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블레드_계획이 현실이 되고 경험이 된다

서른 살에 떠난 30일간의 여행 18/30

by Hongchic
블레드 호수 > 빈가르 협곡 > 보힌 호수
아침 일찍 일어나 창밖을 보니, 하늘이 청명하다.
어제와는 확실히 다른 하늘! 맑구나~

와! 룸메이트 Judith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일찌감치 나갈 채비를 하고 Judith와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눴다. 페이스북 아이디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여정을 응원했다. 호수로 가는 길에 호스텔에 숙박하면 할인 혜택이 있는 바에 가서 모닝 토스트와 커피를 마셨다. 되게 단순한 구성의 아침 식사지만 기분에 맑은 날씨 필터가 씌워져서인지 꿀맛이었다.

토스트와 커피. 블레드 1004 호스텔에 묵으면 아주 저렴한 가격에 가벼운 아침식사를 할 수 있다.

블레드 호수를 보는 순간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와 이런 풍경이라니.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꿈인가! 여행 온 외국인 부부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오오 너무 행복하다. 공기도 맑고 풍경도 아름답다. 호수를 따라 쭉 걸어보기로 했다. 블레드 섬을 보며 사진도 찍고, 트리글라브 산을 배경으로도 사진을 찍었다. 어제는 비도 오고 짐도 무겁고 좀 울적해져서 다음 지도 로드맵으로 한국에 있는 우리 집 사진을 찾아봤는데 오늘은 너무 행복하다. 이렇게 일희일비하는 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가을의 블레드 호수. 보는 순간 탄성을 내지를 수 밖에 없었다.
비가 와서 우중층했던 기분이 한 번에 싹 가셨다. 이런 나를 어떻게해야할 지 잘 모르겠다.

호수를 돌다가 어제 카페에서 연락이 닿은 다연 씨에게 메시지가 왔다. 25살 다연 씨는 일하며 세계 곳곳을 여행하고 있는 친구로 오늘 빈가르 협곡과 보힌 호수를 함께 다녀오기로 했다. 그녀는 날씨가 좋아서 일찍 도착했다며 11시 45분까지 버스터미널에서 만나자고 메시지를 보냈다.


호수는 생각보다 넓었다. 메시지를 받은 시각은 11시 20분. 나는 당연히 25분 만에 터미널에 갈 수 있을지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호수 입구는 보이지 않았고, 마음은 점점 조급해졌다. 구글맵으로 확인해보니 8분 거리. 현재 시각은 11시 40분. 나는 뛰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 이번 차를 놓치면 오후 2시가 넘어야 버스를 탈 수 있다.

내륙 국가인 슬로베니아의 유일한 섬. 호수 위에 위치한 블레드 섬.

열심히 뛰어서 세이프! 그녀는 초조한 얼굴로 터미널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출발 10초 전에 버스에 탑승 완료! 휴~ 다연씨는 헐레벌떡 뛰어온 나를 보며 깔깔 웃었다. '언니 엄청 빠르시네요!' 이것이 바로 서른 살의 스피드다.

호수에서 보이는 트리글라브 산. 만년설이 쌓여 있는 산이 정말로 감동적이다.

빈가르 협곡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맑은 계곡을 따라 걷는 길은 가을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줬다. 흩날리는 단풍과 물소리. 흐르는 물은 떠다니는 낙엽과 함께 동그라미를 그리기도 하고 성을 내며 흐르기도 했다. 다연 씨와 나는 좁은 산책로를 열심히 걷고 또 걸었다. 우리는 멋진 풍경 속에서 좋은 친구가 되었다.

가을 정취가 물씬 풍겼던 빈가르 협곡
계곡X낙엽 콜라보레이션
협곡에서 가을 마사지 중

오후 2시 빈가르 협곡에서 블레드에 돌아온 뒤, 잠시 쉬었다가 보힌 호수에 가는 버스를 탔다. 보힌 호수에서는 케이블카를 타고 산 꼭대기에 올라갔다 내려올 예정이다. 원래 이곳은 겨울철에는 스키장으로 사용된다고 하는 데 가을인 지금은 전망대로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표를 끊고 케이블카에 올라탔다. 높은 고도를 순식간에 올라간다. 이렇게 쉽게 산에 올라도 되는 건가. 갑자기 좀 미안해졌다.

보힌 산에서 본 풍경. 천지 창조인가.
같은 풍경도 해질녘에는 좀 더 극적이다.

경치를 구경하며 허기를 달래려고 음식을 시켰다. 감자와 고기를 층층이 쌓은 슬로베니아 음식이라는데 이름을 잘 모르겠다. 다연 씨는 숙소 근처 샌드위치 가게에서 먹은 베지버거가 진짜 맛있다며, 어제 하나 오늘 하나 먹었고, 내일은 떠나기 전 두 개를 먹을 거라고 했다. 얼마나 맛있으면 슬로베니아 여행의 네 끼를 똑같은 베지버거로 채울 생각을 할까. 나도 먹어보고 싶다.

전망대 레스토랑에서 먹은 음식. 감자와 고기는 언제나 옳다.

그녀는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았고 독립적이었고 자유로웠다. 비교적 억압적인 한국 사회와 직장 문화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다. 여성으로서 일을 하며 한국에서 산다는 건 수많은 유리천장을 이겨내야 하는 것을 뜻한다. 거기에 결혼과 출산, 육아. 이 모든 것들은 여성의 신체적인 요인과 관계돼 있으면서 경제적인 조건들과도 무관하지 않은데, 사회는 이런 상황에 대해 여성이 일정 연령대가 되면 당연히 겪어내야 하는 과업으로 여기고 강요하고 있다.


나는 오랫동안 만난 남자 친구가 있고, 아이를 예뻐하지만 그것이 당장의 결혼이나 출산을 의미하지 않는다. 결혼과 출산은 당사자 간의 결정이며, 누구도 쉽게 얘기하거나 재단해서는 안 되는 문제다. 내가 어떤 삶을 살든 그 생은 오롯이 나의 것이고 나의 선택이다. 생과 사를 그 누구와도 함께할 수 없듯이.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날이 어둑해졌다. 나와 다연 씨는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와 블레드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 터미널에서 다연 씨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씩씩한 그녀의 앞날에 좋은 일만 가득하길!


내일은 여행의 마지막 나라인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로 떠나는 날이다.

계획이 현실이 되고 경험이 된다. 신기하고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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