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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도우 화면 속으로 들어갔다.

버킷리스트 하나를 지웠다, 미국 엔터로프캐년, 홀스슈밴드, 그랜드캐년

by 홍어른

누구나 죽기 전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

매일 윈도우 바탕화면으로 보던 '엔터로프 캐년'은 내게 '신세계' 같은 존재였다. 파도와 바람, 그리고 시간이 켜켜이 쌓여 완성된 찬란한 협곡. 감히 인간이 창조해 내기 힘든 자연의 위대함을 직접 경험하고 싶었다. 세계여행을 떠나기 전, 남편이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을 물었을 때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엔터로프와 그랜드캐년을 꼽았다.



"엔터로프 캐년 얼마나 멋질까? 생각만 해도 너무 설렌다~”

다섯 시간의 긴 이동이 시작된다. 신호등 하나 없이 지평선 너머까지 쭉 뻗은 도로를 달리며 펼쳐지는 멋진 풍광이 이동하는 지루함을 잊게 한다. 엔터로프와 홀스슈밴드에서 10분 거리 작은 inn 호텔에 짐을 푼다. 깎아내린 듯한 깊은 절벽의 후버댐 다리를 건널 때면 오금이 저린다.


“큰일 났네, 어쩌지. 엔터로프 캐년 투어 예약이 모두 찼어.”

“미리 예약을 할 걸 그랬네...”

“예약받는데 많으니까, 천천해 해봐.”


* 엔터로프 캐년은 반드시 인디언 가이드와 동행하는 투어를 해야만 관람이 가능하다.

여러 업체가 있지만, 우리는 KENS TOUR의 lowyer canyon에 방문했다. upper canyon은 경사가 가파르고 계단이 많아 아이와 노약자에게 추천하지 않는다는 평을 보고, 고민 없이 lowyer로 예약했다. loywer canyon도 계단이 좁고 가파르니, 미끄럽지 않은 운동화와 가벼운 복장은 필수다!

(비용 : 어른 2, 어린이 1명 입장료 인디언가이드 비용 포함 177달러, 당시 환율 1,430원 ×177=253,110원)


내일 오후 1시 예약 컨펌 정보가 뜬다.

“Congratuations!”

안도감과 기대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내일이 기다려진다. 마음껏 눈과 마음에 담자.



Grand Canyon still water raft ride


다음날 아침 저절로 눈이 떠진다. 투어시간 전까지 근처를 돌아보기로 한다. 후버댐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Grand Canyon Still Water Raft Ride (Start)에 왔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아찔한 안전벽 아래로 레이크 파월과 절벽뷰를 감상할 수 있다. 멋진 협곡을 바라보며, 엔터로프를 보기 전에 다른 걸 괜히 봤나? 걱정된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는 중,


늘 마음속 버킷리스트였던 엔터로프 캐년에 발을 내딛는다. 계단을 내려서 협곡에 들어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흐느끼는 듯 탄성을 내질렀다. 남편 말로는 7년을 함께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였단다. 내가 소리를 지르는 것조차 느끼지 못한 채, 환상적인 협곡과 햇살이 만들어내는 장관을 바라보며 마음속 깊은 울림을 느낀다. 어느새 두 눈에 감동의 눈물이 흐른다.


좁디좁게 휘감은 높은 협곡과 수억 년의 긴 세월 동안 바람이 완성해 낸 곡선의 아름다움은 자연에 대한 겸허함을 넘어선다.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보적인 나이테와 곡선을 손 끝으로 만진다. 단단하고 거친 표면 아래 따뜻함과 포근함이 느껴진다. 갓난아기 다루듯 어루만지면 마음마저 편안해진다.

편안함은 정우가 팔을 잡아당기며 재촉하는 순간 사라지지만...




엔터로프 캐년은 좁은 협곡 특성상 길을 잃기 쉽고, 비가 내리는 경우 순식간에 물이 차올라 인사사고가 발생할 수 있어, 반드시 가이드와 함께 방문해야 한다. 엔터로프를 발견한 인디언의 후예들이 가이드를 해준다. 포인트마다 환상적인 인증 사진을 찍어준다. ‘우와!!’ 소리가 절로 나온다.

남편이 내 사진을 많이 찍어주기로 했는데, 정우의 엄마 껌딱지 모드가 오늘따라 극성이다.

결국 작은 사건이 발생했다.


가이드가 멋진 포인트에서 독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해서 포즈를 취하는데, 어느새 녀석이 내 옆에 달라붙었다. 남편이 말려보지만, 쉽지 않으니 정우를 옆구리에 안아들고 뛰었다. 녀석의 대성통곡과 함께 발악이 시작된다. 동행하는 일행들에게 민폐를 끼쳐 연신 사과를 했다. 하지만 10분 넘게 이어지는 발광에 차분한 남편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정우가 쓰고 있던 모자 창을 세게 내리치며 혼을 낸다.

깜짝 놀라 남편의 두 손을 붙잡으며 말려본다.


“오빠! 왜 이렇게 화를 내요? 난 괜찮으니까 정우를 그렇게 혼내지 말아요!”

사랑하는 아내의 최고의 순간을 망친다는 생각에 참기 힘들었단다. 작은 눈을 최대한 부라리며 정우를 노려본다. 만 4살짜리 꼬마지만, 아빠가 얼마나 화났는지 눈치채고는, 엄마 품에 안겨 떨어질 생각이 없다.



엄마 껌딱지가 된 아들...


투어 마지막에 다다르며, 정우가 평정을 돼찾는다. 아이의 난동이 엔터로프의 감동을 파괴하기엔 감동의 깊이가 깊다. 머무는 내내 정말 행복했다. 그걸로 충분하다.

다시 한번 또 오고 싶다. 언젠가 꼭 다시 올 거다. 그때는 Lower와 Upper canyon 모두 가리라!





엔터로프 캐년 투어는 약 1시간 정도 소요된다. 점심을 먹고, '홀스슈밴드'에 간다. 엔터로프와 거리가 가까워 하루에 두 군데 방문하기 좋다. 홀스슈밴드는 말발굽 모양을 닮아 'Horse's shoe'라는 이름의 멋진 협곡이다. 이곳 역시 윈도우 바탕화면에서나 보던 곳이다.



홀스슈 밴드에서도 압도당한다는 느낌을 다시 한번 느낀다. 말 그대로 기막힌 풍경이 펼쳐진다.

“가뭄이 오래돼서 그런가... 물이 생각했던 것보다 적네.”

높은 고도와 아찔한 절벽에 꽤나 두려웠지만, 말발굽 형상을 휘감은 강줄기는 환상적이었다.



숙소 근처를 거닐다가 발견한 선셋 명소.






다음은 '죽기 전 꼭 가봐야 할 여행지'에 늘 이름을 올리는 그랜드 캐년이다.

컨디션과 감정상태가 중요하겠지만, 세계적인 명성의 그랜드캐년이 그 어떤 변수조차 압도하는 멋진 곳이기를.. 미국 여행 최고의 순간을 만나고 싶다. 이미 엔터로프를 봤기에 큰 감흥이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이동 중 창문 너머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흥분이 시작된다.

운전 중인 남편이 절제된 탄성을 낸다. “미쳤네!! 장난 아닐 것 같다.”

“오빠! 여기를 어떻게 안 보고 갈 수 있겠어. 너무 설레어서 미치겠어.” 나는 아이처럼 들떴다.


그랜드캐년 국립공원에 입장해 35달러를 내고 지도 하나를 받는다. 남편 입장에서는 운전만 하면 되니 마음이 편하단다. 지도대로 따라가면 모든 캐년을 감상할 수 있다. 레스토랑에서 메뉴 고르 듯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며 만끽하기로 한다.




첫 번째 Look out인 Desert View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간다.

“후우,,,, 우와아아..”

그 순간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 묻는다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라고 답할 것이다. 그저 탄성만 나올 뿐..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겪으면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힌다고 한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생각의 흐름조차 끊어버린다.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수억 년의 세월을 간직한 그랜드캐년을 몇 시간 만에 잘 안다고 표현할 수 없다. 머무는 동안의 느낌이 여전히 생생하다. 그 느낌을 기억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시간 지나 그랜드 캐년의 추억을 꺼내볼 때마다 행복해질 것이다.


여러 뷰 포인트를 지나며 눈앞의 광경에 익숙해지지만, 그랜드캐년을 감상하고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삶에 대해 감사하다. 누군가에겐 그랜드캐년에 가보는 것이 꿈이다. 그곳에서 내가 숨 쉬고 있다.

축복받은 삶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남편이 새벽잠을 설쳐가며, 그랜드캐년 국립공원 인근의 캠핑 트레일러를 예약했다.

별 보는 걸 너무나 좋아하는 나와 정우에게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단다. 혹시라도 곰이 나타나면 어쩌지? 뱀 나오면?? 두려움을 떨쳐내고자 400개 넘는 후기를 다 읽고 평점이 가장 좋은 곳을 예약했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듣고 남편에게 감동했다. 크.. )

도시에서만 살았기에 황무지 한가운데서 머무는 밤이 두렵고, 일반 숙소보다 여러모로 불편하기에, 잘 지낼 수 있을까? 단 하룻밤에도 별별 걱정을 하는 남편과 씩씩한 아들과 함께 캠핑을 간다.



아름다운 그랜드캐년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해가 지기 전까지 떠나지 못했다.

우리의 고질적인 문제 '깜깜하게 어두울 때 새 숙소 찾기'가 반복된다. 고개를 숙여 운전할 만큼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어둠을 뚫고 간다. 구글 지도에 의지해, 비포장 도로를 지난다. 전방에 불빛이라곤 반딧불이의 미약한 불빛뿐 칠흑 같은 어둠이다. 더듬 듯 숙소를 찾고, 문을 연다.

새 숙소를 찾고 문이 열릴 때의 안도감은 행복으로 이어진다. 오는 내내 긴장했지만, 기분이 좋다.




“아빠. 나 여기 별로 안 좋아. 생각보다 작잖아.”

“정우야, 이 정도면 정말 큰 거야.”

“아니야, 작아. 별로 안 커.”


어느새 젠가블록과 장난감을 보고는 아들의 표정이 밝아진다. 소파를 발견한 정우가 점프를 시작한다.

트레일러의 간이주방에서 야매 찜닭을 만들고, 냉장고 속 계란으로 계란말이를 준비해 저녁을 먹는다.

“우와, 이 계란 뭐야??? 맛이 엄청난데??”

“맛있지, 호스트가 갖다 둔 거야. 호스트가 키우는 닭 9마리가 직접 낳은 거래. 진짜 맛있지.”

신선한 계란의 맛은 이렇게나 달구나.. 싶을 만큼 최고의 풍미였다.

“정우야. 내일 이걸로 계란밥 해 줄게. 정말 맛있겠다.”




오늘 여정의 하이라이트!!

대망의 불멍과 별 보기를 위한 세팅에 들어간다. 캠핑 경험이 전무한 남편과 아이가 협심해서 테이블과 장작불을 완성했다. 잔뜩 들뜬 아이가 적극적으로 아빠를 돕는다.

다정한 호스트는 마른 장작도 충분하게, 초콜릿과 쿠키, 마시멜로, 아이스크림까지 넉넉하게 준비해 뒀다.

마트에서 산 싸구려 와인과 아이스크림을 들고 불 주변에 모여 앉는다. 와인을 좋아하지 않는 남편이지만 오늘만큼은 한 잔 청하며 술 친구가 돼준다.




불멍이 시작된다. 때로는 뜨거운 온기가 달려들지만, 여행 중 쌓인 여독을 푼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와 함께 셀 수없이 많은 별이 쏟아지는 밤이다.

“한 번씩 캠핑하는 거 너무 좋다. 정말 행복하다. 너무 근사해.”

이번 여정의 첫 캠핑이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다음 캠핑도 기대된다.

이번 여행에서 오늘이 가장 행복한 날 같아.
고대하던 그랜드캐년도 보고 불멍 하며 쏟아지는 별도 보고.."





야외 샤워장에서 순간온수기로 데운 물로 대충 씻고, 입김이 나올 만큼 차가운 새벽 공기와 싸워야 했지만, 다음 날 아침 청명한 공기와 새소리를 들으며 일어나 소박한 아침식사를 야외에서 즐긴다.

마치 다른 세상에 와있는 것 같다. 아무도 없는 세상에 우리 세 사람만 있는 느낌.


태양광 패널과 간이 샤워실이 딸린 우리의 캠핑트레일러.
초원에서 즐기는 아침식사.


닭이 어제 낳은 신선한 달걀로 만든 스크램블 에그와 우유, 먹다 남은 쌀밥만으로도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아들이 있어 행복한 아침이다.

에스프레소도 스타벅스도 아닌 인스턴트 봉지커피 한 잔 마셔도 몹시 근사한 공간.

그간의 여정 중 최고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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