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자그레브_아드레날린이라는 것이 폭발했다

서른 살에 떠난 30일간의 여행 19/30

by Hongchic
슬로베니아 블레드 >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난 오늘 마지막 여행지인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로 이동한다.


어젯밤에 미리 lesce-bled역에서 자그레브로 가는 오후 1시 50분 기차 시각을 확인해뒀다. 이제 다음 미션은 어떻게 lesce-bled로 갈 것이냔데, 관련해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lesce-bled 기차역에서 루블라냐로 가는 오후 1시 51분 기차를 타면 자그레브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다.

1. 블레드 버스 터미널에서 류블랴나로 가는 버스를 잡아타고 lesce-bled역에서 내려 달라고 한다.

- 이 경우, 짐을 트렁크에 넣었다가, 10분 뒤 다시 꺼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고 잘못해서 못 내리면 류블랴나까지 가는 불상사가 벌어질 수 있다. 그러나 단 돈 1.8유로의 비용으로 저렴하게 이동할 수 있다.


2. 호스텔에 택시를 불러 달라고 한다.

- 이 경우, 돈이 좀 들지만 몸이 편하고 마음도 편하다.


위 두 가지 선택지를 보면 내가 택시를 탔을 것 같겠지만, 틀렸다. 난 버스를 탔다.

오전 9시 30분쯤, 호스텔 리셉션에 체크 아웃을 하고 짐을 맡기면서, 택시를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잘생긴 리셉션 청년은 친절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답했다.


'걸어서 2분 거리인 터미널에서 단돈 1.8 유로로 10분 만에 역에 갈 수 있어. 너에게 이 방법을 강력하게 추천할게.’


우씨! 안다고. 그런데 누나가 힘들다고. 이 자식아.

그러나 다니엘 헤니 뺨치는 그의 환한 미소에 나는 반론을 할 수 없었고, 그래 뭐, 핸썸한 그의 강력 추천이니까 버스를 한 번 타보자라는 생각이 들면서 ‘I got it. Thanks a lot’라고 해버리고 만 것.


일단 기차 탑승 시간은 한 참 남았으니 이 걱정은 3시간 뒤로 미뤄 놓고, 아침을 먹기 위해 블레드 버스 터미널 부근의 케밥집에 갔다.


유럽에는 케밥을 파는 곳이 참 많다. 가격도 저렴하고 양도 많고 맛있어서 가난한 배낭 여행자들은 케밥을 참 많이 사 먹는데, 사실 난 오늘 먹은 케밥이 인생 첫 케밥이다. 가장 기본 메뉴로 시켰던 케밥은 참 푸짐하고 먹음직스럽게 나왔다. 케밥은 콜라까지 세트로 4유로. 코카콜라에는 한글로 ‘평창’이라는 단어가 쓰여 있었다. 읭? 내가 지금 슬로베니아에 있는 게 맞나? 나 지금 평창인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케밥을 한 입 베어 물었는데… 헐! 그동안 난 왜 이것을 안 먹었던 것인가. 이렇게 싸고 맛있는 케밥을! 고기와 양배추 그리고 쫀득한 빵, 너무 맛있다. 나는 그 큰 케밥을 한톨도 남기지 않고 싹 먹었다. 우리 할머니 말로 위가 벌떡 일어났다.

평창이 써 있는 콜라. 친구들에게 보여주니 '너 사실 평창이지?'라고 의심 받았다.

케밥을 해치우고 슬로베니아에서의 마지막을 장식할 블레드 성으로 향했다. 블레드 성이 있는 곳은 산 꼭대기. 언덕 위를 한참 올라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내가 아니다. 한국에서 내가 일하는 사무실은 6층. 아침 출근길에는 수많은 직원이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한 줄 서기를 하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나는 성질이 엄청 급하고 기다리는 걸 싫어하는 얌전한 성격이라 매일 아침 비상계단을 꾸역꾸역 올라 자리로 간다. 바로 이 블레드 성을 오르는 길에서 급한 성격 탓에 매일 계단 오르기로 훈련된 다리가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숨이 차올라 몸을 가누지 못하는 외국인들을 제치고 선두 그룹으로 성에 입장한 것. 뒤에 백인 할머니가 아시안 어쩌고 하는 게 얼핏 들렸다. 그냥 내 칭찬이겠지 뭐.

산 꼭대기에 위치한 블레드 성의 모습.

블레드 성에서 내려다본 블레드 호수는 그야말로 어썸, 판타스틱이다. 오늘은 어제보다 날씨가 더 청명한 탓에 모든 풍경이 뚜렷하게 잘 보인다. 한참을 돌아보고 있는데 익숙한 언어가 양쪽에서 들린다. 앗, 중국 단체 관광객과 일본 단체 관광객들이 같이 성에 입장했다. 이 곳에 한-중-일, 동 아시아의 세 나라가 다 모여있다. 나는 한국 대표! 라면 농담이다.

블레드 성에서 본 호수의 모습. 블레드 섬이 한 눈에 보인다.
섬 반대쪽의 모습. 좋은 공기를 가득 마셨다.

성 이곳저곳을 돌아보다, 수많은 모니터가 부착된 곳에 이르렀다. 모든 모니터에는 LG로고가 박혀있다. 나만 한국인인 줄 알고 외로웠는데 한국 출신 모니터 탓에 좀 더 든든한 기분이다. 멋진 풍경을 바라보며 여러 외국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왔어야 하는데. 내 남자 친구 씨는 잘 있으려나. 한 달 간의 여행을 잘 다녀올 수 있다고 늘 격려해주고 보고 싶다고 말해주는 우리 오빠. 귀국하는 날 짬뽕이랑 부대찌개를 사주겠다고 약속한 걸 잊지 않았겠지. 보고 싶다. 나중에는 같이 와야지.

모든 모니터에 LG 로고가 박혀져 있다. 내 친구들.
'could you take a picture for me?'를 열심히하면 혼자 간 여행에서도 전신 사진을 찍을 수 있다.

혼자 놀기의 고수가 됐나, 열심히 놀다 보니 어느새 기차역으로 갈 시간이다. 블레드 크림 케이크를 못 먹은 게 아쉬워서 성 위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케이크와 아메리카노를 주문해서 먹었다. 역시 케이크와 아메리카노는 사이가 좋다. 다시 호스텔로 가서 짐을 가지고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이제 정말 미션이다. 두근두근… 기사님 저 좀 태워주세요.

블레드에서 유명한 크림 케잌과 아메리카노. 오른편의 수돗물은 무려 알프스 산이다. (그냥 먹어도 된다고 한다.)

몇 분 후, 류블랴나로 가는 버스가 도착했다. 나는 기사님에게 lesce-bled 역에 가냐고 물었는데, 기사님이 내 말을 못 알아들었는지 이 차는 류블랴나 간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갈 거 같은데…. 일단 사람들이 짐을 싣는 걸 기다린 다음에 다시 기사님에게 가서 구글 맵에 나온 기차역 명을 보여주니, 엄청 환한 웃음과 함께 ‘오~ 간다. 어서 짐을 싣어라.’라고 말했다. 오예 기사님의 승인이 떨어졌다. 그리하여 나는 1.8유로짜리 버스를 타고, 10분 만에 기차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사히 도착했다!

기차역은 작고 귀여웠다. 매표소에 가서 자그레브까지 가는 열차표를 구매하고 탑승을 기다렸다. 역 건너편에 창문으로 밖을 구경하는 고양이가 보인다. 완벽한 날씨를 만끽하며 지나가는 외국인 아저씨와 셀카를 찍었다는 건 거짓말이고, 셀카를 찍는데 아저씨가 갑자기 등장. 서로 민망해서 눈 마주치며 웃었다.

그냥 기차역인데, 그림 같은 느낌. 날씨가 일 다함.
아름다웠던 블레드 안녕.

무사히 자그레브에 가는 열차에 탑승. 열차는 한산해서 나는 기차 한 칸을 혼자 쓸 수 있었다. 얼마만의 독방이야. 기차 안에서 바라본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혼자 책도 읽고 과자 먹는 동영상도 찍고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며 놀다 보니 어느새 국경을 넘어 크로아티아에 와 있었다. 피구 할 때 상대방 진영의 금을 밟으면 죽는다. 국경이란 것도 어찌 보면 땅이나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금에 불과한데 이 금 하나로 문화나 언어가 달라지는 것이 신기하다.

얼마만이 독방인지. 여성이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500파운드의 연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주장은 100번 타당하다.
국경을 넘었다. 도장 쾅!

자그레브에 도착. 호스텔에서 체크인을 하고 난 뒤, 환전을 하고, 밥을 먹고, 크로아티아의 국립공원인 플리트비체에 갈 버스표도 구매하기 위해 다시 시내로 향했다. 좋은 환전소를 찾아 무사히 환전을 하고 (나에게 총알이 생겼다 이거지) 버스터미널로 가서 플리트비체 버스표를 사려고 하는데 티켓 오피스 직원이 엄청 무례하다. 오전 8시 40분 티켓만 있다고 해서 혹시 더 늦게 출발하는 표가 있는지 물었더니, 풀 부킹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하… 다시 발동됐다. 땡큐 ㅅㅂ의 정신.


일단 나는 숨을 고르고, 침착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8시 40분 표를 줘. 그런데 너 나한테 화났니? 왜 나한테 소리 지르니?’

그러자 그 무례한 직원은 살짝 흠칫하며 상냥하게 말했다.

‘아니. 나 화 안 났어. 그냥 알려준 거야. 내일 405 플랫폼에서 타면 돼. 20분 전에 와.’

땡큐 ㅅㅂ의 정신은 정신에서 그쳐야 하는데, 나도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육성으로 나와버렸다.

‘ 그래 알겠어. 고마워. ㅅㅂ.’

그녀는 내가 욕을 한 것을 알았을까.

어둑해져서 도착한 자그레브.

버스 터미널에서 직원과 실랑이를 하는 동안 어제 함께 다녔던 다연 씨가 본인이 탄 버스가 자그레브에 곧 도착한다고 연락을 해왔다. 열 받은 나도 마침 딱 버스 터미널. 내일 플리트비체에서 먹을 간식과 물, 샌드위치를 사면서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그녀를 기다렸다.

다연 씨는 해맑은 미소로 ‘언니~’하며 나에게 왔고, 나는 그녀의 가벼운 배낭을 보며 ‘짐이 없네’라고 말했는데, 그 순간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이렇게 소리 질렀다.

‘아 내 캐리어!’


다연 씨는 실수로 그만 버스 트렁크에 캐리어를 두고 내린 것. 나와 다연 씨는 멀어져 가는 버스를 잡기 위해 말처럼 달렸다. 그렇지만 버스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고, 버스는 이내 우리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대충 이곳저곳을 탐색하며 버스가 있을만한 곳을 찾아보다 차고지에서 다연 씨가 타고 온 버스를 극적으로 발견! 운행 마무리 중인 차장으로부터 무사히 캐리어를 인수받을 수 있었다. 아니 내가 얼마나 반가웠으면 자기 짐도 다 버리고. 허참 거참 ㅋㅋ


다연 씨와 난 아드레날린이 폭발한 채로 레스토랑에 들어가 저녁밥을 맛있게 먹었다. 오늘도 다이내믹하였다.

아드레날린이 폭발한 채로 먹었던 그날의 저녁.

덧.

내일 버스가 오전 8시 40분이었지… 조식은 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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