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적 관념에 대한 단상 <가전은 LG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은 감각을 통해 상황이나 현상을 인지하며 이 과정에서 관념적 이미지를 구성한다. 어떤 제품은 좋고 어떤 나라는 깨끗하고 질서 정연하며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은 냉정하고 인간미가 없을 것이다라는 통상적인 설명들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념적 이미지가 집단적 합의를 이루게 되면 공식화의 절차를 거치게 되고, 특정 상황에서 근거나 이유가 들 필요가 없을 정도의 막강한 파워를 갖게 된다.
그렇게 발생한 고정적 관념은 사회적이고 감각적인 동물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생각의 한 국면일 것이다. 우리는 고정적 관념을 통해 타인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위험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요인을 피하거나 제거하며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나 관념의 방향이 극단적으로 왜곡되거나 편협해졌을 때, 인류는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혹은 유대인 학살, 전쟁 등과 같은 참혹한 시간을 겪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건, 금강석이 아니고 해를 거듭하며 굳어진 생각이다.
약 20년 전, 내가 초등학생일 때, SBS의 대표 장수 프로그램인 '세상의 이런 일이'를 보다가 엄청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약 10년 간 구축해 온 나의 고정적 관념에 틈을 만들었던 그때의 에피소드는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강력하게 내 뇌리에 남아 있다. 당시 프로그램에서는 여성의 옷을 입는 명문대 대학생 남성 청년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이야기를 진행하는 성우는 잔뜩 힘이 들어간 채로 '도대체 무슨 이유로 여성의 옷을 입게 되었을까. 어릴 적 경험이 그를 이렇게 만든 건 아닐까.' 라며 궁금증을 유발하는 멘트를 남발하고 있었다. MC들도 ‘그러게요~ 왜 바지를 안 입고 치마를 입을까요~'라며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일처럼 여성복을 입는 그를 설명했다. 너무 몰입해버린 나는 엄청난 비밀이 있을 거라고 감정을 이입하며 그의 입에서 끔찍한 말들이 쏟아져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가 밝힌 여성복을 입는 이유는 너무나 허망했다.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여성복이 남성복보다 싸기 때문에. 스커트가 바지보다 저렴하므로 여성복을 입는다’고 밝혔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깊은 충격에 빠졌다. 나는 무엇을 상상했는가. 그는 그냥 착실하고 알뜰한 청년이었을 뿐이었는데, 나는 남성은 바지를 입어야만 한다는 고정적 관념에 사로 잡혀 그를 멋대로 재단해 비정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때의 그 사건은 ‘의복이란 무엇인가? 개성이란 무엇인가? 정상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표를 제조하며 태어나 10년 간 쌓아왔던 성별 의복에 대한 고정적 관념을 무참히 파괴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머리를 기른 남성이나 투 블록 컷을 한 여성을 마주치더라도 이상하거나 별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사람이 걸친 옷이나 외형으로 본질을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고정적 관념을 새로 구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가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결혼을 준비를 하거나 이사를 하며 가전, 가구 등의 살림을 마련 중인 사람은 너무나 쉽게 이런 문장을 듣는다.
‘가전은 LG 지.’
작년 한 해 결혼 준비를 하며, 생애 처음으로 내가 사용할 세탁기나 냉장고를 골랐던 나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 이야기를 들었다. 살면서 몇 kg의 세탁물을 얼마 주기로 양산할지를 계산해야 구입할 세탁기를 고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닫고 나서, 회사 선배에게 몇 kg짜리 세탁기를 샀냐고 물어봤을 때, 그녀는 집에 비치된 세탁기 용량과 함께 LG가 좋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나보다 몇 달 먼저 결혼한 친구에게 냉장고 구매의 팁을 묻자 그녀는 ‘LG로 했다’는 짧은 답을 내뱉었다. 가전 시장에서 LG는 어떤 종교와 같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는 세 가지 사항이 궁금해졌다.
1. LG는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2. 사람들은 LG가 좋다는 것을 어떻게 판단했을까?
3. 그런데 왜 LG 스마트폰은 안 쓰는 걸까?
1. LG는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30만 원을 지출하며 10만 원을 아끼든, 300만 원을 지출하며 10만 원을 아끼든, 10만 원은 10만 원일 뿐인데, 우리는 상대적으로 300만 원을 지출하며 아낀 10만 원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긴다. 특히 가전을 뭉텅이로 구입하는 상황에서는 거의 천 단위의 돈이 들어가기도 하며, 몇 십만 원의 단차는 ‘고작 그 정도’로 치부된다. LG의 가전은 삼성, 대우 등등 보다 가격이 높게 책정돼 있다. 이미 브랜드 인식이 좋고, 튼튼하고, 투자할만하다고 구성된 LG 제품은 가격이 높더라도 높은 빈도로 선택받는다. 그리고 인지 부조화 이론에 의해 인간은 투자한 비용에 대한 가치를 증명하고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LG 가전을 선택한 구매자는 자기가 구매한 가전을 좋게 평가하며 각종 커뮤니티나 블로그 후기에 사용 평을 나열한다. 심지어 구매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아 사용한 기능이 전기 코드를 꼽는 일이라고 해도, 전기 코드 디자인이 얼마나 사려 깊고 예쁜지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는다. 요약하자면 LG의 고가 정책은 오히려 바이럴 효과를 일으켰고 제품 가치를 상승시켰다고 볼 수 있다.
2. 사람들은 LG가 좋다는 것을 어떻게 판단했을까?
가전은 비싸고 오래 쓰는 제품이다. 통상 10년 정도를 사용한다고 한다. 엄마 아빠 집에 있는 냉장고는 거의 20년이 돼 가는데도 튼튼하다. (겉보기에는) 그러므로 가전제품은 여러 브랜드를 동시에 비교하며 사용하기가 어렵다. LG 세탁기를 사용하며 같은 사양의 삼성 세탁기를 동시에 사용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런데도 결혼한 지 몇 달 안 되는 내 친구는 LG를 찬양했다. 자기 집을 구성하고 있는 가전제품 중 공기 청정기만 타 브랜드라 너무 아쉽다고까지 말했다. 사람들은 어떻게 LG가 더 좋다는 것을 확신하면 얘기하는 것일까? 정확히 말하자면 LG가 좋다는 사람들의 평은 '내가 비용을 더 많이 지불했고, 다른 사람들도 좋다고 평가했으니 다른 브랜드보다 더 좋을 것이다’라는 추측에 가깝다. 물론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서 첫 10년, 이후 10년 간 LG와 타 브랜드를 번갈아 사용해본 사람의 평가는 상대적으로 더 믿을만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기술은 발전한다. 따라서 동일 기간 동일 스펙의 제품이라는 실험 조건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않는 이상 평가의 신빙성은 매우 떨어진다.
그런데 왜 LG 스마트폰은 안 쓰는 걸까?
이렇게 믿을만하고 아름다운 LG인데 대체 왜 휴대폰 판매량은 저조한 걸까? 2018년 국내 스마트폰 점유율을 살펴보면 LG는 14.3%로 삼성 60.3%, 애플 16.7%에 밀려 3위에 그쳤다. LG가 최고라고 외치는 지인들에게 ‘그럼 왜 스마트폰은 LG를 안 쓰는 건데?'라고 되물으면 ‘그건 그거고..’라는 멋쩍은 대답이 되돌아온다. 가전 시장에 구축되어 있는 LG의 탄탄한 브랜드 이미지는 가전에 국한되어 작용한다. 스마트폰이라는 현대인의 분신 같은 아바타를 고를 때는 삼성과 애플이 전지적인 힘을 발휘하고, LG는 무엇인가에 밀려서 약간 아쉽게 고른 차선책에 포지셔닝된다. 영원한 고정적 관념은 없다. 환경과 조건이 달라지면 우리의 고정적 관념도 변화한다. 스마트폰은 LG에게 아마 아픈 손가락일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그냥 내 맘대로 하자'였다. 어차피 LG든 아니든 사고 나면 조금씩 아쉬울 것이고, 세상 이치가 그렇듯 완벽한 제품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내 나름대로 디자인이나 가격이나 성능 같은 것을 둘러보고, 고민이 될 때는 유튜브 리뷰를 봤다. 유튜버들은 협찬인지 구매 제품인지 모르겠지만, 여러 제품을 한 번에 비교하며 설명해주었다. 또, 거의 구매 임박한 시점에는 우리 집 가전 최종 리스트에 오른 제품의 기능을 살펴보며 해당 기능이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인지 아닌지를 점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한국과 중국, 미국을 넘나 들며 우리 집을 다국적 지대로 만들었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 예금을 들었다.
LG 제품으로 전부를 샀다 해도 괜찮다.
뭐, 어떤가. 내 돈 내가 쓰는데. 그리고 하나하나 따져보며 머리 아프게 사느니 그냥 편리하게 하나로 싹 다 사버리는 게 어쩌면 스트레스 관리라는 부분에서 더 이익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인공지능 IOT 같은 것도 같은 브랜드 제품이라면 모두 호환이 잘될 것이고 이것저것 좋은 점이 많다. 다만, 내가 이런 글을 쓴 이유는 뭔가 서운했기 때문이다. 나의 질문에 ‘가전은 LG’라고 일축해버렸던 대답들! 최소한 뭐가 좋은지 어땠는지 좀 설명이라도 해줬다면 나 역시 사랑해요 LG빠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약간 복수하는 마음으로 20년 전 보았던' 세상의 이런 일이'까지 떠올리며 이렇게 긴 글을 썼으니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길. 우리 집 TV도 LG다. 역시 디스플레이는 L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