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비쌌다. 직전 여행지 베트남과 비교하면 체감물가가 대여섯 배 비싸게 느껴졌기에, 움츠러들었다. 숙박 어플을 검색하면 1박에 30~40만원이 족히 넘었다. 저렴한 가격이다 싶으면, 공용 화장실 혹은 게스트 하우스의 도미토리, 침대 옆에 캐리어 놓을 자리조차 없는 비좁은 방이다. 남편과 둘만 여행했다면 고민 없이 저렴한 숙소를 예약했겠지만, 우리에겐 연약한 정우가 있고, 녀석이 만드는 소음이 타인에게 민폐가 될 수 있다. 결국 다운타운에서 지하철로 25분 떨어진 중산파크의 쉐라톤 호텔에 묵었다. 쉐라톤도 좋은 호텔이지만, 좁고 오래되어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예산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숙소는 저렴한 곳을 선택한다 해도, 외식컨설턴트와 외식기업 해외총괄이던 우리 부부가 미식종주국인 싱가포르에서 미식을 맛보지 않을 수 없다. 미식만큼은 최대한 경험하자는 게 우리 여행의 취지다.
싱가포르에 머무는 일주일 간 칠리크랩, 비건레스토랑, 베이징덕, 딤섬, 아메리칸차이니즈, 호커센터, 차이나타운 등 다양한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셀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음식이 넘쳐나는 진정한 미식도시였다. 매일매일 입이 행복했다.
야경을 감상하기 위해, 마리나샌즈베이 (이하 MBS) 전망대에 올랐다. 세 사람의 전망대 입장료가 만만치않았지만, 돈이 아깝지 않을 만큼 환상적이었다. 분위기에 흠뻑 취한 밤이었다.
10년 전 출장길에 현지 파트너와 루프탑 bar에서 남편이 느꼈던 '연인 없는 외로움과 다시 오게 되면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과 오겠다'던 다짐을 들었다. 시간이 지나, 우리 세 사람은 함께 이곳에 왔다. 오랜 바람이 현실이 되었다.
한 번쯤은 MBS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우리 딱 하루라도 여기서 자보면 안 될까? 마지막 밤은 조금 무리하더라도 좋은 데서 자면 어때?"
어린아이 같은 소리 한다 구박할 수도 있지만, 남편에게 넌지시 말을 건네본다. 10년 전의 외로움을 회상하며,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듯한 남편이 내게 화답을 보낸다.
"그래, 사랑하는 사람하고 반드시 다시 오겠다는 다짐도 이뤘는데.. 하루정도는 갈 수 있지!"
단 하룻밤 최고의 숙박지를 찾기 위한 계획이 시작되었다.
그날부터 매일매일 마리나베이샌즈의 호텔방을 검색했다. 조금이라도 싼 방을 찾으려 어플과 각종 핫딜을 찾아봤지만, 1박에 100만원에 달하는 MBS를 예약하기란, 아무리 마음을 먹었대도 소인배 부부에겐 쉽지 않았다. 오늘밤도 어플을 뒤지던 남편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내게 말을 건넸다.
"이정아, MBS는 아닌데, 바로 맞은편에 플러튼호텔 기억나? MBS 전경을 호텔방에서 감상할 수 있고, 숙박 예약하면 호텔 레스토랑을 이용할 수 있는 30만원 식음료권을 준대. 호텔 1층에 미슐랭 레스토랑이 있어."
"진짜? 나는 MBS 인피니티풀에 가고 싶긴 했는데,,, 뭐라고??
미슐랭 레스토랑????!!"
그렇다. 우리는 호텔 1층의 미슐랭 원스타 <chinese restaurant Jade>에 갈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플러튼 호텔을 예약했다. 카드번호를 입력하는 순간까지도 하룻밤에 60만원 쓰는 게 맞나? 수십 번 고민했다.
입실 시간은 오후 2시였지만, 설레는 마음에 한 시간 먼저 도착해서 로비를 구경했다.
1박에 60만원짜리 호텔이니, 계산해보니 한 시간에 무려 27,272원이다. 으악!! 내일 11시 퇴실시간까지 꽉 채워 호텔을 이용하리라 전의를 불태웠다.
플러튼 호텔의 캐릭터 곰인형과 사진도 찍고, 어린이들을 위한 서비스로 색연필, 그림책도 받았고, 1층 카페에서 매일 아이스크림 한 스쿱을 받을 수 있는 키즈 전용카드를 제공한다. 아이스크림을 매일 먹을 수 있다는 말에 잔뜩 신난 어린이는 아침, 저녁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행복해했다.
2022년 7월, 코로나가 한창... 플러튼의 곰인형도 마스크를 썼다.
체크인을 기다리던 중, 부기스 마켓에서 산 아이의 모자가 끊어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프런트에 바늘과 실을 빌릴 수 있는지 문의하니, 여직원이 정우 모자를 가져가며 잠시 기다리란다. 잠시 후, 그녀는 완벽하게 수선된 모자를 들고 나타났다. 직접 바느질을 해서 가져다주었다.
이것이 초특급호텔의 서비스인가. 체크인 전부터 엄청난 감동을 받으며 입장한다. .
프런트 직원에게 400일 여정으로 세계여행 중인 가족이며, 싱가포르의 마지막 밤을 플러튼 호텔에서 마무리하려고 한다니, 마리나샌즈베이 뷰를 정중앙에서 감상할 수 있는 좋은 방을 배정해 주었다. 방 크기는 그리 넓지 않았지만, 아담한 테라스가 딸려있어 언제든 MBS와 헬릭스 브리지, 싱가포르 강 위로 펼쳐지는 아찔한 뷰를 감상할 수 있고, 커다란 욕조가 딸린 고급스러운 화장실과 어매니티마저 훌륭했다. 야외 수영장의 크기는 작았고, 생각보다 아쉬웠지만 프리드링크까지 알차게 마셔주었다. 룸에 비치된 TWG tea까지 야무지게 즐겼다.
걸어서 3분이면 머라이언파크에 도착하고, 싱가포르 강을 따라 수변 산책로와 노천카페들이 줄지어 있어,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풍요로워지는 느낌이다.
드디어 저녁이다.
고대하던 미슐랭레스토랑 Jade에 간다.
백로가 그려진 수묵화로 꾸며진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와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식기들이 등장한다. 만 4살 꼬마가 헹여나 깨트리진 않을까 노심초사했지만, 겉으론 의연한 척 행동한다.
유명하다는 랍스터 누들과 베이징덕, 그리고 추천해 주는 요리 몇 가지와 따뜻한 재스민 티를 주문했다. 예산을 통제해야 하므로, 웨이터가 눈치채지 않게 속으로 가격을 계산해 가며 주문한다.
윽. 찌질한 소인배의 삶.
드디어 차례대로 음식이 제공된다. 일본의 코바치가 연상되는 작은 접시에 예쁘게 플레이팅 된 요리들이 나온다. 하나같이 예쁘고 훌륭하다. 기대했던 랍스터 누들은 탱글한 랍스터의 육질을 그대로 살려 면과 함께 내는 차가운 요리인데, 유명한 만큼 훌륭했다. 베이징덕과 함께 제공된 오렌지 필이 맛있다며 남편은 두어 번 리필을 요청했다. 아이도 남편도 맛있게 즐겼고, 이제 55개월 아들 녀석과 파인다이닝에서도 식사가 가능하다는 생각에 뿌듯했던 밤이다.
예전에 남편과 미슐랭 레스토랑에 간 적이 있다. 유명 셰프들이 스페인 산세바스티안을 여행하며 미식을 소개하는 <셰프끼리> 프로를 보고, 신혼여행지를 산세바스티안으로 결정했다.
인생 단 한 번뿐인 신혼여행이므로, 다소 무리했다.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 중 하나인 <Martin Berasategi 마르틴베라사테기>에서 런치코스와 와인 페어링을 즐기고, 약 88만 원을 지불했다. 지금 돌이켜봐도 인생 최고의 미식이었다. 과히 환상적이었다. 신혼여행이었기에 과감하게 지를 수 있었다.
이후 두 번 다시 미슐랭 3 스타 레스토랑에 갈 기회는 오지 않았다.
10년 전 남편의 처절하게 외로웠던 기억과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오겠다는 그의 꿈이 이루어졌기에, 우리는 이곳에 올 수 있었다.
만약 식사권이 없었다면 플러튼 호텔을 예약하지 못했을 거고, 미슐랭 레스토랑 Jade에 올 엄두조차 못 냈을 거다. 슬픈 현실이지만, 현명한 선택이었다.
덕분에 단 하룻밤이었지만, 싱가포르 최고의 호텔에서 마리나샌즈베이 뷰를 실컷 바라보며, 쾌적한 방 안에서 레이저쇼를 감상했고, 추억을 남겼고, 사랑하는 아들과 파인다이닝에 도전할 수 있었다.
최고의 서비스를 경험하며 다시 한번 다짐한다. 반드시 경제적 자유를 이뤄 다시 오겠노라고. 남편의 생생한 꿈이 현실이 된 것처럼, 지금 우리가 꾸는 이 꿈도 언젠가 현실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