 안에 나의 가치 여부를 결정하는 어떤 오랜 꿈 하나가 더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
나는 그 꿈을 이뤄 주기엔 역부족이라며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다.
그 꿈을 이뤄야지만 진짜 마음에 드는 내가 될 것만 같다.
이 꿈을 너무 무서워하지 않으면 좋겠다.
지금 이 삶의 좋은 것들을 누리고 느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씩만 시도하며
그 도전을 시도하는 과정들 자체에 의미를 두려고 한다.
내가 원하는 미래의 내 모습 때문에 현재를 잃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