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남기려 했던 여정일지를 밀린 숙제처럼 뒤늦게 쓰고 있다. 이쯤 되면 나의 의지력은 57개월 아들보다 부족하다. 한창 놀고 싶을 녀석의 수학 공부가 나의 글 쓰는 횟수보다 훨씬 많다니... 부끄럽다.
5일간의 골드코스트 여정은 짧지만, 첫날부터 생생하다. 평생 경험했던 그 어떤 뷰보다 스펙터클하며 유니크한 풍광을 선사했던 Skypoint tower,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저 멀리 아래까지 펼쳐진 긴 코스트(해안)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길게 펼쳐진 해안 반대편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강줄기가 얽혀있고, 강변을 따라 그림처럼 아름다운 집들이 자리했다. 화가가 상상 속 휴양지를 그려 화폭에 담아낸 그림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도시다.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한 거리와, 레고처럼 일사불란하게 정리정돈 된 알록달록한 빌딩들이 늘어서있다. 호주를 상징하는 밝은 노란색마저 딱 내 취향이다. 버스도, 트램도 노란색이다. 여태껏 골드코스트의 햇살과 하늘처럼 '크리스털 클리어' 한 환경 덕분에 시력이 좋아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맑다. 부러울 만큼 청명하다.
골드코스트에서의 느낌을 한 마디로 표현해 보라면 ‘비현실성’이다. 영화감독이 고심해서 촬영했을 듯 한 미장센의 한 장면 같다. 오랜 시간 공들여 겨우 한 두 컷 얻을 법한 자연의 조화로움과 아름다움을 골드코스트 일상에선 쉽게 볼 수 있다. 도로 위 각양각색의 마케팅 도구로 예쁘게 단장한 트램이 유유히 지나다닌다. 정우가 손을 흔들면 트램 운전기사는 언제나 환하게 웃으며 화답해 준다. 트램은 골드코스트 강변을 가로지르며 멋진 다리 위를 지난다. 한국이었다면, 특별한 의미를 담아 'ㅇㅇ대교' 라 이름 붙였을 텐데, 이곳에선 그저 평범한 무명일 뿐이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뻗어있는 골드코스트 해변을 셋이서 함께 걸었다. 다만, 제주도 한 달살이부터 나트랑, 발리, 케언즈 등 최근 다양한 바다를 경험했기에, 기절할 정도의 감흥은 아니었다. 인간의 환경 적응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힘을 발휘한다. 경험이 켜켜이 쌓이며, 이내 일상의 익숙함으로 뇌가 받아들인다. 어느샌가 일상과 감동 사이의 줄다리기다. 일상이 되고 싶지 않기에 안간힘을 쓰지만, 쉽지 않다. 숙제하러 온 건 아니지만, 순간순간의 기막힌 시간들을 400일 여정에 파묻혀 흔히 얘기하는 one of them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이러한 생각 자체를 대견해하자. 400일의 여정 순간순간마다 새로운 의미 부여를 한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피곤하다. 흘러가는 대로 게을러지면 게을러지는 대로, 이렇게 허송세월 보내도 되나 싶을 만큼 무미건조하게 보내고 있다면 그대로 내버려 두자. 그곳에 머물러보는 것 자체로 의미가 깊다.
Bar 라서 칵테일로 hat을 받은걸까, 칵테일만큼은 일품이었다!!
호주는 미슐랭가이드 대신 Hat awards가 있다. 이정이가 고심해서 찾은 Hat 레스토랑 <Social Eating & Bar>의 가스트로노미는 브리즈번의 <GOMA>에 비해 여러모로 아쉬웠다. 무엇보다 정우가 무언가에 틀어져서 말을 듣지 않았다. 아들의 생떼(?)로 인한 영향을 최소화하고 싶지만, 아들과 함께 하는 육아 현실에선 쉽지 않다. 무엇보다 Social이라는 단어처럼 사교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좋게 말하면 다이내믹한, 반대로 표현하면 정신 사나운) 분위기였다. 더구나 아들 녀석의 계속되는 떼쓰기로, 레스토랑 특유의 분위기를 온전히 느낄 수 없었다. 우리의 상황이 쉽지 않았음을 감안하더라도, 전반적으로 아쉬웠다. 적어도 2 Hat 레스토랑이라면, 메뉴의 밸런스를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한 메뉴들의 문제라기엔, 모든 음식의 단 맛이 재료 본연의 매력을 빼앗았다. Baby sprout를 주 재료로 한 메뉴는 Sprout의 카라멜라이징이 과도했고, 외피의 섬유질 제거가 되지 않아 몹시 질겼다. 턱이 아플 정도로 전체적인 맛과 식감이 현저히 떨어졌다. 튀긴 돼지고기와 채소를 타이식 소스와 곁들인 메인 메뉴 또한 식재료 간의 맛의 협치가 부족하게 느껴졌다. 수년간 최고 수준의 2 Hat 레스토랑이라기엔 여러모로 아쉬웠던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유명 레스토랑 모두가 내 마음에 들 수는 없다. 내게 딱 맞는 메뉴를 고르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다. 식당의 전 메뉴를 다 먹어볼 수도 없다. 셰프의 컨디션과 생물 식자재 퀄리티 역시 초정밀하게 동일할 수 없다. 그렇기에 다소 아쉬웠던 식당의 경험도 소중한 자산이며, 더 큰 공부가 된다. 좋은 점도 배우지만,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을 아는 것도 의미가 있다. 나만 그럴 수 있지만, 해외에서 로컬 음식 외에 한국 음식을 먹을 때면 이상하게 죄책감은 아닌 표현하기 힘든 거시기(?)한 느낌이 든다.
호주 골드코스트에서 가장 만족했던 식당은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차이나타운에 있는 Hot Pot 훠거 레스토랑이었다. 호주에서 중식을 먹으면 여정을 제대로 보내지 않는다는 자책이 든다. 예전보단 그런 생각이 줄었지만, 2-30대 연수 시절에 특히 심했다. 신라면을 먹으면 현지 생활에 동화되지 못한다는 자기 비난을 하며 악착같이 살아서 그런가 보다. 해외에 나오면 과거 습관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때는 현지인과 같은 DNA를 가져야 언어를 빨리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이 간절했었으니까.. 조금은 그때의 간절함이 그립다.
차이나타운에서 경험했던 Hot pot restaurant. 육수를 네 가지 선택할 수 있어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요식업은 종합 예술'이라며 진부한 표현을 하는데, 그 진부함이 갖는 중량감과 표현의 대체 불가성은 역설적이다. 음식의 맛이 가장 중요하지만, 맛이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Social Eating & Bar>에서 느낀 편안함과 훠궈집의 편안함의 차이는 크다. 사람을 볼 때 해부학을 공부하듯 접근하지 않는다. 풍기는 이미지가 기억을 지배한다. 음식점도 풍기는 이미지가 있다. 물론 사람마다 느끼고 경험하는 정도와 방식은 다르다. 음식점 주인이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지만, 대중의 편에서 보통 사람이 만족할 수준의 통합적인 접근은 필요하다. 점점 맛의 중요성이 떨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나이 한국 나이로 46이다. 5년 전, 10년 전 오감과 지금은 다르다. 아니 퇴보했다. 고령화 사회는 한국뿐 아니라 거의 모든 국가가 겪을 수밖에 없는 시대 흐름이다. 중국도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할 것이며, 고령화 인구는 %를 떠나 그 수를 상상하기 어렵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퇴보를 의미한다. 아닌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당연하다. 전성기 때 운동선수의 폼과 은퇴를 앞둔 나이의 실력은 다르다. 같은 노력에도 레벨은 퇴보한다.
최근 음식점에서 내가 느끼는 오감이 생물학적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퇴보하고 있음을 몸소 체험하고 있다. 테이블과 의자, 머무는 동안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 벽면에 붙어 있는 액자와 조명, 직원들의 표정 등 전반적인 매장 분위기에 대한 갈증이 더 크다. 당연히 음식 맛 또한 중요하다. 하지만, 음식의 맛은 특출 난 몇몇이 아니라면 대동소이하다. 공간적인 매력과 편안함이 시니어들이 주역이 될 미래에 외식 브랜드들이 추구해야 할 제1 우선순위가 아닐까. 전성기처럼 미각을 평생 유지할 수 있을지 몰라도 줄어드는 뇌 세포 수를 막을 수는 없다.
[홍어른 ver.]
골드코스트 숙소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3박 4일도 부족하다. 유명한 비치 근처, 다운타운 근처의 숙박비가 엄두가 안 나는 가격이라, 다운타운까지 버스로 30분 거리 외곽의 어느 주택가의 작은 숙소를 빌렸다. 침실과 욕실, 작은 간이주방 겸 다이닝룸으로 구성된 작고 아늑한 집이었다. 겨울이라 저녁 6시면 해가 져서 칠흑같이 어두워진 동네엔 작은 상점이나 마트 하나 없는 곳이었고, 물 한 병 사러 나가기 힘든 외곽이라 남편과 때때로 투닥거렸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매일 밤마다 하늘 위를 수놓은 별을 보며 행복했었다.
* 골드코스트 숙소는 화구나 인덕션이 없는 단출한 간이주방이었지만, 최대한 잘 챙겨 먹으려 노력했다.
호주의 과일은 대체로 신선하고 맛있다. 특히나 멜론이 정말 맛있어서 매일 저녁 후식으로 먹었다.
에어후라이어로 고구마칩을 만들고, 매일 과일과 야채샐러드를 잊지 않았다. 우영우 드라마를 보고 너무나 김밥이 먹고 싶던 날엔, 아쉬운 대로 김초밥을 포장해다가 우유와 치즈를 듬뿍 넣은 영양 계란찜과 함께 저녁을 먹기도 하고.. 400일 간 매일 새로운 음식을 즐기고 싶었는데, 쉽지 않다. 경제적인 부분도 무시할 수 없지만, 사 먹는 밥은 물려서 먹기 힘들다. 윽...
아침이면 호스트가 준비해 준 열 종류가 넘는 홍차를 즐겼다. 호주는 영연방 국가라 티 문화가 발달했다.
57개월 어린이 중에 프로슈토 먹는 아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세계여행을 하며, 아이에게 다양한 식재료를 경험해주려고 한다. 여전히 엄마표 꿀밥과 미역국을 가장 좋아하긴 하지만.. 아티초크, 서양배, 트러플, 엔초비, 루꼴라 등 한국이라면 질겁하며 거절했을 생소한 식재료도 일단 한 번은 시도해 보는 멋진 어린이 정우. ^^
골드코스트 스카이포인트에서,
환상적인 야경이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긴 해변을 따라 고층빌딩이 늘어서있는 모습은 장관.
78층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송출되는 화면도 멋져서 정우가 참 좋아했었다.
어두워진 시내를 걷는 것만으로도 운치가 있던 밤. 우리 가족 모두 호주에 푹 빠져버렸다.
골드코스트 여정의 백미는 단연 Whale watching이었다. 우영우 드라마를 보며, 고래에 대한 관심과 탐구가 짙어진 꼬마와 호 선생을 위한 고래 관찰투어. 호주에서는 고래의 터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고래 100m 이상 접근하지 않고, 배의 엔진을 멈춘 채 관찰하는데... 다른 말 필요 없이 일단 강추다!
오세아니아 바다에는 100여 종의 다양한 고래, 돌고래가 서식하고 있는데 골드코스트 인근의 연안에서는 10여 종을 관찰할 수 있다. 날씨가 좋은 날엔 고래가 뛰어오르는 장면을 볼 수도 있다는데, 우리가 방문한 날은 비가 내린 탓에 다소 소극적인 고래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았다. 깊은 바다에서 9m가 넘는 거대한 고래를 직접 목도하는 것은 아이, 어른 모두에게 엄청한 감동이었다. 일정 때문에 헬기투어와 고래투어 중 고민하다가 선택했는데, 아주 값진 경험이었다. 투어 안내방송을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다면 더 좋았을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