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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무모했던' 경험들, 나 또다시 무모해도 될까

누구는 '무모하라' 하고 누구는 '무모하지 말라'고 하는 세상에서

by 은희망

이 세상은 우리 보고 '무모하라'라고 하며 도전을 부축이기도 하고, '무모한 도전'은 이제 그만 해도 좋으니 한 곳에 정착해 제대로 된 일을 하라 한다. 한두 번 무모한 도전을 통해 그동안 살아온 삶의 틀을 깨는 실패 또는 성취의 경험을 하는 것은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모한 도전은 어느 순간 멈춰야 하는 것일까?


카페에 앉아 나의 진로를 생각하다가 문득, '나는 무모한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계속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러다 정말 내가 무모한지 알기 위해 '무모하다'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싶어 져 사전에 검색해 봤다. 찾아보니 '앞뒤를 잘 헤아려 깊이 생각하는 신중성이나 꾀가 없는' 걸 '무모하다'고 한단다. 뭔가 부정적인 의미로 느껴진다. 앞뒤를 충분히 따지지 않고 무작정 하는 행동을 묘사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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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앞뒤를 너무 따져도 아무것도 시도 못하게 되거나 기존의 상황에 고착되는 결과에 놓이게 된다. 아무리 신중하게 앞뒤를 살피고 계획을 했다고 해도 결과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내 삶에 있어 '무모함'은 새로운 경험을 향한 시도를 해서 결국엔 실패감을 줬지만 결국에는 내 삶에 어떤 '교훈'과 '성장의 기회'를 남긴 체험들과 연관된다. 그동안 햇수로 29년을 살면서 나는 몇몇의 무모한 도전을 해 왔다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2학년 말, 조용하고 내성적인 모습으로 지내오던 내가 갑자기 '전교회장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나선 것, 무모했다. 이미 1학년 때부터 실장 등 교내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으며 사교성과 네트워크로 전교생들에게 좋은 평판을 쌓아온 후보가 있었음에도, 나는 선거에 나갔고, 보기 좋게 낙선했다. 받은 표는 30명? (10년이나 되어 기억이 잘 안 난다)도 안 되었던 것 같다. 안 될 것이라는 결과에 대한 예측성이 높은 상황임에도 나는 해봐야 한다는 충동을 느꼈다. 덕분에 내가 가진 위치와 역량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고, 앞으로 장기간에 거쳐 보다 발전할 필요성을 느꼈다.


대학 3학년 여름 방학, 태국에서 내 생 첫 해외 장기체류를 경험했다. 당시 해외 경험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했기 때문에 기회가 왔을 때 앞뒤 생각도 하지 않고 무작정 승낙을 했다. 처음 집을 떠나 언어와 문화가 다른 환경에 홀로 있으면서 나의 모든 생각과 행동의 기반이 취약하다는 게 명확히 드러났다. 6월 중순부터 9월 초까지, 2개월 반뿐인 시간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마치 2년 반 같이 시간이 흘렀다. 빨리 집으로 돌아와 엄마 품에 안겨 쉬고 싶었다. '나 스스로를 포기한 상태로 하루하루 힘겹게 지냈다'는 표현이 적절할 거다. ‘스스로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닫고 온 시간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정말 못 했다'는 생각이 너무 깊게 박여 한국에 돌아와 3학년 2학기를 시작했을 때 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주변 스승님들의 격려와 도움으로 기초부터 나를 다시 쌓아 나갔고, 학업에 열중하는 경험을 처음 해 봤다. 그리고 오랫동안 꿈꿨지만 자신 없었던 교환학생 파견에 도전하기로 다짐하고, 겨울 방학에 토플 학원을 2개월을 다닌 끝에 4학년 2학기에 미국으로 가는 자격을 얻었다. 내가 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을 '할 수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처음 보여 준 경험이었다. 교환학생을 가서 내가 그동안 내가 꿈꿨던 모든 것을 체험하고 왔고, 영어 구사에 자신감이 생겼다. 스스로의 역량 강화에 대한 자신감은 국제대학원 진학으로까지 이어졌다.


세 번째 무모한 도전의 경험은 '미얀마 해외봉사 파견'이다. 대학원을 다니고 있을 때, '이제 학교를 다니는 것은 정말 지겹다'는 생각과 함께 '빨리 해외에 나가 뭔가를 해 보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다. 당시 나는 해외봉사에 대해서도 '나는 전문 기술자격증이나 잘하는 게 없어서 못 간다'는 불가능의 인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마치 나를 위한 신의 준비처럼, '국제개발 전문봉사단'이라는 프로그램이 나에게도 지원 자격을 허락했다. '국제개발 분야 석사'와 '무경력'이라는 두 지원 조건은 해외 파견을 노려온 내가 지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기회로 다가왔다. 앞뒤 따지지 않고 무작정 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지원서를 썼고, 면접을 거쳐 기적적인 합격 결과를 눈으로 확인했다. 홀로 대학원 독서실에 앉아 가슴 뛰는 마음으로 노트북을 화면을 통해 '최종 합격'이라는 단어를 확인했을 때의 그 가슴 떨림. 앞으로 다가올 날들에 대한 무한한 기대를 품었다.


파견 준비를 하면서 기대와 함께 두려움 또한 선명해져 갔다. 사람들 속에서 나만 소외되는 것만 같은, 상처의 과거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다는, 나에 대한 불확실함이 여전히 존재했다. 해외에 가서 외톨이가 되어 우울의 나날을 보내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품었다. 아직까지 나는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독립심이 무르익지 않았다는 현실의 반증이기도 했다. 이 현실을 직접 맞닥뜨리고 깨부수기 위해 미얀마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현재까지의 내 삶에서 가장 큰 실패감으로 남을 시간을 겪었다. 나 스스로 버티기에 강도가 꽤 높은 환경과 조건, 그리고 주변 인물들이 놓여 있었다. 우리나라와 미얀마 정부가 협력하여 현지에 세운 연구소에 파견되었는데, 내가 파견되었을 때 막 개소하여 어수선한 상황이었고 내가 소속된 한국 기관과 내가 파견된 기관 사람들 사이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나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는 격으로 온갖 소외와 무시를 받아야 했다. 게다가 갖 대학원을 수료한 사람으로서 양적 연구방법을 활용해 경제 분석을 해야 하는 현지 단체의 기대에 한참 미달인 연구 실력을 갖고 있었다. 당시 상황에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바뀌어야 할 건 나뿐인데, 나 스스로를 바꿔, 내가 원하는 상태까지 도달할 수 없는 내 모습이 나 자신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나에 대해 무관심하고, 저평가하며, 험담을 하는 사람들 속에 있어야만 하는 현실이 괴로웠다. '완전히 나 혼자'라는 현실이 무섭게 다가왔다. 나를 필요로 하지도, 나를 인식하지도 않는 곳에 있으면서 내가 파견된 명목이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고, 이러한 인식은 곧 '나는 가치가 없다'는 부정적 믿음으로까지 이어져 자존감이 급격하게 낮아졌다. 나를 향한 사람들의 부정을 맞닥뜨리는 것에 대한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꼈을 초반에는 거식증까지 걸려 덕분에 살이 쏙 빠졌다. 내게 주어진 1년을 채워 나가는 게 쉽지 않았다. 중간에 멈추고 한국에 돌아가면 실패자가 되는 것만 같았다. 대신 휴가를 활용해 미얀마 전역을 여행하며 이 나라에 대한 견문을 넓혔고, 파견 기관에서는 내가 가진 정치외교학 전공을 살려 현지 정치 제도를 분석하는 페이퍼를 하나 작성하는데 집중했다. 그러는 와중에 더딜 것만 같던 1년이 끝났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와서 몇 개월은 우울증에 시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부정적 믿음이 여전히 존재했고, 미얀마에서 받은 무시와 상처의 경험이 내 안에서 되새김질했다. 가족과는 잘 지내지 못했다.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의 순간을 나눌 수가 없었다. 대학원 졸업도 계속 미뤄지고 있었다. '논문을 작성할 수 없다'는 부정적 믿음이 나를 괴롭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논문을 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고, '나는 졸업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또 다른 부정적 믿음이 거짓임을 증명해냈다. 필수 과제를 해결하자, 그토록 원하던 '미얀마 재파견'의 기회가 왔다. NGO 봉사단이라는 이름으로 미얀마에 6개월간 파견되었다. 그러면서 그 전에 내 안에 만연했던, '나는 미얀마에 다시 못 갈지도 몰라'라는 불신의 가정이 거짓임을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였다. 다시 미얀마의 땅을 밟았을 때, 아침에 일어나 밖에 나가 '모힝가(미얀마식 쌀국수)'를 먹고 있는 내 자신을 온전히 느꼈을 때의 그 감격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내가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장본인이고, 동시에 이 모든 순간을 가능하게 해 주신 것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내가 준비될 수 있는 상태를 만들게 하기 위해 모든 시험과 시련의 순간을 예비하셨다. 그동안 겪은 나의 고통들은 모두 값어치 있는 것들이다'


이러한 믿음이 내 안에 깊숙이 새겨진 계기가 된 전환점이었다.


총 1년 6개월이라는 미얀마 파견 생활 동안 분명히 '얻은 것'이 잃은 것보다 '훨씬 많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국제개발협력의 현장을 체험했고, 미얀마라는 나라를 깊이 알게 되었고, 내게 있어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나라가 생겼고, 현지화 되어 혼자 살아가는 체험을 했고, 미얀마어라는 제 3의 언어를 읽고 쓰고 말하며 현지에서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게 되었고, 내 몸이 한국에 있음에도 일상 속에서는 늘 미얀마와 함께 하게 되었다. 지금도 미얀마어를 사용하고 있고, 미얀마 가요를 배우며 영상을 찍고 미얀마인 대중들과 소통을 하면서, 미얀마에 '나 허은희'라는 사람에 대해 알고 있는 현지인들이 생겨났다. 스스로를 미지의 세계로 내던졌던, 나의 무모했던 도전은, 미얀마라는 한 나라를 내 삶의 일부로 '초대'할 수 있는 기회를 '선물'해 줬다. 미얀마는 내 삶에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삶의 '일부'가 되어 있었고 이는 지금까지의 내 삶의 방식과 삶에 대한 만족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새로운 도전을 꿈꾸고 있다. 그리고 두렵다, 혹시 내가 지금 꿈꾸고 시도하려는 것이 '이제는 그만 해도 충분한, ' '무모한 일'이 아닌가 하고...... 내가 너무 앞 뒤 생각 없이 가슴이 시키는 일만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그러다 또 실패감에 오랫동안 빠져 버리지는 않을까 하고...... 하나님이 내게 이러한 순간을 주신 의도가 있음을 인식하며, 그 계획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이 이끌어주시는 길을 따라 나아갈 수 있도록 인내하며 나 자신을 맡겨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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