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쿄_마음껏 생각하고 멍 때릴 수 있어서 행복하다

서른 살에 떠난 30일간의 배낭여행 2/30

by Hongchic
메이지 신궁 - 오모테산도 힐 - 네즈 미술관- 시부야 스크램블 - 다이칸야마 츠타야


차가운 도시, 도쿄 한가운데 이렇게 커다란 신사가 있다니.

푸릇푸릇한 숲을 보니 기분이 좋아진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한국인으로서 그리 기분 좋은 장소는 아니니까, 복수하는 마음으로 피톤치드를 잔뜩 마셔야지. 나무와 숲을 마음껏 즐기기엔 제격인 곳이다. 호스텔에서 내주는 빵과 커피를 먹고 동생과 메이지 신궁을 찾아 나섰다. 울창한 숲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주말이라 그런지 일본 전통 의상을 입고 결혼식을 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다. 곧 부부의 연을 맺는 여성과 남성이 기모노를 입고 앞장서고, 가족들이 함께 줄을 서서 걸어간다. 나를 포함한 수많은 외국인들이 좋아했다. 정말 축복이 넘치는 결혼식이다. 동생과 나는 맨 앞에 깃대를 들고 걸어가는 청년들의 시급이 얼마일지 생각해보았다.


오늘은 토요일. 어딜 가도 사람이 많을 걸 각오하고 나왔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내가 도쿄를 구경하러 온 건지, 일본 사람을 구경하러 온 건지 잠시 헷갈릴 뻔했다. 메이지 신궁에서 오모테산도로 이동해 명품의 거리를 구경했다. 명품이 얼마나 좋은지, 얼마나 비싼지 모르는 난 그 생소함에 신기할 따름이다. ‘저게 뭐야’라고 생각한 옷도 엄청나게 비싸다. 모르는 게 약인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연히 Luke’s Lobster sandwich를 발견하고 사 먹었다. 동생이랑 한 입씩 사이좋게 나눠먹었다. 오모테산도 골목에 들어선 편집샵은 예쁘고 잘 정돈돼 있지만 무지 비싸다. 에코백을 하나 사고 싶었는데 10만원을 주고 사고 싶진 않아서 내려놓았다.

오모테산도 힐, 왜 한쪽 방향에만 차가 많을까?

친구 Y가 지난번 도쿄 여행에서 좋았던 곳이라고 추천해준 네즈 미술관. 정원이 참 예쁘다. 중, 고등학교 미술 시간에 일본과 한국의 정원을 비교했던 게 생각났다. 일본은 인공미, 한국은 자연미. 중간고사 점수를 올리기 위해 이런 지식을 달달 외웠다는 걸 생각하니 웃기다. 그리고 그 지식이 이제 와서 이렇게 생각나는 상황도 상당히 우습다.

정원은 같은 곳으로 가는 길을 여러 갈래로 만들어 놓았다. 마치 일본 지하철 같다. 어떤 역에서는 너무 많은 노선이 지나다녀 방송에서 안내하는 성우가 숨이 찰 지경이다. 일본 지하철 노선을 보다가 머리가 너무 아파서 한국 지하철 노선도를 보며 눈을 정화시켰다. 아, 이제야 숨이 쉬어진다. 점심으로 돈가스를 먹고, 모든 여행객들이 가는 블루보틀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다이칸야마 츠타야로 가던 중, 시부야 스크램블을 보았다. 어차피 환승할인도 안되니, 갈아타는 역에서 나왔다 들어가도 상관없다. 교통비를 하루에 만원 넘게 쓴다. 우리 집 안산에서 신촌까지 4호선 -1호선 -2호선 이렇게 두 번을 갈아타도 2,000원이 안 넘는데. 너무 하다 싶다. 처음에 동생이 시부야에 스크램블 에그를 먹자고 하는 줄 알고, 맛있는 브런치 집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달걀이 아니고 사람이 스크램블 되는 거였다! 엄청 큰 횡단보도에 수많은 사람이 서로 섞인다. 역시 인간의 적은 인간이다. 이 곳을 빨리 떠나야 해! 위험하다고!


지적 자본론이라는 책을 보면서 츠타야 서점에 한 번 꼭 들르고 싶었다. 서점이라는 공간으로 사람들이 다시 모일 수 있도록 만든 기획. 어떻게 하면 그런 기획력을 뿜어낼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건 열정과 집념일 텐데. 과연 나에게 그런 열정이 있을까. 이번 여행을 통해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평소 나의 태도를 고쳐보고 싶다. 때로는 고집스럽게 보일지라도 밀어붙일 수 있는 근성과 카리스마(?) 같은 게 서른 살의 나에겐 필요하다. 이미 망한 것 같다는 생각도 함께 든다. 하. 그냥 마이웨이 해야지.


일본어를 모르니 사진책 코너에서 시간을 보냈다. 다양한 컨셉이다. 야생 동물, 아기, 성소수자, 기하학적인 무늬 등 다양한 컨셉의 사진책을 구경했다. 한 주제에 대해 이렇게 깊이 팔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세상은 넓고 사람들은 다양하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우주를 담고 있다. 신비로운 지구. 돌아오는 길에 밤하늘이 너무 예뻤다. 다리가 몸에서 분리되는 건 아닌지 걱정하며 시부야를 거쳐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은 환승이 안 되는 덕에 시부야에 있는 초밥집에서 해결했다. 하루가 이렇게 길었다니. 마음껏 생각하고 멍 때릴 수 있어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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