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킹, 어느 누구도 날 뒤흔들 수 없다
어느덧 미얀마에 온 지 54일, 파견 업무를 시작한 지도 25일이 다 되어 갔다.
아무도 내가 하는 일을 신경 쓰지도, 뭘 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았지만, 나 스스로 이 프로젝트의 주인이 되고 싶어 최선을 다 했다. 3주 간 사무소 내 인쇄기를 제일 많이 쓴 사람은 바로 나였을 거다. 공문서를 클릭하고, 인쇄 버튼을 누르고, 인쇄기에서 문서를 가져와 펀치로 구멍을 내 파일에 넣는 반복적인 업무를 지속하면서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손 끝까지 뻗쳤다가도 다시 마음을 다 잡았다. ‘이 사소한 것들도 못 견디면 더 큰 일을 어떻게 해낼까’ 하니 다시 한 번 해 볼 힘이 났다. 그러면서 어떤 큰 일이든 이렇게 사소한 작업들이 모여 성취된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사실, 봉사단원이란 기존에 운영되던 시스템에 추가적으로 투입되는 인력이다. 그 기존의 시스템에서 '추가된' 봉사단원이 자신의 역할을 찾아가는 것은 본인의 몫이다. 동시에 파견된 기관 리더와의 협업을 필요로 한다. 당시 나는 MDI 운영진이 출범한 후에도 아직까지 기관장을 만나 보지 못했다. 나의 임시 보스(boss)는 코이카 사무소장님이다. 'ㅅ' 소장님의 특별한 보살핌 덕분에 나는 점점 자신감을 얻어 가고 있었다. 내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사관 2등 서기관이라고 생각하라."며 "너는 코이카의 입장을 대변해 MDI에 파견될 요원" 이라며 나의 지위를 격상시켜 주셨다. 그 덕분에 나는 더 큰 그림을 가지고 업무를 할 수 있었다. 어느 날은 MDI에서 주최하는 학술포럼에 다녀와서 우울해하는 나에게 ‘행복한 직원’을 만들어야 한다며 함께 탁구를 쳐 주셨다. 사회 생활에서 알아야 할 다양한 교훈들을 틈틈이 마음에 심어 주셨다. 나의 자신감이 점점 커져 보다 과감하게 행동하는 발걸음을 조금 옮겼을 뿐인데, 이렇게 저항이 눈 앞에 닥친 것이다.
일에 열정적으로 심취하는 것도 좋지만, 그 일이 내 모든 것이 된다면 나 자신을 잃을 수도 있음을 느꼈다. 미얀마개발연구원(MDI) 설립 사업이 잘 되길 바라고 그 과정에 내가 기여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해질수록, 내가 넘어야 할 장애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발단은 작은 거였다. 나는 단지 사업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고 싶었고, 그 정보를 가장 잘 알고 있을 용역 업체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의 MDI 사업 담당자(PAO라고 한다)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 사람은 '봉사단'인 내가 이렇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하는 것은 규칙상 옳지 못하다며 선을 딱 그어 버리는 게 아닌가. 나는 모욕감과 함께 무안함을 느꼈다. 상대의 논리로는, 기관 대 기관으로 일하는 입장에서 자신의 책임 영역 밖의 활동을 하는 건 옳지 못한 거였다. 대외적으로 사업에 대한 나의 입장 표명도 함부로 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나는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없는 것 같은 무력감을 느꼈다.
실제로 내가 가장 가깝게 일해야 할 MDI 사업 담당 부소장님은 웬지 모르게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단호하고 무섭게 느껴지는 여자 상사에게 내 목소리를 잘 못 내는 것, 내 약점이기도 했다. 업무적인 목적으로 다가가기 전에 그 사이에 넘어야 할 감정적 벽이 하나 쳐져 있는 것 같아 무언가 요청을 할 때마다 한 번 더 고민해 봐야 한다. 반면 소장님께는 편하게 투정 부리듯이 나의 생각을 모두 표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결코 무시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곳은 엄연한 '조직'이라는 거다. 의사 결정을 하는 데는 절차적 순서가 있다.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입장에서, 가장 윗사람에게 업무를 상의하고, 중간에 있는 사람이 그 내용을 윗사람에게 전해 들으면 기분이 어떨까? 아마 기분이 많이 언짢을 거다. 내가 그 사람의 입장에서 조금만 더 생각하면 분명 이해가 될 텐데 그 마음을 내기가 쉽지 않다. 쉽게 원망을 하게 된다. 지금 내가 하는 원망이 결국 나만이 보는 시각으로부터 만들어진 생각이자 감정이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상황과 나를 구분하기로 했다. 가장 힘든 일이라고 생각할 때 놓아버려야 한다는 메시지가 마음속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그 말을 믿고 나는 당분간 그 사업에 대해서는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욕심을 내려놓기로 했다. 어쩌면 상대방이 지적한 점만 인정하고 보완하면 되는데 나는 상대의 의도를 잘못 이해하고 과도하게 분노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분노는 상대를 향하는 것 같지만 사실 나를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괴로운 건 그 사람이 아니라 나뿐이기 때문이다. 흙탕물이 가라앉으면 다시 맑은 물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함께 내 마음을 먼저 맑게 하기로 했다. 상황 탓을 그만 하고 나를 평화 속에 두고 싶다. 어떤 상황도 나를 불행하게 이끌 수는 없다.
MDI가 나의 성장을 위한 놀이터이자 과제가 될 수는 있지만 내 행복을 지배할 모든 것이 될 수는 없도록 일상 속 나만의 즐거움과 영역을 가꾸어 나갈 필요성을 느낀 계기가 되어 감사했다. 나는 MDI 외에도 나를 찾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현지에서 영화 ‘더 킹’을 보며 느낀 감동으로 나에게, 그리고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을 적었다.
이제 가슴에 품은 억울함과 분노를 거두고 고개를 들라.
세상에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나?
나를 해칠 존재가 어디 있는가?
내가 무엇을 하든 나를 지지해줄, 사랑하는 존재들이 곁에 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세상은 살아볼 가치가 있지 않은가?
나를 끌어내리게 하는 것은 그들이 아닌, 그들에게 휘둘림을 허락한 바로 나 자신이다.
현재 미워하고 싶은 그들을, 나를 더욱 강하게 단련시켜 줄 스승으로 삼아라.
그들을 정면으로 바라보라.
세상에 휘둘리지 말자.
휘둘리면 잃는 것은 세상이 아닌,
나의 현재, 그리고 행복뿐이다.
상황을 주시하라.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라.
그리고 현재 나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하라.
세상을 바꾸려는 욕심을 접고, 나 스스로 원하는 변화가 되자.
먼 길을 돌아가더라도 양심이 향하는 곳에 발을 디뎌라.
세상의 유혹을 이겨낼 지혜를 갖춰라.
문제의 근원을 찾아 해결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라.
돌아온 길을 원망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는 자원으로만 삼아라.
상황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상황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상황의 주인이라는 믿음으로 상황을 마주하라.
내가 가진 강점은 무엇인가?
'이해관계가 없다는 점'이다.
오로지 선의 목표를 위해서만 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조건이다.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고, 선을 향한 순수한 의지가 나를 이끈다.
이 조건을 감사하게 여기고 배움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지금부터 나는 새롭게 다시 시작한다.
허은희, 파이팅
MDI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예전 글에서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https://brunch.co.kr/@myanmarfan/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