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크라쿠프_트루먼쇼 같은 건가.

서른 살에 떠난 30일간의 배낭여행 7/30

by Hongchic
소금 광산 투어(비엘리츠카) - 바벨 성 - 바벨 대성당 - 비와스 강 - 성모승천 교회 나팔
모두가 날 위한 연기자가 아닐까라는 헛된 생각을 했지만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소금 광산이 궁금했지만, 너무 바쁘고 게을렀던 탓에 미리 예약하지 못했다. 어제 숙소에 돌아와 한참을 찾아보다가, 인터넷에서는 최소 2일 후의 일정만 예약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일정을 미룰까 고민하다 한 자리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아 현장에서 표를 구매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호스텔 창문으로 보이는 크라쿠프 시계탑. 시간을 알 수 있는 새로운 방법.

크라쿠프는 구글맵에서 대중교통 정보가 조회되지 않는다. 따라서 미리 검색을 해 가거나 Jak do jade라는 어플을 사용해야 하는데, Jak do jade 어플은 아이폰에서 4.99달러나 한다. 대중교통을 많이 사용한다면 비용을 감안하고 다운로드하겠지만, 크라쿠프는 도보 여행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웹사이트에 접속해 미리 조회한 후, 경로를 정리해서 가보기로 했다. 예전에 스마트폰이 없을 때도 종이 지도만 가지고 이태리, 스위스, 오스트리아, 체코를 잘만 다녀왔는데 이 정도쯤이야.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 날씨가 무척이나 좋아서 기분도 랄랄라.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 버스표를 끊고 바로 304번 버스에 탑승했다. 나와 비슷한 상황인 분들을 위해 팁을 드리자면, Jak do jade 웹사이트(https://jakdojade.pl/)에 접속해 크라쿠프에서 비엘리츠카 소금 광산으로 가는 방법을 조회한 후, 버스 정류장 명을 확인한다. 그리고 구글 맵에 버스 정류장 명 Dworzec Glowny Zachod을 붙여 넣기 하면 쉽게 정류장을 찾을 수 있다. 내리는 정류장 명은 Wieliczka Kopalnia Soil. 많은 사람이 내리는 곳에서 같이 내리면 되는데 불안하다면, 그 전 정류장인 Wieliczka Park가 보이면 내릴 준비를 하면 된다.

소금 광산 도착! 무사히 표를 끊고, 커피 한 잔을 사마셨다.

소금 광산에 도착해 티켓 오피스에서 표를 끊었다. 아무 문제없이 오전 10시 30분 표를 구매. 영어 가이드가 있는 투어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여유롭게 투어에 참석했다. 자 이제 두 시간만 열심히 걸으면 된다. 수많은 계단을 걸어내려간 뒤, 소금 광산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친절한 가이드 바브라는 각 공간에 대한 설명을 정성껏 해주었다. 소금 광산이 발견된 계기부터 시작해 다양한 사건 사고와 기네스 기록을 비롯해 광산과 관련된 다양한 일화들을 소개시켜줬다. 어딜 가나 수다쟁이는 있는 법. 영어 투어라 그런지 미국인 아줌마가 엄청나게 수다스럽다. 내가 잘 못 알아 들어서 다행이지, 알아들었으면 되게 성가실 뻔했다. 호기심도 많고 성미도 급한 아줌마가 왠지 친근하게 느껴진다. 조용히 뒤에서 수다쟁이 아줌마를 귀여워했다.

소금으로 만들어진 내부 조형물


소금으로 만들어진 최후의 만찬. 내 우측 가슴에 붙어 있는 스티커를 구매해야 사진을 마음껏 찍을 수 있다. (10즈워티)

두 시간 여를 걷고 난 뒤, 개인 관람시간이 주어졌다. 식사를 해도 되고, 극장에서 관련 영상을 관람해도 된다. 나는 광산 안 식당에서 비고스(양배추와 돼지고기를 넣고 푹 익힌 폴란드 전통 음식)와 감자튀김을 시켰다. 맛있다! 비고스는 마치 김치찌개 같은 맛. 감자튀김과 함께 먹으니 김치찌개에 밥을 먹는 기분이다. 피에로기는 별로 였는데 비고스는 성공적이다. 아 라면 먹고 싶다. 캐리어에 진짬뽕 하나 넣어 왔는데, 그건 정말 힘들 때 꺼내서 먹어야지.(진 짬뽕은 체코에서 만난 독일에서 여행 중인 한국인 소녀에게 주었다.) 7년 전 배낭여행에서도 가장 힘든 건 빵을 먹는 거였다. 미역국에 밥 말아서 김치랑 먹고 싶다. 한국인에게 김치가 없는 삶은 너무 나도 힘들다.

김치찌개 맛이 나는 비고스와 감자 튀김. 파프리카 가루를 넣어 매콤하게 끓인 비고스는 맛있었다.

304번 버스를 타고 다시 크라쿠프로 돌아왔다. 아침에 날씨가 무지 좋았는데 다시 구름이 많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제 돌아봤던 시내 명소들을 다시 돌아본다. 낮에 보는 것과 밤에 보는 것이 너무나 다르다. 어제는 들어가지 못했던 바벨 성과, 바벨 대성당을 돌아보고 비와스 강도 감상했다. 희한하게 폴란드에는 아시아 인들이 정말 없다. 오늘 마주친 수백 명 중에 아시아 인은 10명도 채 되지 않는 것 같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서양인들 속에서 나는 개썅 마이웨이를 실현했다. 즐겁다.

성 바울 성당. 구름이 많아졌다.
비와스 강. 잔잔한 강을 보면서 여유를 즐겼다.

크라쿠프에서 꼭 보고 싶었던 게 있었는데, 그건 성모승천 교회의 정시 나팔 연주다. 몽골의 침입을 알리기 위해 죽는 순간까지 나팔을 불었던 나팔수를 기리는 의미로 성모승천 교회에서는 매 정시마다 나팔을 분다. 그 나팔 소리는 갑자기 뚝 끊기는데, 당시 나팔을 불다 목에 화살을 맞았던 나팔수를 애도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기 5분 전 나는 성모승천 교회 맞은편 분수대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아, 5분만 기다리면 되는데… 갑자기 바람도 마구 불어온다. 사람들이 피난을 가기 시작했다. 조금 고민하다가 비를 좀 맞고 기다려서 보기로 결심했다. 도쿄에서 폴란드까지 11시간 비행도 잘 참아냈는데 5분의 기다림이 뭐 어렵겠느냐. 그러나 차가운 비 속에서의 300초를 버티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아무튼 굵은 빗방울을 참아내며 나팔수를 봤고 나팔 소리도 들었다. 다 이루었도다!

불켜진 창문으로 나팔이 보인다. 굵은 빗방울을 참아내며 본 나팔수.

오늘 광장에서는 비눗방울이 떠다니고,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은 신랑 신부가 키스를 하는 드라마틱한 장면이 계속해서 연출됐다. 트루먼쇼 같은 건가. 모두가 날 위한 연기자가 아닐까라는 헛된 생각을 잠시 했지만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나를 위한 연기자는 아니겠지? 나중에 광장에서 비눗방울을 불며 환상을 팔아야지.

피곤해져서 좀 이른 시각에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은 맥주를 한 잔 마시고 푹 잘 예정이다. 일기를 정리하려고 식당에 나왔는데 우크라이나 아저씨가 구글 번역기를 들고 내 옆에 앉아서 계속 뭘 물어본다. 몇 살 이냐, 왜 왔냐, 남자 친구는 있냐, 결혼은 언제 할 거냐. 갑자기 호스텔 식당이 추석 큰집처럼 변했다.


캐나다 퀘벡에서 온 스물한 살 난 청년도 내 앞에 앉아서 구글 번역기를 통한 우크라이나 아저씨의 질문 공세를 받는다. 아저씨는 정말 영어를 한마디도 못한다. 자꾸 나와 퀘벡 청년에게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얘기한다. IT의 발전이 아니었더라면 이 아저씨와의 대화는 불가능했을 거다. 아저씨가 갑자기 구글을 극찬한다. 귀여운데 좀 귀찮은 아저씨다. 노트북을 들고 방으로 대피했다.


구글 번역을 통해서 대화를 나눴던 우크라이나 아저씨(우)와 퀘백의 젊은이(좌). 귀찮다고 써놨지만 모두 다정하고 좋은 사람들이다.

덧.

지금은 10시 얼른 자야겠다. 호스텔 여성 6인실에 나 혼자 뿐이다.

비수기 여행은 이렇게 여유롭구나.

가을 정취가 가득. 낙엽을 밟으며 공원을 산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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