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까지 차로 20분이면 도착하는 미국 서남단 도시 샌디에이고에 도착했다. 사계절 날씨가 온화하며 미국에서 가장 안전해 살기 좋은 도시, 누군가에겐 여생을 보내고 싶은 도시를 지나칠 이유가 없다.
샌디에이고에는 바다사자, 물개와 함께 수영할 수 있는 '라 호야 비치'가 있다. 우리 또래라면 어릴 적 별칭 하나씩 있을 텐데, 남편에게는 '호야'라는 귀여운 애칭이 있다. 40대 중반인 지금도 본가에 가면 다들 '호야'라고 부른다. 그래서인지 이름만으로도 친근하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고약한 바다 냄새가 코를 찌른다. 두 개의 절벽 아래 아담한 해변은 바다사자와 물개가 한가롭게 바위에 누워있다. 한국 홈쇼핑의 관광상품에서나 볼법한 절경이 펼쳐진다. 지금의 감동을 마음껏 누리며 어린이처럼 즐거워하자. 만끽하자.
“여기 너무 좋다. 정말 아름다워. 내일 해수욕 준비해서 다시 와요! 스노클링도 할 수 있대. 너무 신난다.”
다음날, 완벽한 물놀이 준비와 해변에서 먹을 김밥 도시락까지 챙겨 라호야비치에 왔다.
호야 비치의 파도는 무시무시하다. 내려오는 계단까지 거센 파도가 밀려오지만 개의치 않는다.
“정우 구명조끼라도 입는 게 어때?”
“괜찮아요. 일단 먼저 해보고 필요하면 착용할게요.”
남편에게 정우를 맡기고, 스노클링 장비를 들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어때?”
“오빠!! 정말 엄청나요! 물고기들 엄청 많아!!!”
다시 바다로 들어간다. 높은 파도 때문에 불안했는지, 남편이 계속 지켜보고 있다.
파도는 세지만, 맑은 물속엔 형형색색의 물고기들과 수초가 가득하다. 거기다 바다사자와 물개가 함께 수영하고 있으니 짜릿한 도파민이 온몸에 퍼진다. 충분히 즐겼으니 나가려는데, 다시금 거센 파도가 밀려온다.
순식간에 몸이 파도에 휩쓸렸다. 머리 위로 높은 파도가 몰아친다. 숨을 쉬려 물 밖으로 나가려고 해 보지만, 아무리 뛰어올라도 계속 물 속이다. 거센 파도때문에 팔다리 제어가 안된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숨을 쉴 수 없으니 극한의 공포가 몰려온다. 이런 게 공황장애의 느낌일까.
“오빠, 오빠!! 나 도와줘, 나 도와주.... 꾸르륵..."
남편이 허우적대는 나를 발견했다. 머리를 빼꼼히 내밀었다가 이내 바닷속으로 사라졌단다. 남편은 지체할 틈 없이 입수했고, 내 머리를 띄워 숨 쉴 수 있도록 몸을 받쳐줬지만, 여전히 허우적대고 있었다.
남편 또한 발이 닿지 않아 몸을 지탱할 수 없었을 거다. 어느샌가 달려온 여자 안전요원이 구명용 장비를 던져주었고, 허우적대던 나는 무사히 구조됐다. 물 밖으로 나오자,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봤다. 모두가 주시할 만큼 상황이 다급했던 모양이다.
벌벌 떨고 있는 나를 남편과 정우가 꼭 안아주었다.
“오빠, 정말 무서웠어. 너무 무서웠어. 나 이제 그만할래. 바다에 못 들어갈 것 같아.”
자리로 돌아와서도 여전히 숨이 가파르다.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지금도 여전히 무서워. 진짜 너무 무서웠어. 갑자기 큰 파도가 덮치니까 숨이 안 쉬어졌어. 보통 물 안에서 숨참고 파도가 지난 뒤에 숨 쉬면 되는데, 파도가 너무 세서 몸이 마구 휩쓸리니 겁나서 컨트롤이 안 됐어..”
* 라호야비치는 갑자기 큰 파도가 몰아치는 경우가 있어, 휩쓸리거나 사고 나는 경우가 종종 있단다. 라이프가드 사무소와 여러 명의 안전요원이 상주중이었다.
수십 미터를 들어가도 허리춤인 얕은 해변을 자주 경험했기에, 순식간에 발이 안 닿는 깊은 해변은 생소했다. 팔다리가 통제되지 않을만큼 거센 파도 또한 처음 경험했기에 그 공포란 상상할 수 없다.
급격하게 불어닥치는 파도는 늪처럼 나를 빨아들였다. 최근 늘어난 수영실력에 자만했기에, 무방비로 걸려들었다. 만약 더 먼 깊은 바다에서 남편과 안전요원 시선이 닿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글쓰는 지금도 숨이 막혀온다.
한참 뒤 이성을 찾고, 아이의 구명조끼를 입고 스노클링을 시도해 본다. 그러나 구명조끼를 착용할 경우,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어 더 위험하단다. 안전요원이 내려와서 알려주었다.
“나는 여기선 겁나서 스노클링 못하겠네요.”
남편에게 모처럼만의 자유를 선사했다. 물 만난 물개처럼 깊은 바다까지 헤엄쳐 거대한 파도에 몸을 싣는다. 세 달 동안 수영으로 단련된 체력이 도움되는 모양이다.
“오빠, 정말 조심해요! 휩쓸려갈 수 있어! ”
바다사자 가족이 해변 근처에서 서로 뒤엉켜 수영하고, 물개가 남편의 옆을 지나간다.
바위에 앉아 남편의 모습을 촬영했다.
“물 속에서 방금 봤어요?? 오빠 바로 옆으로 물개 두 마리가 지나갔어!!!"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위험은 ‘순식간’에 찾아온다. 그렇기 때문에 ‘설마’를 멀리해야 한다.
자신감이 붙었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는 남편의 잔소리를 그간 지겨워했는데, 진리를 깨달았다.
오늘도 안전하게 살아남았음에 감사하다.
저 멀리 하늘에선 전투기들의 에어쇼가 짙은 연기를 상공에 그리며 날아간다. 한가하고 여유로운 일상 너머엔 러시아와 중국을 견제하는 항공 군사훈련이 진행 중이다. 역시 천조국의 위력을 실감한다.
그림 같은 에어쇼를 바다사자와 함께 즐기고 있다. 모든 게 비현실적이다.
거센 파도에 휩슬리고 난 뒤 느끼는 아름다움과 평온함은 더 강렬하다. 안전의 소중함을 깨달은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