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부터 궁금했지만, 늘 기회가 닿지 않아 와보지 못했다. 남편은 출장으로 네 차례나 왔던 터라 굳이 세계여행에서 싱가포르를 간다고? 갸우뚱했지만, 나는 싱가포르를 가고 싶은걸. 우리 싱가포르에 가자! 가자!!
이번 여정의 목적 중 하나는 남은 여생의 일부를 보낼만한 안전하고 행복한 도시를 찾는 거잖아.우리는 더없이 좋을 거야. 괜찮아.
일반적인 세계여행자들은 엄청난 여행경비와 나중에 언제든 올 수 있는 가까운 나라라는 이유로 싱가포르나 냐짱, 발리 같은 동남아 휴양지 일정을 넣지 않는다. 네팔, 스리랑카, 인도처럼 평소 가보기 힘들고 경비가 저렴한 여행지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디스크환자 홍어른과 56개월 어린이가 함께하는 우리의 여정은 남들과 다르기에 우리만의 루트를 만들어가기로 했다. 큰 고민 없이 물가 비싼 싱가포르에 8박 9일이나 머무를 수 있었다. 체감하는 여행경비가 베트남의 4-5배 이상이라 처음엔 많이 당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는 정말 좋았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 언어가 뒤섞인 나라이니만큼, 다양하고 맛있는 미식의 세계를 경험했다. 깨끗한 공기와 물, 쓰레기 하나 없이 깔끔한 도로가 좋았다. 영어 주 사용국이라 의사소통도 훨씬 편한 점도 한 몫했다.
싱가포르의 영토는 서울보다 작지만, 간척사업을 통해 영토를 넓혀가며, 사계절 무더운 날씨와 좁은 땅을 알차게 쓰기 위해 발전한 각종 MALL을 구경하는 것도 싱가포르 여정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Mall 내에 입점한 브랜드를 보며 이런저런 업무구상을 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음식과 언어, 문화와 교육 모두 안정된 밸런스를 갖고 있는 도시기에, 남은 여생의 일부를 싱가포르에서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리나베이샌즈(MBS), 머라이언 파크, 플러튼 스트리트, 더 베이가든, 워터쇼, 레이저쇼, 아랍스트리트, 차이나타운, 오차드거리 등 다양한 볼거리와 나이트사파리, 보타닉 가든 등 자연친화적인 즐길거리, 그리고 끝내주던 음식까지 몸과 마음 모두 가득했던 여정이다. 정말 오랜만에 미슐랭 레스토랑도 두 군데 들렀다.
아이와 함께하는 8박 9일간의 일정에서 무려 센토사섬을 제외했다. 아직 다섯 돌이 되지 않은 112cm의 꼬마에게 무덥고 습한 날씨에 유니버설스튜디오란, 우리 부부가 감당하기 힘든 고난이 될 것이 뻔했다. 냐짱 빈펄랜드에서 키 제한으로 못 타는 어트랙션이 있으면 야단이 났다. 우는 아이를 달래느라 많이 힘들었다.
올 가을 미국 올랜도에서 디즈니랜드를 갈 때쯤이면 꼬마도 조금 더 컸으니까 좋아졌으리라 기대해 본다.
이번 여행이 끝이라 생각하지 마, 다음에 다시 와야 할 이유를 만들어둬야지!
라고 이야기 해주는 다정한 남편, 그는 연애 이후 매번 해외여행 후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지금 또 다른 나라로 떠난다고 상상해 봐. 어때? 신나지 않아?" 과거의 우리가 나눴던 대화는 현실이 되었다. 내일 오전 우리는 부지런히 짐을 싸서 인도네시아 발리로 떠난다. 항공권 발권만 해두고, 내일 당장 어디서 잘 지 숙소도 정하지 않은 이 엄청난 일정이라니믿을 수 없다.
세계여행 준비기간이 짧았기에, 나라에 대한 학습이 다소 부족하겠지만, 우리가 원하는 데로 결정할 수 있는 그야말로 완벽한 자유여행을 하고 있다. 안전하고 무탈함에 감사하자. 습한 열기와 엄청난 모기떼가 두렵지만, 신들의 섬 발리가 우리를 기다린다. 걱정대신 고민을 하자.
보타닉 가든에서 만난 도마뱀. 저렇게 큰 도마뱀이 유유하게 옆을 걸어 다니네...
거북이도, 물고기도 많고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은 보타닉가든. 늘 공원 옆에서 살고 싶다.
아이를 위해 방문했으나, 어른들이 더 신났던 나이트 사파리.
밤이 되면 동물들의 움직임이 매우 활발해진다. 호랑이, 사자가 그렇게 바쁜지 몰랐지.
근엄하고 웅장한 모습의 아랍스트리트 모스크.
도심 속 멋진 녹지공간들이 조성되있어, 아이와 함께 여행하기 좋았던 싱가포르.
TWG Lounge at MBS (Marinabay sands)
TWG Lounge at MBS (MarinaBay sands)
세계적으로 유명한 차 브랜드 TWG. 당연히 영국 브랜드일 거라 생각했는데, 싱가포르의 유서 깊은 브랜드였다. 싱가포르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오랜 기간 영국 식민지였던 터라 우측 핸들이며, 애프터눈티 등 영국문화가 여전히 남아있다.
마리나베이 쇼핑몰에서 정신없이 구경하며 걷다가, 잠시 쉼이 필요한 순간, 반짝이는 인테리어와 빳빳하고 하얀 리넨으로 곱게 차려진 TWG 라운지가 나를 부른다.
싱가포르에 처음 차가 도입된 시기인 1837년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은 커피문화가 워낙 강력하기에, 상대적으로 차 문화가 크게 번성하지 못했지만, 여행을 다녀보면 티를 즐기는 나라가 참 많다. 최근 한국에서도 건강을 위해 카페인 음료 대신 차를 선택하는 소비자가 늘어남에 따라 스타벅스에서도 티바나를 론칭했고, 강남을 중심으로 티카페가 여러 개 성업 중이다. 앞으로 국내 음료시장에도 변화가 올 것이다. 물론 제너럴 한 변화는 프랜차이즈의 몫이다. (투자자 부부로서 TWG의 상장여부를 확인했다.)
각설하고, TWG 라운지는 정말 근사했다.
너무 다양한 차 종류로 선택장애가 올 때쯤, 친절한 서버가 추천한 아이스로 마시기 좋은 플로럴티와 프룻티 2종과 함께 곁들일 디저트를 주문했다. 신선하고 상큼한 향이며 아름다운 수색마저 마음에 쏙 들었다. 함께 곁들인 마카롱과 애플캐러멜무스도 수준급이었는데 무엇보다 기물 하나하나가 완전 내 취향이었다. 은식기며 도자기 유리빨대 같은 걸 좋아하는 줄 몰랐는데, 나의 새로운 취향을 발견했다. 예뻤던 아가씨 시절, 애프터눈 티 세트를 즐겼다면 어땠을까? 매일 쏘맥이나 마셨기에 차(茶) 문화에 대해 무지한 나 자신이 부끄럽다. 곧장 집으로 돌아가는 짧은 여행이었다면, 틴케이스 여러 개 캐리어 가득 쇼핑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싱가포르 일정 마지막 날, 마리나베이샌즈 호텔과 플러턴호텔 중 어디에 머무를까 고민하다가 MBS야경을 감상하기 위해 플러턴 호텔로 향했다. 호텔 중앙에 전시된 곰인형 들도 마스크를 쓰고 있던 2022년 7월.
아랍스트리트 인근에서 단돈 5천 원에 구매한 시원한 원피스를 입고 MBS 배경으로.. ^^
마리나베이 야경뷰를 감상하며 너무 행복했던 그 밤.
호선생의 일기.
싱가포르는 뭐든지 워낙 비싸 베트남의 사이공로열 수준의 숙박은 언감생심이다. 변명처럼 들리지만, 글 쓰는 환경이 조성되기 힘들었다. 순간순간 기억이 새록새록할 때 글 썼으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 몰아서 쓴다.
베트남에 있다가 오니, 싱가포르의 모든 것이 더 비싸게 느껴진다. 마리나베이 쇼핑센터에서 정말 예쁜 수영복을 발견했지만, 500 싱가포르 달러였다. (한화 약 45만 원) 멋진 쇼핑센터에 있다 보면 그곳만의 흐름에 빠지게 된다. 순간 그 수영복을 사야 하는 갖가지 이유를 생각하고, 지갑을 열도록 설계해 둔 선수들과 맞서야 한다. 그게 얼마든간에 순간 이성을 잃는다. 다행히 말려들지는 않았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예뻤다. 그 수영복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물살을 더 부드럽게 헤쳐나가고, 태양이 나만을 비출 것 같다. 신혼여행에서 구매한 바로셀로나산 알록달록 이에 만족하자.
싱가포르 마천루들의 건축 디자인들은 몹시 다양하다. 비슷하게 느껴지는 빌딩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형태가 다양하다. 특히, 곡선의 유연함이 표현된 빌딩들은 보는 맛을 더해 지루하지 않다. 영국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브리티시 스타일의 건축 양식들도 보인다. 거리를 표시하는 표시판 역시 영국스러움을 더한다. 정돈된 도시이지만, 절제된 활발함이 있다. 지하철 내 이곳저곳 대화가 이루어지나, 한국 지하철의 데시벨 정도는 아니다. 도시국가다 보니, 근심과 상념 가득한 얼굴들이 많이 보인다. 화교 영향을 많이 받은 국가답게 중국어가 많이 들리지만, 학생들과 젊은이 사이에서는 영어도 꽤 들리고, 한국인들은 한글을 쓴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 또한 글로벌 도시국가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발리로 가는 라운지에서
하루도 쉼 없이 만오천보씩 걸으며 이곳저곳을 다녔다. 8박 9일이라는 시간 내에 인생을 바꿀만한 터닝포인트를 얻기란 쉽지 않다. 도시국가의 최상단의 지위를 얻고 있는 싱가포르의 위엄을 겉핥기식이었지만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누구는 영토가 작으니까 조금만 노력하고 운이 따라주면 쉽게 완성할 수 있을 거라 과소평가할 것이다. 언제나 타인의 성취는 쉬워 보이기 마련이다. 마리나베이의 스카이파크에서 빼곡히 솟아있는 빌딩들을 보며 경이로움과 동시에 치열함도 느낀다.
언젠가 그녀에게 “우리 매일 세끼씩 음식점 방문하면 천 끼 넘게 먹게 되겠다”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놀랐었다. 일상적으로 먹는 끼니가 아니라, 직업병처럼 의미를 두고 무언가 파헤치려는 마음으로 먹는 1,000끼.
행여나 머리가 터지지 않을까 모르겠다.
송파 바쿠텐의 색다른 육수의 깊이에 후추의 칼칼함이 느껴지는 돼지고기 갈비탕, Overeasy의 Chopping steak mini burger, 파라다이즈 다이너스티의 무지개 딤섬 중에서도 트러플 딤섬, 플러튼 호텔에서의 마지막 디너였던 미슐랭 1 스타 Jade의 베이징덕과 캐러멜에 절인 오렌지 필링까지..
그때그때의 기억을 더듬기에 꽤 시간이 흘러버려 아쉽지만, 소소한 영감을 얻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직업병처럼 과연 싱가포르에서 한국 외식 브랜드가 메이저 무대에서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든다. 정말 어려운 시장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식상한 연구와 공부로는 어림없을 만큼 창의적인 콘셉트의 가스트로노미가 이미 포화 상태다. 틀을 깨지 않고는 힘든 싸움을 해야 한다. 임대료와 인건비를 극복할 수 있는 효율성은 당연한 숙제다.
파라다이즈 다이너스티의 컬러풀 딤섬 - 그중 탑은 회색의 트러플딤섬이었다. 완탕누들도 만두도 모두 퍼펙트하다!
지금도 그리운 송파바쿠테. 큼지막한 갈빗대를 넣은 갈빗탕과 각종 내장요리들 하나하나 모두 맛깔나던.. 보양식.
플러튼 호텔 1층의 중식당 Jade에서 맛본 랍스터국수
우리가 너무너무 사랑하는 베이징덕.
싱가포르 최대의 핫플레이스, 뎀시힐지역의 힙한 레스토랑에서 맛본 피쉬커리는 눈이 띠용 튀어나올만큼 맛있었고...
양갈비스테이크오 함께 곁들이는 가니쉬 무 페이스트리는 미각의 신세계였다.
마파두부와 생선탕수는 투박한 모양과 다르게 맛과 향, 밸런스 모두가 완벽했다
주재원들이 추천해준 차이나타운 맛집.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곳보다 훨씬 좋았다.
2010년쯤 싱가포르 출장을 왔을 때, 파트너와 함께 마리나베이의 루프탑 bar <세라비>에 앉아 인피니티풀에서 수영하던 사람들을 구경했다. 밤이 되며 어두워지면서 황홀한 싱가포르의 야경이 펼쳐졌다. 업무의 무게도 무게였지만, 연인 없는 외로움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나중에 싱가포르에 다시 오게 되면 그때는 사랑하는 여자와 오겠다! 얼마나 좋고, 얼마나 행복할까’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바람이 현실이 되었다.
사랑하는 이정이와 아들 정우와 함께 싱가포르에 다시 왔다. 사무치는 외로움에 야경이 아름답지만 않았던 십수 년 전 내 모습과 감정상태가 꽤 생생하다. 확실한 건,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못해 처절했다는 거다. 잊고 지내던 그때의 기억은 세월이 지나 잊히지 않고 현실이 되었다.
지금 우리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염둥이 아들과 함께 싱가포르에 와있다. 꿈은 이루어진다!
삶이란 이런 것일까? 간절하게 바라던 걸 이루고 나면 찾아오는 허탈감, 행복한 감정은 잠시뿐 또 다른 간절함을 찾게 된다. 이제는 사랑하는 이정이와 정우를 위해, 우리 가족의 미래를 상상하기 시작한다. 경제적 안정과 풍요가 가져다주는 메리트는 적지 않다. 지금보다 더 잘 살고 싶고 경제적인 선택지를 넓히고 싶다. 물론 그때도 가성비 좋은 숙소를 구하려고 몇 시간을 찾고, 식당의 음식 가격을 따지겠지만, 지금보다는 고민하는 시간이 적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