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도쿄행_준비가 안 됐더라도 떠날 줄 알아야지

서른 살에 떠난 30일간의 배낭여행 1/30

by Hongchic
2017/10/6 갑자기 떠나게 됐다.

이런 저런 얘기를 구구절절 다하자면 오늘 하루가 다 지날지도 모르니 간추려서 말하자면, 이직을 앞두고 3년 근무 포상으로 받았던 1개월 안식휴가를 소진해야됐다. 얼떨결에 30일간 나는 출근을 하지 않아도 괜찮게 돼버렸다. 무엇을 해야할까 고민을 하다가 무작정 비행기표를 끊었다. 추석 연휴가 끝나갈 무렵으로. 그래서 나는 오늘 떠났다.


막상 떠날 날짜를 정하고 나니 엄청 바빠졌다. 바쁜 이유도 다 설명하자면 날이 샐 거 같으니 이것도 요약하자면, 아이러니하게도 회사를 옮기기 전 새로운 업무를 맡게됐고(읭?), 나는 우왕좌왕 그 일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온종일 나의 에너지를 업무에 퍼붓고 퇴근하고 나서는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일단 비행기표는 끊었으니, 숙소와 일정은 뭐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하는 심정이었다. 그 때 알아차려야했다. 떠날 시점이 점점 더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아.. 나는 결국 대충 떠나게 되버렸다.


안식휴가를 일주일 앞두고, 제주 출장이 잡혔다. 아침 일찍 김포공항에 도착해 1층 엔젤리너스에 앉아서 어떤 나라를 가야할지 정했다. 도쿄행 비행기표와 도쿄에서 폴란드로 떠나는 비행기표는 예약해 놓은 상황. 그러니 갈 곳은 도쿄와 동유럽. 간단하고만. 아무튼 그래서 30일 간 내가 방문할 곳은 아래와 같다.


도쿄 - 폴란드 - 체코 - 헝가리 - 슬로베니아 - 크로아티아


그러므로 오늘은 일단 도쿄에 왔다.

아침부터 운수가 좋았다.


<운수가 좋았던 내역>

- 버스 터미널에서 인천 공항 리무진 버스를 1분도 안 기다리고 바로 탔다. (물론 화장실이 가고 싶은 걸 한시간 반동안 참아야했지만)

- 도쿄로 가는 비행기가 저가 항공이라 수화물 키로수가 넘으면 추가 비용을 더 내야지 다짐했지만 봐줬다. (럭키)

- 인천공항에 사람이 별로 없어서 모든 업무를 수월하게 봤다. (환전소 세 번가고, 유럽 유심 찾고 지하 1층부터 3층까지 다리 아파 죽을뻔)

- 비행기 내 옆자리에 아무도 앉지 않았다.

- 일본 기상이 안 좋은 탓에 비행기가 엄청 흔들려서 내가 도쿄를 가다가 죽는구나 오늘 어쩐지 운수가 좋았어라고 생각했지만, 죽지 않았다. (먹구름을 비행기가 통과하면 바로 옆에서 번개를 볼 수 있다)

- 도쿄에 비가 겁나 왔지만 나리타 공항에서 호스텔까지 기차랑 전철을 겁나 타야했기 때문에 비를 1도 안 맞았다. (전철역 입구에서 여동생이 마중나와줌/ 이번 연휴에 내 동생은 스페인을 이주 간 여행하고 도쿄로 이동해 나와 4박 5일을 함께한다. 그리고 현실 세계로 돈을 벌기 위해 돌아간다. 불쌍...)

- 호스텔이 좋음 (운플란 카구라자카)


화룡점정은 호스텔에 짐을 두고, 저녁밥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였다.

동생이 근처에 볶음밥을 파는 식당을 찾아놨다길래 따라나섰는데 문을 열어보니 심야식당에서 나오는 주인 아저씨 같은 분이 바 테이블 안쪽에서 요리를 하고 있고, 회사원 아저씨와 회사원 이모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심야식당 주인 아저씨는 영어를 하나도 못하는 상태.


내가 물었다. "What's your famous dish?"

회사원 아저씨"가라아게"'

나 "I'm very hungry. Is there Rice?"

주인 아저씨 "~~~나이데스요"

회사원 이모 "How about noodle?"

회사원 아저씨 (휴대폰으로 번역기 어플을 실행한 후, 우리에게 보여주며) "야끼소바 오이시"


아무튼 이렇게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생맥주와 안주를 시켰다. 약 2주 간 동생의 여행기를 들으며 신나게 음식을 먹고 있는데, 주인 아저씨가 곱창을 후루룩 볶으시더니 돌연 우리에게 가져와 이렇게 말을 한다.

주인 아저씨 "(고개짓으로 회사원 아저씨를 가리키며)프레젠또"

오! 이렇게 황송할 수가.

나와 동생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자 주인아저씨는 또 지짐이를 가져와 또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의)프레젠또"

으어.. 그 분위기를 어떻게 설명해야할 지 모르겠다.

아저씨는 우리를 학생으로 보셨고(아닌데...), 자매가 여행을 다니는 게 기특했던지 자꾸만 음식을 프레젠또로 보내주셨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복 받으실거에요.


그 식당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모두 아는 사인지, 아니면 그냥 인사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 장면을 보면서, 마치 내가 드라마 심야식당의 어떤 한 장면 속에 출연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30일 간의 여행 그 첫째날.

왠지 느낌이 좋다. 비록 도쿄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지만, 첫 날 내가 겪은 수많은 행운을 생각하면 언젠가 그칠 이정도 비쯤이야!


덧.

호스텔 휴게실에서 일기를 쓰고 난 뒤, 갑자기 땅이 흔들린다.

이게 무슨일이냐. 이럴 때는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가야 하나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