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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chic Jan 20. 2016

혹시 심각해지는 병에 걸렸나요?

<마션 (어느 괴짜 과학자의 화성판 어드벤처 생존기)>  앤디위어

덕분에 와트니는 궤도에서 화성을 훤히 볼 수 있었다...
"꺼져."
그는 밑에 있는 행성에게 말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썼던 플래너를 들쳐보다가 앞으로 50년 뒤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적어 놓은 글귀를 발견했다.  딸기 같은 순정을 갖고 있던 고작 열여덟의 안. 여. 돼(안경, 여드름, 돼지) 여고생이 느닷없이 왜 예순여덟의 모습을 상상했는지는 모르겠지만(아마, 야자가 지겨웠겠지), 플래너에는 '귀엽고 웃긴 할머니'라고 기록돼 있었다. 이렇게 훌륭한 목표라니. 현재 매일 풀 메이크업을 사명으로 삼고 있는 스물아홉의 나는  11년 전 교복 치마 속에 체육복을 껴 입던 그 시절보다 퇴보한 것이 분명하다.


<마션>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혼자 화성에 남게 된 '마크 와트니'의 생존기를 담은 책이다. 와트니는 또라이다. 좀 좋게 말하면 똑똑한 또라이다. 아무도 없는 화성에서 온갖 허세는 다 부린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감자를 심으면서도 본인은 식물학을 전공한 화성에서 감자를 재배 중인 섹시한 훈남이라고 주창한다. 로버(화성을 활보할 수 있는 튼튼한 자동차)의 진로를 방해하는 암석을 낑낑거리며 옮길 때도 이 암석을 건드리는 건 본인이 최초라며 우쭐대고, 약 40일에 거쳐  3,200km에 달하는 거리를 운전해야만 화성을 벗어날 수 있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그는 식량 팩에 '절반', '죽을고비를 넘김', '마지막' 등의 레이블을 붙여가며 멋진 척을 한다. 책을 읽는 내내 난 마크 와트니와 결혼하고 싶어서 죽을  뻔했다.

나와 결혼해주세요 와트니~ 영화 <마션> 중에서.. 난 책도 읽고 영화도 봤다!

기압, 온도, 폭풍, 통신 두절 등 그를 어떻게 해서든지 죽이고 싶어 하는 화성의 혹독한 환경 속에서 그는 유쾌함과 가벼움을 잃지 않았다. 이에 더해 와트니는 자신의 똑똑한 두뇌로 상상도 못할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신박한 기지를 발휘했다. 하마터면 그냥 웃기게 시체로 변할 수 있었던 그는, 지구에서 열심히 기계공학과 식물학을 공부한 덕분에 웃기게 화성을 탈출하게 됐다.

왠지 화성에서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영화<마션>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 중에 하나는 이드를 숨겨야 하는 것이었다. 웃겨도 안 웃긴 척, 농담은 아예 못하는 척, 밥도 조금만 먹는 척(?)을 잘 해야 있어 보일 거라는 주변의 압박과 그에 따른 부담이 숨통을 점점 더 죄어왔다. 이런 증상이 심각해지면서 난 매일  "점심시간이 되고 몇 분 정도 흘러서 밥을 먹으러 가자고 말해야 가장 멋져 보일까?"라는 말도 안 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 나는 심각해지는 병에 걸렸던 것이다

.

ide: 이 3가지 정신 영역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원시적인 육체적 본능, 특히 성욕 및 공격 욕과 관련된 심리적 내용뿐 아니라 유전되거나 태어날 때부터 나타나는 모든 심리적 요소를 포함한다. Daum 백과사전)


어느 순간 인생을 위해서는 이 심각 병을 꼭 치유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덕분에 나는 아주 심한 몸살을 겪으며 주변 환경을 개선했다. 지금은 가볍고 웃기고 놀기 좋아하고 가벼운 비속어를 즐기는 (졸라, 열라, 겁나) 원래의 모습을 70% 정도 찾은 것 같다. 100% 다 찾게 되면 큰일 날 것 같긴 하지만....


 마크 와트니가 결국 살아남고 말았던  것처럼, 유쾌함과 긍정은 적절한 문제 해결 능력과 결합됐을 때,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한다. 심각하다고 모든 일이 해결되지 않는 것처럼 가볍다고 모든 문제가 풀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난 이런 유머러스함의 범주에 속하는 요소들 (가벼움, 유쾌함, 긍정, 개그)을 찬양할 것이다. 또, 귀엽고 웃긴  예순여덟 살의 할머니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것이다. 파이팅!


맷데이먼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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