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몸이 건강한게 아니고, 건강한 몸이 아름다워.
“중고등학교 때 점심시간에 밥 먹고 뭐했어?” 퇴근 후, 함께 식사하던 남편에게 물었다.
“나? 밥 빨리 먹고, 친구들이랑 공차거나 농구했던 것 같아. 갑자기 왜?” 그러게,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이 떠올랐을까? 그때 남편이 나에게 되물었다.
“그러는 넌 뭐했어?”
“나는.. 밥 먹고 아이스크림 먹었는데…”
나는 학창 시절 대부분을 ‘좌식’으로 보냈다. 대략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약95%의 시간을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고 책상에 고개를 파묻은 채 무엇인가를 끄적이면서 나의 10대는 흘러갔다. 교육 과정에 ‘체육’이라는 과목이 있었지만, 지.덕.체라는 교육 목적에서 ‘체’의 구색을 갖추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체육 시간은 보통 배구공을 손목으로 몇 번이나 튀길 수 있는지, 뜀틀을 몇 단까지 쌓아놓고 뛰어넘을 수 있는지에 따라서 A, B, C 등급을 매기는 시간이었고, 나와 동성 친구들은 체육을 보통 내신 성적에 아주 미미한 영향력을 미치는 ‘버리는’ 과목으로 여겼다. 심지어 학교도 체육 시간을 모자란 국영수 공부량을 채우는 자습 시간으로 치부하기 일쑤였다. 유일하게 학교에서 전속력으로 달렸던 시간은 오직 점심시간. 그리고 매점가는 길. 이렇듯 나의 청소년기는 거의 다리의 존재가 무의미한 ‘좌식 인간’ 상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점심시간에 밥 먹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의자 위 좌식 생활로 성장한 청소년은 무엇이 되는지 아는가? 보통은 과체중의 성인이 된다. 대학만 가면 살이 쪽쪽 빠지고 예뻐질 거라고 예언했던 어른들은 모두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몸속에는 지방만 가득했다. 무엇을 입어도 태가 나지 않고, 접히고 흔들리는 살 때문에 삶이 고달파지면 우리의 머릿속에는 어김없이 4글자가 피어오른다. ‘다.이.어.트’ 그렇다. 성인이 된 나는 어느 날 토실토실한 몸을 전신거울에 비추어보며 다이어트를 결심했다. 그리고 살면서 운동이라는 것을 해본 적 없었던 나는 굶어서 빼기를 시전했다.
무작정 굶는 건 자신이 없으니, 진료과목에 ’체중감량‘이라고 쓰여 있는 한의원에 방문했다. 병원 직원은 측정실에서 친절하게 내 몸무게를 재고, 원하는 체중을 물어보고 서류에 기록한 후 진료실로 안내해 주었다. 한의사는 직원이 건네준 서류를 대강 살펴보고는 “앞으로 모든 식사는 세 숟가락만 하는 겁니다. 그리고 한약을 먹으면 됩니다. 나가서 직원 안내를 들으세요.”라며 1분 만에 진료를 마쳤다. 상담실로 자리를 옮긴 나는 직원으로부터 한약 복용법과 ’세 숟가락‘ 식사에 대한 안내를 받았다. 한 달 치 약 꾸러미를 가득 안은 채 병원을 나서는 난 마치 요정 대모를 만난 신데렐라가 된 느낌이었다. 가늘고 호리호리한 미녀로 다시 태어나야지!
한약 다이어트의 효과는 죽였다. 60kg에 육박했던 나의 몸무게는 40kg대에 접어들었고, 나의 허벅지는 더 이상 서로 달라붙지 않았다. 허리 둘레는 25까지 줄었고, 볼은 홀쭉해졌다. 옷들은 모두 헐렁해졌고, 갈비뼈가 만져졌다. 의사가 처방한 밥 세 숟가락의 양은 터무니없이 적었지만, 한약 덕분에 배가 고프지 않았다. 한약 몇 포만으로 이렇게 날씬해질 수 있는 건가. 한약 복용 기간이 기약했던 한 달에서 두 달, 두 달에서 석 달로 늘어났다. 나는 점점 한약에 의존하게 됐고, 줄어드는 몸의 부피와 무게에 집착하며 밥 세 숟가락 분량의 식사도 건너뛰기 일쑤였다. 왜 이렇게 살이 빠진거냐고 묻는 사람들의 질문이 마치 트로피처럼 여겨졌고, 나뭇가지처럼 앙상해진 몸이 자랑스러웠다. 몸과 마음이 점점 곪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하지만 몸무게가 40kg 중반으로 접어들자, 등에 두드러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애벌레 모양으로 빨갛게 올라온 두드러기 때문에 나는 가려워 잠에 들 수 없었다. 등부터 시작한 두드러기는 앞가슴과 배까지 퍼져나갔고, 나는 피부과와 내과를 전전하며 제발 이 괴로운 두드러기에서 해방시켜달라고 호소했다. 의사들은 스테로이드 연고나 항히스타민제를 처방해 주었지만 크게 효과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기억력에도 문제가 생겼다. 뭔가를 자꾸 깜빡깜빡하고 놓쳤다. 중요한 일정을 까먹기도 하고, 미팅 후 회의록을 작성할 때도 대화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특정 단어나 사람 이름을 떠올리지 못해 애를 먹는 상황도 계속 반복해서 벌어졌다. 내 몸속에서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른 몸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한약 복용을 중단해야한다는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외면하며 꾸역꾸역 다이어트를 이어 나갔다.
그러던 중 나의 여동생이 카톡으로 메시지와 사진을 보내왔다.
“언니랑 비슷한 두드러기인 거 같아. 탄수화물 섭취를 극단적으로 줄이면 지방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데 그때 케톤체라는 게 알레르기를 일으킨대. 밥을 먹어보면 어때?“
동생이 보내준 사진의 두드러기 모양은 내 것과 놀랍도록 일치했다. 밥을 먹지 않아서 이런 일이 생긴 거라고? 혹시기억력이 나빠진 것도 다이어트 때문일까. 인터넷에 ‘탄수화물 기억력‘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하자 수많은 검색 결과가 쏟아졌다. ’탄수화물 섭취를 극단적으로 줄이면 인지 능력이 떨어질 수 있다.‘ 기사 속 한 줄이 뇌 속에 콕 박혔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걸까. 나의 다이어트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걸까. 과체중에서 벗어나 건강해지기 위해 시작한 다이어트의 결과는 가려워서 미칠 것 같은 두드러기와 기억력 감퇴로 이어졌고, 나는 깡마른 몸을 갈망하는 강박증 환자가 되어 있었다. 무엇을 위한 다이어트인가.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남은 한약을 치우고 일반식을 시작했다.
식사량을 늘려나가자 두드러기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기억력도 돌아왔다. 체중이 좀 늘자 들쑥날쑥했던 월경 주기도 일정해졌다. 사이즈는 늘었지만 가려움에서 해방되자 삶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체육을 시작했다. 달리기 앱을 활용해서 30분 달리기를 연습했다. 총 8주 차로 구성된 훈련 코스를 통해 30분 연속 달리기를 완주했다. 킥복싱 체육관에 등록해 주 3회 미트와 샌드백을 치고 기초 체력을 훈련했다. 주말에는 집 근처 생활 체육 센터에서 수영을 하고, 등산을 하거나 트래킹 코스를 걸었다. 말캉하고 부실했던 몸은 단단하고 다부져졌다. 운동 덕분에 양껏 식사를해도 예전만큼 살이 찌지 않았다. 종아리와 팔, 등, 복부에 근육이 튼튼히 자리 잡기 시작했고 체력이 좋아졌다. 몸 가득 에너지가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처음으로 나의 신체에 자신감이 생겼다. 남들이 인정해 주는 예쁨에서 비롯된 자신감이 아닌 강인함에서 기인한 자신감 말이다.
체육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근육을 키워주었다. 운동을 하며 땀을 흘리는 과정에서 도리어 마음은 편안해졌다. 움직임에 집중하고 신체를 단련하면서 고통에 의연해지고 침착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운동의 시작-중간-끝 모든 여정에 깨달음의 순간들이 있었고 이를 통해 부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었다. 특히 일과 사람에 치여 받는 스트레스에는 체육관에서 흘리는 땀이 특효약이었다. 신나게 달리고 발로 차고 강펀치를 날리며 받은 압박감과 괴로움을 해소할 수 있었고 다시 한 번 해보자는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지금 나의 몸은 호리호리와 아주 거리가 멀고, 조금은 우락부락한 편이지만 나는 내 몸이 무척 마음에 든다. 나의 삶은 생활 체육을 하기 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 운동은 신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를 다시 세우고 삶을 바라보는 방식을 새롭게 했다. 유일한 후회는 아니 근데 C발 진짜 내가 10대인 시절에 운동을 좀 했으면, 체육을 좋아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것이다. 점심시간에 밥먹고 아이스크림을 핥는 게 아니라 뜨거운 코트를 가르며 친구들과 우정을 나눴더라면, 운동장을 서너바퀴 뛰면서 심란한 마음을 식힐 줄 알았더라면 얼마나 내 삶이 진즉에 풍요로웠을까. 쓸데 없이 다이어트 한약 사는라 돈을 낭비하지 않았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