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에 떠난 30일간의 배낭여행 17/30
부다페스트 > 블레드(슬로베니아)
아침 7시 30분에 류블랴나로 출발하는 버스를 타야 했기 때문에 오전 6시에 일어났다.
내가 왜 그랬을까. 무사히 체크 아웃을 한 후, 어제 미리 사둔 트램 티켓을 들고 데악광장 역으로 향했다. 뭔가 시간이 아슬아슬하다. 늦으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20kg짜리 캐리어를 짊어지고 계단을 헐레벌떡 내려왔다. 잠재된 근력을 모두 사용했다. 존멋!
열차는 10분 뒤 도착 예정이다. 으 방금 지나갔다. 여유 시간이 있는데도 마음이 불안하다. 한국이 아니라서 그런가. 무사히 역에 도착해 시계를 보니 15분 전, 6시간 동안 버스를 타야 하니 점심으로 먹을 샌드위치를 사야 한다. 빈속에 오랫동안 버스를 타는 건 너무나 괴로운 일이다.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샌드위치를 하나 포장했다.
전광판에서 플랫폼을 확인하고, 고고. 뒤는 돌아보지 않는다! 플릭스 버스가 마침 와 있었고 앱으로 확인을 받은 뒤, 행선지인 류블랴나를 말하고 짐을 실었다. 좌석에 앉자 긴장이 풀리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해냈다고! 겨우 예약한 버스에 탄 건데 마치 연말 평가에서 최고 등급을 받은 기분이다.
아침 버스라 좌석은 여유로웠다. 옆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고, 승객들도 띄엄띄엄 앉아서 두 다리를 쫙 펴고 편안하게 자리를 잡았다. 나도 한국에서 챙겨 온 어린이 멀미약 하나를 쭉 들이키고 가능한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물과 초코우유, 샌드위치도 있으니 든든하구나. 꾸벅꾸벅 졸다가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기도 하고, 창밖을 내다보기도 하면서 6시간을 달려 슬로베니아의 수도인 류블랴나에 도착했다.
슬로베니아 국경을 넘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행하는 한 달간 늘상 맑을 수만은 없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캐리어에 있어서 꺼내기 힘든 나의 삼단 우산이 생각났다. 유럽 사람들은 웬만한 비는 그냥 맞는데 뭐.라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사람들이 버스내리자마자 우산을 펴 들었다. 맞을 비가 아니었던 건가. 아무튼 류블랴나 터미널에 도착해 블레드로 가는 버스 티켓을 끊고 캐리어를 열어서 우산을 찾아냈다. 비를 피할 겸 터미널 안에 있는 맥도널드에 가서 베지 버거를 주문해 점심으로 먹었다. 자리가 없어서 노부부가 앉은자리에 'could i sit here?'하고 양해를 구한 뒤, 합석을 했다.
버스를 타고 두 시간을 더 달려 블레드에 도착. 빗줄기는 더 굵어졌다. 그래 오늘은 라운더리 데이다. 밀렸던 빨래나 해야지. 빗속에 호스텔 간판을 잘못 보고 들어갔다. 자기 손님인 줄 알았던 주인이 처음에 웃으며 날 맞이했는데, 아닌 걸 알자 갑자기 정색을 하며 화난 듯이 아니라고 나가라고 한다. 미안하긴 하지만 나도 짜증이 난다.
이것이 땡큐ㅅㅂ의 상황이다. 여행을 하며, 고맙고 젠틀한 사람도 많이 만났지만 무례하고 인종 차별을 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럴 땐 땡큐ㅅㅂ정신으로 무장을 한다. 일단 당신이 할 일을 해줘서 땡큐, 하지만 내 기분은 ㅅㅂ. 그냥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호스텔은 친절하고 나름 아늑한 편이었다. 블레드에서 가장 평이 좋은 호스텔이라 그런지 여행객들이 많았다. 짐을 풀고 빨래를 들고 나왔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가게가 모두 문을 닫았다.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구입했던 한국 컵라면은 달랑 한 개 남았다. 오늘 그 컵라면을 여기서 까야겠다.
코인 세탁소에서 빨래를 돌리며 23살 스페인 소녀 Judith를 만났다. 알고 보니 나와 같은 방을 사용하는 룸메이트. 그녀는 한 달간 자동차로 유럽을 여행하는 중이지만 카탈루냐 독립 선거 때문에 고향인 바르셀로나로 돌아간다며 본인의 여정을 설명했다. 당차고 씩씩한 Judith의 바람은 카탈루냐가 독립된 국가로 인정받는 것. 국제 뉴스의 당사자를 만나다니 신기하다. 나도 카탈루냐 독립과 관련된 자세한 내막을 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조기에서 뱅글뱅글 돌았던 빨래가 뽀송뽀송 잘 말랐다. 신라면을 뜯어서 먹는데 굉장히 맵다. 그새 혀가 매운맛을 잊었나 보다. 물론 그래도 너무나 맛있다.
내일은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었으면..
덧,
오늘은 6000보 밖에 안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