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자코파네_훗날 이 여행이 자코파네로 여겨지겠지

서른 살에 떠난 30일간의 배낭 여행 8/30

by Hongchic
자코파네 - 모로스키에 오코 트래킹 - 크라쿠프 까르푸 컵라면 쇼핑
오늘도 새벽 다섯 시에 눈이 떠졌다.

시차적응이 안돼서 그런가. 아님 긴장을 해서 그런가. 몇 분을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더니 잠이 달아났다. 일어난 김에 아침 일찍 크라쿠프 근교에 위치한 자코파네에 가보기로 했다. 버스 터미널까지 걸어가 오전 7시 10분에 떠나는 자코파네 버스 티켓을 19 즐로티(한화로 5,700원)에 구매했다. 가는 길에 마트에서 아침으로 먹을 샌드위치와 물 그리고 과자를 샀다.

이른 아침 버스 터미널로 가는 길. 겨우 이틀인데 이 동네 골목들이 익숙해졌다.
진짜 맛있었던 샌드위치!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내가 탄 버스는 작은 미니버스였다. 이 버스를 타고 2시간 30분 간을 가야 한다. 더군다나 내 옆에는 엄청난 몸집에 시끄러운 남자애가 앉았다. 본인 좌석 더하기 내 자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그는 창밖에 보이는 모든 간판을 입으로 소리 내어 읽는다.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이 자식이! 너 어느 나라 사람이냐! 결국 그 아이의 눈을 쳐다보며 조용히 해달라고 말했다. 내 표정이 안 좋았던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누나 서른이다. 조용히 해라.

크라쿠프에서 자코파네로 가는 버스 시간표.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버스 안에서 좀처럼 잠을 잘 수 없었다.

오전 9시 30분 자코파네 터미널에 도착했다. 호스텔에서 만난 한국인 소녀 정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하는 나와 자코파네의 아름다운 호수인 모르스키에오코를 함께 트래킹 할 동행이다. 그녀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독일에서 일하면서 5개월간 지냈고, 11월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기 전 유럽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여행을 하고 있다. 모르스키에오코로 가는 버스에 탑승해 30분 간을 달려 트래킹 코스에 도착했다. 이제부터는 나의 두 다리에 모든 걸 맡겨야 한다.

트래킹 시작! 신나게 올라가보자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길을 걷는다. 오랜만에 한국말이라 너무 신난다. 정하도 독일에서 지냈던 5개월 간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친절하고 좋은 룸메이트부터 시작해 할 일 없는 독일인이 조깅으로 시간을 떼운다는 것. 외국인 노동자의 서러움 등. 수다를 떨면서 열심히 쉬지 않고 걷다 보니 절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흘러가는 순간이 아쉬워 카메라를 들이대 보지만, 보는 것만큼 담기지 않는다. 열심히 눈 속에 꾹꾹 눌러 담아가야지.

도란 도란 얘기를 나누며 걷는 가을 산 길.

모르스키에오코까지 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나처럼 두 다리로 걸어가거나, 입구에 있는 마차에 탑승하는 것. 마차를 타는 비용은 우리 돈으로 1만원 정도. 본인의 체력이나 여유 시간에 따라가는 방법을 선택하면 된다. 나는 아침 일찍 도착해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직접 걸어서 올라갔다. (도보로 갈 경우, 넉넉잡아 왕복 5시간 정도는 생각해야 한다.)

아름다운 풍경이 카메라에는 다 담기지 않는구만.

출발할 때 하늘이 흐려서 아쉬웠는데 열심히 걷다 보니 맑은 하늘이 나타났다. 파란 하늘과 만년설이 쌓여있는 산, 노랗게 물들어가는 단풍을 보며 걷는 길은 내딛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가을을 만끽하며 트래킹하는 외국인 가족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우리 엄마 아빠도 등산을 좋아하는데, 같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 생각에 집에 있는 침대와 내 방이 살짝 그리워졌다. 나이 서른에도 엄마 아빠가 보고 싶다.

구름이 걷히더니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열심히 걸어 모르스키에오코 호수에 도착했다. 에메랄드 빛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호수는 심장이 아플 정도로 아름다웠다. 자코파네를 리뷰한 모든 블로거들이 적은 말이지만 폴란드 속담에 왜 ‘삶에 지칠 땐 자코파네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말이 있는지 이해가 갔다. 바쁜 생활 속에서 지쳐갈 때 아름다운 곳에 방문했던 그때의 나를 회상하면 조금은 기분이 나아진다. 8년 전 친구 예나와 함께했던 배낭여행이 나에게는 자코파네였고, 이번 여행도 미래의 나에게 자코파네로 여겨지겠지.

심장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모르스키에오코
깨끗한 호수와 알록달록 물든 단풍이 엄청 아름다웠다.

호수 앞에 앉아 싸온 샌드위치를 꺼내 먹으며 매점에서 파는 맥주로 정하와 트래킹 완주를 자축했다. 한참 시간을 보내다 올라온 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 있던 해가 산 뒤로 떨어지자 기온은 급속도로 떨어졌다. 점퍼 하나에 의지했던 나는 벌벌 떨며 산에서 내려와 자코파네 시내로 가는 버스에 탑승했다. 추위에 떨다가 따뜻한 곳으로 들어온 탓에 1분도 안되어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폴란드 맥주 TYSKIE는 진짜 맛있다.

버스에서 내려 정하와 저녁 식사를 했다. 폴란드에서 먹는 마지막 저녁식사. 메뉴는 피에로기와 절인 양배추를 곁들인 폴란드식 돈가스, 그리고 플리츠키라는 폴란드식 감자전이다. 두 명이서 12,000원에 잔뜩 배불리 먹었다. 나는 종일 일정을 함께 했던 정하와 헤어져 오후 6시 버스를 타고 2시간 30분을 달려 다시 크라쿠프로 돌아왔다. 크라쿠프 버스 정류장에 내리니 마치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하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 맞다.

열심히 걸은 덕분에 꿀맛이었던 음식들.

대박! 버스터미널에 있는 까르푸를 구경하다 한국 컵라면을 발견했다. 인천에서 도쿄로 출국할 때 저가 항공기를 타는 바람에 무료 수화물 무게가 적어 한국 음식을 싸가지 못했다. 일본 음식은 나름 익숙해서 괜찮았는데 유럽에 오니 먹는 게 영 입에 잘 안 맞는다. 국물… 국물이 먹고 싶다. 그런데 한국 컵라면이라니! 가격도 약 800원으로 한국과 비슷한 편. 육개장과 김치 사발면을 두 개씩 총 4개를 담았다. 오늘 종일 추웠고, 많이 걸었으니 하나는 호스텔에서 먹어야지! 농심은 알고 있으려나, 폴란드로 수출된 컵라면을 한국인이 사서 먹었기 때문에 외화 벌이에 실패했다는 사실을ㅎㅎ

인간이 무엇을 먹으면서 살았는지가 이토록 중요했다니. 한국 컵라면을 발견하고 거의 울 뻔 했다.

숙소에 돌아와 방문을 열어보니 4명이 새로 들어왔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내일 떠날 짐을 미리 챙겼다. 그리고 아까 구매한 컵라면 하나를 공용 키친에서 후루룩 먹는다. 매운 국물이 몸속에 들어가니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기운이 솟는다.


내일은 프라하로 이동하는 날. 아침부터 움직여야 한다. 일단 빨리 씻고 자야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